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706화 (706/1,007)
  • 33권 15화

    " 젠장."

    고이즈미 총리는 뱃속에서 올라 오는 욕지기를 겨우 참았다.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보고서마다 하나같이 비관적인 말만 가득했다. 특히 방금 올라온 미국발 보고서는 다른 문서보다 암울했다.

    거기엔 미국의 연방 의회 하원에 서 일본이 2차 대전 시절 벌인 전 쟁 범죄에 대한 규탄 성명을 추진 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 다.

    일본계 미국인인 마이크 혼다 의원이 주도적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예전이었다면 일단 웃어서 넘기 고, 압력을 넣어서 좌초시켰을 텐 데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하원 의원들이 너도나도 동의하면서 벌 써 수십 명의 동의를 받은 상태라 고 한다.

    "겨우 게임 하나 때문에!"

    게임이라면 일본도 일가견이 있 는 산업이었다.

    게임의 역사는 미국에서 시작되 었지만, 화려한 꽃이 터진 건 일본 이 만든 비디오 게임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비디오 게임 시장에 ID 그룹이 참전한다고 했을 때, 솔직 히 큰 걱정을 하지 않았었다.

    일본의 게임 업계는 아무리 큰 자본이 있어도, 재미라는 건 특별 한 재능이 없으면 만들어내기 어려 운 것이라고 보았으니 말이다.

    이제는 그 말이 무색해졌다.

    더 퍼시픽의 파급력은 이제껏 출 시된 그 어떤 게임보다 강력했다. 단적으로 저번 달 더 퍼시픽이 출 시된 다음, 일본에 대한 우호도 조 사에서 처음으로 하락이 감지되었다.

    또한 일본을 찾는 여행자 숫자를 예상해 볼 수 있는 호텔이나 항공 권 예약에서도 미미하긴 하지만 취 소가 늘어나는 것이 확인되었다.

    고이즈미 총리의 수심을 더욱 깊 게 만든 건 이러한 흐름에 마땅한 반격의 카드가 없었다는 점이다.

    마음 같아선 감히 일본의 심기를 건드린 유재원이나 ID 그룹에 치명 타를 가하고 싶었다.

    일본을 건드리면 어떻게 패가망 신을 하는지 본보기를 보여서, 어설픈 동조자들이 나올 수 없도록 반면교사를 삼기 위해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ID 그룹이나 유재 원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방법이 없 다는 것이었다.

    더 퍼시픽이 발매되고 나서 짧게 만 고민한 게 아니었다. 고이즈미 가 총리에 오른 다음부터 총리 직 속의 내각 정보실에서 조사하던 것 이 ID 그룹의 약점이었으니 말이 다.

    그도 그럴 것이 고이즈미는 일본 의 잃어버린 10년이 20년으로 길어지게 된 결정적 이유를 일본 내부 에서 찾은 게 아니라, 유재원에게 서 찾았기 때문이었다.

    1998년 터진 일본의 외환 위기 는 분명 유재원이 주도해서 만들어 진 것이었고, 이후에도 일본과는 늘 앙숙이었다.

    ID 그룹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산 업도 원래는 일본이 꽉 쥐고 있던 것들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고이즈 미는 총리가 된 다음 ID 그룹을 상 대할 방법을 찾도록 지시했었다.

    그런데 그 지시가 있은 지, 무려3년이 넘게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방법을 찾지 못하고 변변찮았다.

    단적으로 지금 미국 연방 의회 하원에서 일어나는 성노예 규탄 결 의안이 빠르게 구체화되고 있는 건, 유재원이 그 분야에 관심이 있다는 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잘나신 의원님들이 이제 는 먼저 ID 그룹과 유재원의 심기 를 관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유재 원의 영향력이 미국 의원들이 무시 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해졌다는 중 거였다.

    이게 거짓이 아닌 게, 미국은 로 비가 합법인 나라였고 선거를 치르 면서 쓰는 돈도 무지막지한 곳이었 다. ID 그룹의 로비 능력과 자본 동원력은 가공할 수준으로, 일본의 기업들을 넘어선 지 한참되었다.

    ID 파운데이션이라는 사회 공헌 조직이 매년 쓰는 돈이 수십억 달 러 였다.

    더욱이 일반인들에겐 인지도는 없지만, 일본에는 ID 파운데이션보 다 훨씬 위험한 것이 ID 그룹의 정 치 분야 싱크탱크인 동아시아전략연구소와 덕진재단이었다. 이 두 재단이 쓰는 예산이 ID 파운데이션 만 했다.

    여기에 대중문화를 주도하는 타 임워너 넥스트컴이 있었다.

    영화와 케이블에 지대한 영향력 을 행사하는 기업이었고, 유재원은 그 힘을 제대로 사용했다.

    타임워너 넥스트컴이 찍어내는 영화에서 일본이 좋게 나오는 건 드물었다.

    특히 일본 가전제품은 타임워너 넥스트컴의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반면, 전화기부터 컴퓨터까지 웬만한 가전들이 특별한 경우를 빼 곤 죄다 ID 그룹의 제품이었다.

    특히 컴퓨터는 100이면 100 뉴 에그나 i웍스였는데, 타임워너 넥스 트컴의 할리우드 소품장에는 다른 회사 컴퓨터가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게 불문율이었다.

    영화를 예술로 다루는 감독이라 면 소품에 제약을 거는 것에 대해 경기를 일으키겠지만, 자본이 우선 인 할리우드에서는 큰 문제도 아니 었다.

    더욱이 타임워너 넥스트컴은 언 제부턴가 대박을 쏟아내기 시작했 다.

    올해 2004년만 하더라도 해리포 터, 스파이더맨, 트로이 같은 대작 이 연달아 터지면서 타임워너 불패 신화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여기에 NBC라는 북미 전역을 아우르는 공중파를 보유하고 나서 부터는 거칠 게 없었다.

    온라인 여론은 물론이고 할리우 드와 매스 미디어까지도 영향력에 넣은 덕에 ID 그룹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ID 그룹을 어떻게 해 보려다가 반격을 당하게 되면 큰일이었다.

    당장 더 퍼시픽의 일만 해도 ID 그룹의 후속 대책에 일본이 뭘 어 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NBC 에서 방영된 더 퍼시픽의 다큐멘터리인 게임을 넘어서 2부는 그야말로 고이즈미 총리가 끝까지 보기 힘들 정도였다.

    게임을 위해 과장하고 왜곡했다 고 했던 모든 포인트가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너무도 명백했다.

    성노예가 부족하니 모집에 박차 를 가하라는 문서나, 퇴각 시 꼭 파기해야 할 목록을 열거한 공식 문서에 성노예도 들어가 있는 것 등등. 하나같이 고이즈미의 뒤통수 를 후려치는 것들이었다.

    "성노예라니."

    그 끔찍한 단어를 게임 속에서 다이렉트로 사용하는 패기에 질려 버린 고이즈미 총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종전까지 사용했던 종군 위안부라는 단어는 약간은 숨 돌릴 구석이 있었으니 말이다.

    자발적으로 선택한 경우도 있다 는 뉘앙스를 풍기면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에게 는 직관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성노예는 그야말로 직선 적이었다. 일본 제국군의 성적 욕 구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벌어 진 전쟁 범죄라는 게 바로 연상되 었으니 말이다.

    더욱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공개 된 문서나 증언은 너무나 명백했다.

    가짜 증거라고 말해 봐야 먹히지도 않을 일이었다.

    "결국, 기댈 건 일한 기본 조약 인가."

    일본 제국 시절의 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뒤로 미뤄 놓더라도, 사 죄나 배상 등에 있어서는 1965년 한국과의 국교 정상화를 하며 맺은 한일 기본 조약으로 완전히 끝났다 는 게 일본이 마지막 내세울 논리 였다.

    다음날.

    고이즈미 총리는 어제 정리한 생각을 가장 먼저 자민당에 전했다. 자민당에서도 바로 긍정적인 답변 이 돌아왔고, 곧이어 내각 회의를 소집해 공론화시켰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자마자 한국 대사를 초치시켜 엄중히 항의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요지는 한일 기 본 조약의 청구권 협정으로 사과와 배상 문제는 모두 끝이었는데, 이 런 문제가 다시 불거지는 건 모두 한국 책임이라는 논리였다.

    고이즈미 총리와 자민당은 그저 말로만 엄중 경고를 하는 게 아니라, 한국에 실질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후속 조치도 구상했다.

    ID 그룹이나 유재원은 직접 공격 하지 못하지만, 한국이라면 얼마든 지 때릴 수 있는 일본이었다.

    당연히 고이즈미도 상식이 있는 사람인지라 이를 통해 한국 내 여 론이 반전될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그렇지만 과거 한일 기본 조약을 체결한 정치 세력은 남아 있었고,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적어도 내부에서 크나큰 논란으로 확대되어 유재원에게도 부담이 되기를 기대했다.

    더불어 미국에도 친일파 정치인 들을 움직여서 결의안 채택에 최대 한 제동을 걸어 보는 것도 병행하 기로 했다.

    그야말로 밀릴 수 없는 싸움이 다. 여기서 밀리면 단순히 일본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민당 정권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며칠 후.

    유재원은 널찍한 모니터에 뜬 기 사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일본, 한일 기본 조약으로 보상 끝났다.

    -고노, 무라야마, 오부치 게이조. 역대 총리 누누이 사과했다.

    -한나라당, 역사에 대한 평가 신 중해야.

    -뉴라이트 이영훈 교수, 일제 시 대 근대화에 큰 기여.

    -식민 통치 후 한반도의 생산 능 력 중대 데이터로 확인 가능.

    입꼬리에 걸린 건 명백한 비웃음 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궁지에 몰린 일본이 전가의 보도 처럼 꺼내 든 카드는 역시나 한일 기본 조약에 포함된 청구권 협정이 었다.

    한국의 보수 세력이 신으로 모시 는 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본과 국교 회복을 하며 지은 담판으로 현재 한국과 일본의 비정상적 외교관계를 만든 일그러진 첫 단추였다.

    얼마나 비정상적이었으면 한일 기본 조약 전문은 지금까지도 비공 개 상태였다.

    특히 청구권 협정의 경우에는 결 과만 있을뿐, 어떻게 논의되어서 어떤 식으로 합의가 된 것인지 그 누구도 몰랐다.

    명백히 잘못된 협정인데, 이걸 치적으로 삼는 정당과 그 지지 세 력이 한국에 남아 있었다.

    그것도 2004년 총선에서 제법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자랑하는 정당이었으니, 바로 한나라당이었다.

    더 퍼시픽으로 촉발된 과거사 문 제가 한나라당에게는 매우 껄끄러 운 일이었다는 점이다.

    1년 전이었으면 한나라당의 반발 정도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진 않 았을 것이다.

    국회에서 목소리의 크기는 의원 들의 숫자인데, 16대 국회에서 한 나라당은 소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2004년 4월 치러진 총선 에서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국회에서 1당은 통일국민당이 되 었다.

    대선 직전 이인제 전 대표의 탈 당으로 20석 가까운 의원들이 빠져 나가면서 80석 정도로 줄었던 통일 국민당은 유재원의 지원 덕에 빠져 나간 것을 다 복구하는 것을 넘어 10석 정도를 더 가져왔다.

    2004년 17대 총선의 결과 통일 국민당은 110석으로 원내 일당이 되었다.

    또한, 서울은 물론이고 충청도와 전라도, 부산까지 고른 당선자를 배출하면서 전국 정당의 면모를 확 실하게 선보였다.

    통일국민당의 약진은 곧 민주당 의 부진과 같은 말이었다. 두 정당 의 지지층은 매우 비슷했으니 말이 다.

    민주당은 수도권에서 선전을 보 였지만, 나머지 지역에서는 죽을 쑤었다. 특히 후단협 세력의 이탈 은 전라도 지역구에 타격이었다.

    그 결과 민주당의 의석은 70석 남짓이었다. 회귀 전의 결과와 비 교하면 너무도 극명해 보이는 차이였다.

    회귀 전에는 열린우리당이라는 새로운 여당을 만들었고, 야당이 탄핵 역풍도 제대로 맞아서 152석 이라는 그야말로 대반전을 일으켰 으니 말이다.

    그나마 민주당과 통일국민당의 연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예정이었 기에, 노 대통령의 국정 수행이나 개혁 작업에는 큰 장애가 생기진 않을 것이다.

    이처럼 민주당의 부진은 곧, 한 나라당엔 기회로 작용했다.

    박근혜라는 새로운 구심점으로 보수대통합을 이뤄낸 한나라당은 99석이라는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 어냈으니 말이다.

    대구, 경북을 석권하는 것은 물 론이고 후단협 출신들 덕에 전라도 에서도 의석을 만들었다.

    여기에 경기와 강원도에서도 의 석을 가져와서 99석이라는 숫자를 만들었다. 16대에서는 20석도 겨우 넘었던 걸 생각하면 엄청난 성장이 었다.

    이러한 성공 덕분에 한일 기본

    조약까지도 건드리고 있는 더 퍼시 픽의 후폭풍에 대해 자신있게 발언 할 수 있었다.

    과거사는 이제 놓고 미래로 가자 고 말이다.

    일본의 역대 총리들도 사과했고, 청구권 문제는 지금 기준으로는 부 족했지만 당시로서는 최선의 결과 를 만들어낸 것이었다는 논리였다.

    "하여간, 내부의 적이 문제야."

    유재원은 읽으면 읽을수록 화가 끓어오르는 기사를 보며 투덜거렸 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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