33권 16화
4월 총선 때, 유재원은 더 퍼시 픽의 완성이 최우선이었다. 통일국 민당의 총선 지원은 CF 출연과 총 선 공약을 설계해 주고, 격전지에 나갈 의원들과 사진을 찍어 선거 운동에 쓸 수 있게 해 주었다.
기업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지원이었다. 물론 마음만 먹었다면 보수 세력의 구심점이 된 박근혜 의원에게 잠재되어 있는 폭탄을 터 트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판 단에 잠시 뒤로 미루었다.
당장의 총선에서 쓰기보다는 2007 년 대선에서 터트리는 게 최고의 효 과가 나올 거라는 정치공학적인 판 단이었다.
그런데 지금 하는 꼴을 보니 그냥 터트릴 걸 그랬다는 후회가 조금 들 었다.
그만큼 일본의 헛소리보다는 내 부 세력 사이의 갈등이 유재원에겐 더 짜증스러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회장님, 이제 출발하실 시간입 니다."
다행히도 김대석의 부름 덕에 짜증이 더 이어지진 않았다. 유재원 은 한 번 딴생각으로 빠져들면 길 게 이어지는데, 이번엔 적절한 때 에 딱 끊어졌다.
"아, 시간이 됐군요."
유재원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 다.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외부 스케 줄이 잡혔다. 그것도 본사나 게임 스튜디오 쪽이 아니라 NBC 로스 엔젤레스 방송국으로 간다.
최근 방송 출연은 거의 하지 않 고 있었지만, 더 퍼시픽 게임에서 시작된 과거사 이슈에 대한 막타를 넣기 위해 기꺼이 응했다.
유재원은 티파니가 생일 선물로 준 서류 가방에 책상 한쪽에 고이 모셔져 있던 서류들을 챙겨 넣었다.
아주 오래전 작성된 듯 종이는 누렇게 변했지만, CIA의 마크는 선 명한 문서 뭉치였다.
-3, 2, 1. 시작!
"투나잇 쇼, 시청자 여러분. 반갑 습니다! 코난 오브라이언입니다."
NBC의 간판 토크쇼 투나잇 쇼 의 호스트 코난 오브라이언이 투나 잇 쇼의 메인 피디의 시그널에 맞 춰 오프닝 멘트를 시작했다.
"오늘 투나잇 쇼로 모신 주인공 은 무척이나 특별한 사람입니다. 컴퓨터라는 물건을 누구나 쉽게 사 용할 수 있게 만들었고, 최근에는 스마트폰이라는 걸 만들어서 손안 에 들어오게 했지요. 최근 만든 물 건은 바로 엑스박스2라는 게임기라지요. 학부모님들은 싫어하시겠지 만, 저 같은 컴맹 아저씨에겐 컴퓨 터보다 더 친숙한 물건입니다. 그 리고 엑스박스2에 탑재된 게임 더 퍼시픽이 요즘 큰 화제가 되고 있 습니다. 그럼 이제 무대로 모셔 보 죠! 태평양 전쟁을 다룬 대작 게임 더 퍼시픽의 총괄 책임 프로듀서 유재원 회장입니다."
청산유수가 따로 없다.
딱 듣자마자 유재원이라 유추할 수 있으면서, ID 그룹의 최신작인 엑스박스2와 더 퍼시픽의 소개까지 자연스럽게 연결했다.
재미있는 건 지금 투나잇 쇼의 진행을 맡은 코난 오브라이언은 회 귀 전에는 투나잇 쇼의 호스트에서 불과 7개월 만에 시청률 하락으로 인해 잘리는 수모를 겪었다는 점이 다. 그러나 지금은 안정적인 시청 률로 나이트 쇼를 이끌어 가고 있 다.
여기엔 유재원의 등장으로 인한 후폭풍이 있었다.
나이트 쇼의 간판 호스트는 전설 적인 진행자 조니 카슨이었다. 무려 30년간 나이트 쇼를 맡으며 안 정적인 시청률을 찍어냈지만, 후임 선정이 잘못되면서 논란이 잠깐 일 어났다.
원래는 데이비드 레터맨이라는 보조 진행자가 호스트가 될 예정이 었는데, NBC 경영진이 밀어주는 낙하산인 제이 레노가 떨어지면서, 이변이 생긴 것이다.
나이트 쇼의 작가에서 시작해 보 조 진행자가 되었고, 나중엔 거의 후계자로 확실시되었던 데이비드 레터맨은 물을 먹고 퇴사하게 되었다. 이후 CBS로 넘어가 레이트 쇼 의 진행자가 되어 큰 성공을 거두 면서 자신에게 물을 먹인 NBC# 게 확실히 앙갚음했다.
만약 NBC가 유재원에게 인수되 지 않았다면 지금도 저기 호스트석 에 앉아 있을 사람은 제이 레노였 을 것이다.
그런데 NBC를 유재원이 인수했 고, 임직원들이 대대적으로 물갈이 되면서 제이 레노에게 낙하산을 태 우자고 주장하는 사람들 자체가 없 었다. 더욱이 제이 레노의 재계약시점이 정확히 2004년이었기에 원 래 이루어졌던 연장 계약이 이뤄지 지 않았다.
그렇게 문제의 제이 레노가 자연 스럽게 퇴장한 다음, 투나잇 쇼의 호스트로 낙점된 것은 코난 오브라 이언이 된 것이다.
낙하산이었던 제이 레노였지만, 특유의 매콤한 토크 쇼를 좋아했던 이들로 지지층을 형성해 놓고 있었 던 터라, 호스트 교체 후 시청률 하락이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제이 레노를 편애하고 코난 오브라이언에겐 홀대했던 경영 진이 사라진 다음이라, 시청률 하 락 속에서도 안정적인 제작 지원이 이뤄지고 있었다.
원래 장기간 독재 체제를 이룬 토크 쇼의 호스트가 교체된 다음엔 1, 2년 정도의 시청률 하락은 당연 한 것이었다.
그런데 1년도 지켜보지 않고 시 청률 부진으로 호스트를 교체한 과 거의 NBC 경영진이 이상한 사람 들이었다.
더욱이 유재원은 코난 오브라이 언이 토크 쇼로 대성공할 것임을 잘 알고 있기에, 팍팍 밀어줄 작정 이었다. 1, 2년은 말아먹어도 그 뒤 로 20년이 넘게 승승장구할 테니 말이다.
오늘 투나잇 쇼에 출연을 결정한 이유는 더 퍼시픽 이슈도 있었지만, 코난 오브라이언의 지원 목적도 있 었다.
-2, 1! 회장님! 올라가십시오.
코난 오브라이언의 오프닝이 끝 나자 유재원에게도 사인이 떨어졌 다.
늘 그렇듯 텔레비전 무대 앞에 서는 건 유재원에게도 부담이었기 에 굳은 얼굴이었지만. 최대한 자 연스러운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 다.
투나잇 쇼의 녹화가 시작된 지 20여 분이 지났을 때.
"오, 노?!"
코난 오브라이언의 망연자실한
비명과 함께 텔레비전 화면이 회색 으로 물들며 게임 오버라는 붉은 글씨가 떠올랐다.
"아니, 왜 화망 속으로 뛰어드시 냐고요. 벙커 공략법은 엄폐물 뒤에 숨은 다음 탄창 교환으로 화망이 약 해진 때를 노려야 한다니까요."
"기관총을 먹었으면 당연히 그래 야 하는 거 아닌가요?"
유재원과 코난은 엑스박스2 컨트 롤러를 나란히 들고 열심히 게임 중이었다. 당연히 그 게임은 더 퍼 시픽이었고, 2?4인이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코옵 미션을 한참이나 공략 중이었다. 최대 4인이 참전할 수 있는 만큼 난이도가 높았다.
협동이 중요한 테마인 탓에 플레 이어 하나가 트롤 짓을 하면 천상 계 실력자라도 스테이지 클리어가 불가능했다.
온갖 게임에 익숙한 유재원은 더 퍼시픽에서도 당연히 순위권에 드 는 랭커였지만, 코난은 완벽한 트 롤이었다. 기관총을 먹었으면 바로 거치해서 물량 러시를 차단해야 하 는데, 들고 뛰면서 람보 흉내를 내다가 죽어 버렸다.
코난이 죽은 뒤, 혼자 남은 유재 원이 놀라운 사격 실력으로 물량 러시를 막았지만 1분 버티는 게 한 계였다. 애초에 기관총을 먹은 게 이머가 잘해 주지 않으면 버틸 수 없도록 프로그래밍이 되었으니 유 재원이라고 별수가 없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더 퍼시픽은 무척이나 재미있고, 잘 만든 게임 입니다. 오직 일본에게만 빼고 말 이죠. 일본이 무척이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혹시 의도하신건가요?"
코난은 유재원도 게임 오버를 당 하자 곧이어 토크에 들어갔다.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덕분에 토 크 쇼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일부 러 게임 오버를 당한 것처럼 보이 지만, 그냥 원래 게임 실력이 형편 없는 것이었다.
하여튼 유재원은 오늘 이 자리에 ID 그룹의 회장이 아닌, 더 퍼시픽 의 총괄 책임 프로듀서로서 자리했 다. 게임 시범으로 더 퍼시픽의 홍 보와 함께 이와 엮인 이슈에 대해 말하는 건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흠,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
"오, 그럼 일부러 논란이 될 만한 콘텐츠를 담았다는 말씀인가요?"
"그건 아니죠. 진주만부터 미드웨 이, 필리핀 탈환 등등. 태평양 전쟁 의 주요 전투를 다루다 보면 자연스 럽게 알게 된 것이었는데, 수위를 지키면서 담아낸 것뿐이거든요."
"수위 조절이라니요?"
"기록된 자료 그대로 담았다간 R등급으로도 모자랐을 거예요. 그만큼 끔찍한 지옥도가 현실에 강림 했더라고요. 게임을 위해서 순화를 많이 했는데 일본이 이렇게 반발할 줄은 몰랐네요."
"R등급 더 퍼시픽이라니. 아마 시청자들도 저처럼 관심이 가는 사 람이 많겠는데요?"
"참아주세요. 가상의 이야기라면 얼마든 게임화했을 텐데, 실제 있 던 일이잖아요. 음, 솔직히 말하자 면 일본의 반응은 조금 예상하고 있었어요. 일본만 다른 역사 인식 을 가지고 있어서 말이 좀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민감하게 나올 줄은 몰랐죠."
유재원은 능청스럽게 말했다.
"다른 역사 인식이라니요?"
"독일의 예를 들어보죠. 독일은 2차 대전 이후 자기들이 저지른 일 에 대해 인정하고, 사과도 했고, 재 발 방지를 위한 조치도 꾸준히 이 어 가고 있지요. 그렇기에 쉰들러 리스트 같은 영화가 독일에서 아무 런 논란 없이 개봉되었지요. 만약 독일에서 쉰들러 리스트가 개봉 불 가가 되었다면? 그 이유가 역사 왜곡이라는 이유로 말이죠? 더 퍼시 픽에 대한 일본의 조치가 이와 같 은 것이죠."
"아!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군요"
유재원의 말에 방청객들까지도 코난과 비슷한 얼굴이 되었다.
독일에서 쉰들러 리스트의 개봉 이 역사 왜곡을 이유로 금지되었다 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논란이 피어났을 테니 말이다.
유재원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면 일본에선 왜 문제로 삼을까요? 그리고 일본의 대응에 대해 주변국들이 화를 낼까요? 그 이유를 알면 더 퍼시픽의 이슈에 대해 깔끔 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단 일본 은 8월 15일을 종전기념일로 기리 고 있습니다. 여기가 일반적인 인식 과 차이가 생기는 포인트죠."
"패전이 아닌 종전이로군요."
"정확한 명칭은 전몰자를 추도하 여 평화를 기원하는 날이라고 하더 군요. 그래서 고이즈미 총리도 종 전을 기념한답시고 야스쿠니 신사 에 참배도 했고요. 올해도 그랬고, 작년에도 그렇게 했죠. 그걸 보고 제가 더 퍼시픽이란 게임을 만들어 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뉴스를 보니 수 차례 사과를 했고, 끝난 문제라고 하던데요?"
"하하, 사과라. 이번에도 독일을 예로 들어볼게요. 홀로코스트에 대 한 사과를 했으니, 다신 언급해선 안 된다고 하면 어떨까요? 아우슈 비츠에서 매년 희생자들을 기리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고 이런저런 핑 계로 방해를 한다면요?"
반면교사가 있다는 게 이렇게 좋 은 일이다.
미국 사람에겐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동아시아의 복잡한 역사 문제 도 독일을 예로 들면서 아주 쉽게 이해시킬 수 있었다.
"아무리 좋은 말로 총리 담화를 하면 뭐합니까? 달라지는 게 없는 데.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성노예 피해자분들에 대한 망언도 늘 터져 나오고 있죠. 이렇게 과거사 반성 도 없는 거죠. 더욱이 최근 들어서 정치권 차원에서 우경화가 진행되고 있으니, 매우 불안하게 볼 수밖 에 없고요."
유재원은 그야말로 논리정연한 말로 방청객을 이해시켰다.
기업인이 이렇게 일본과 첨예한 각을 세우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대대적인 불매 운동이라도 일어나 면 손해가 막심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그 정도 손해 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는 마 음이 있었기에 꺼릴 게 없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물어보겠습 니다."
" 얼마든지요."
"더 퍼시픽 2도 나옵니까?"
코난 오브라이언의 질문에 유재 원은 마음 같아선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일본이 이렇게까지 반응을 해 주니 2도 내주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하지만 참 안타깝게도 더 퍼시픽의 서사는 완벽했다.
"안타깝게도 아니네요. 진주만에 서 시작해서 제509 혼성비행단 호 위 미션까지. 태평양 전쟁의 흐름 에 따라 스테이지를 구성했으니까 요. 이어질 이야기는 없잖아요."
"아! 게이머 입장에서는 참 안타 깝군요."
트롤도 게이머라고 칠 수 있으려 나?
하여튼,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 의 코난에게 유재원은 말을 이었다.
"대신 추가 미션 팩은 계획하고 있습니다."
몰락 작전이라든가, 본편에서는 비교적 간단하게 진행된 미드웨이 해전을 메인으로 놓는 확장 팩들 말이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