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권 12화
압권은 세 번째 미션인 둘리틀 특공대 미션이었다.
선전 포고 없이 시작된 태평양 전쟁이었고, 진주만에서의 치욕을 갚아 주길 원하는 국민적 열망에 따라 루즈벨트 대통령은 둘리틀 중 령의 특공 작전을 승인했다. 항공 모함 한 대에 폭격기를 싣고 가서 일본 본토를 폭격하는 미션이었다.
거기에서 플레이어는 폭격기를 몰아야 한다.
짧은 항공 모함에서 이륙하는 것 부터 일이었다. 겨우 일본 본토에 진입하면 벌통을 건드려 튀어나온 벌들처럼 일본 제국의 요격기들이 튀어나와 폭격기를 공격했다. 폭격 기의 승무원이 되어 방어도 하면서 폭격을 성공시켜야 했다.
폭격기 조종법은 엑스박스 패드 하나로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도록 비교적 간단하게 만들었지만, 그래 도 힘든 미션이었다.
대신 폭격에 성공했을 때 돌아오 는 보람은 상당했다. 그도 그럴 것 이 플레이어는 프롤로그 미션인 진 주만 공습부터 게임에 빠져들었고, 이전 미션에서는 공공의 적인 나치 와 일본 제국이 동맹이었다는 것도 다시금 상기되었다. 폭격을 하는 데 있어 거리낌이 없었다.
이처럼 역사적 사실을 하나로 꿰 어 예술적인 게임으로 완성된 더 퍼시픽에 대한 반향은 엄청났다.
게임도 게임이지만 게임 외적인 요소도 상당했다.
엑스박스2의 기본 번들 게임이 고, FPS 게임의 명가 ID 소프트웨 어가 4년 만에 내놓는 신작 게임이 었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에서 유럽 전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포커스를 받지 못했던 태평양 전쟁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는 게임은 처음이 었다.
이런 더 퍼시픽 게임의 인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독일과 일본의 판매 금지 처분이었다.
-독일, 일본에서 더 퍼시픽 즐기지 못한다!
-ID 그룹, 독일과 일본판 엑스박 스2 패키지에는 헤일로2 기본 제공 키로.
-더 퍼시픽의 콘텐츠 수정은 없 을 것.
일본과 독일.
하필이면 2차 세계대전의 동맹국 에서 동시에 더 퍼시픽의 판매 금 지 처분이 떨어졌다. 그런데 자세 히 들여다보면 판매 금지라는 결과 는 같아도, 원인은 달랐다.
일단 독일의 이유를 들여다보면 합당하다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전 범국인 과거를 반성하기 위해 나치 즘을 선전하거나 광고하는 게 법으 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나치즘의 상징인 하 켄크로이츠도 금지했는데, 더 퍼시 픽에서는 나치 깃발이 그대로 나오 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당장 두 번째 첩보 미션만 봐도 나치 깃발이 욱일기와 나란히 걸린 만찬 이벤트가 나왔으니 말이다.
반면 일본은 독일과 정반대였다.
-일본 제국에 대한 심각한 역사 왜곡!
-성인 등급 이상의 잔혹한 표현 으로 미풍양속을 해칠 우려가 높 음!
일본이 더 퍼시픽의 판매 금지와 함께 밝힌 이유였다.
선전 포고도 없이 쳐들어와서 민 간인 사망자도 수백 명을 만들어 놓은 진주만 공습을 사실적으로 그 린 것부터가 일본 정부에겐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더욱이 다음 미션에선 나치의 하켄크로이츠와 욱일기가 동시에 걸 리면서 전범기 취급을 받았다.
더 퍼시픽에서 펼쳐지는 일본 제 국의 전쟁 범죄 묘사 중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했다. 둘리틀 특공대의 도쿄 공습 작전 이후, 중국 본토로 귀환한 둘리틀 특공대를 도운 중국 인들을 잡겠다고 펼쳐진 잔혹한 보 복 작전도 그대로 묘사되었다.
이후 미드웨이 해전부터 임팔 작 전, 필리핀 해전과 필리핀 탈환 작 전 등이 이어지면서 전선에서 밀리 기 시작한 일본 제국이 광기로 물들며 벌였던 온갖 막장을 사실적으 로 묘사했다.
그중에서도 일본이 경기를 일으 키는 지점은 바로 필리핀 탈환 미 션에서 나온 5초 분량의 컷신이었 다.
일본 제국군의 진격과 함께 동반 되는 것이 성노예였다. 그런데 미 군의 진격에 후퇴하고 후퇴하면서 최후까지 몰리자, 일본 제국군은 성노예 운영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성노예로 끌려온 이들을 모두 죽이 고 시신을 한데 모아 불태웠다.
그 지옥과 같은 상황이 탈환 작 전 중에 발견되는 것이다. 전 세계 적으로 15세 이상 플레이 가능으로 등급 인증을 받았기에, 노골적인 묘사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정황이 그 대로 표시되었다.
더욱이 비밀 장소에서 찾을 수 있는 수집품 목록 중에는 그 상황 을 찍은 첩보 문서도 있었다.
이후에 나오는 이벤트들 역시 평 범한 것들이 없었다. 그중에서 성 노예 사건과 비견될 만한 것은 오키나와의 집단 자살 종용이었다.
오키나와에서 최후의 방어선을 펼치던 일본군은 연합국에 점령되 느니 죽는 게 낫다며 집단 자살을 하는데, 가는 길에 애꿎은 오키나 와 시민들까지도 끌고 갔다.
일부는 어린아이에게 안전핀이 풀린 수류탄을 쥐여 주고 미군을 향해 달려가도록 했을 정도다.
이러한 일본 제국의 전쟁 범죄를 실시간으로 체험했던 게이머들은 더 퍼시픽의 마지막 미션 중 히로 시마 원자 폭탄 투하 미션에 적극참여했다.
원자 폭탄을 직접 떨구는 건 아 니었고, 원폭 투하에 나서는 제509 혼성 비행단의 폭격기를 호위하는 것이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일본 항공대의 저항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극적 인 연출을 위해 일본 항공대 최후 의 에이스들이 남아 폭격 저지를 위해 사투를 벌이는 가상의 이벤트 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마지막 미션 중 하나라고 한 것은, 플레이어는 몰락 작전 투입과 핵폭격기 호위 중 하나를 선 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게임의 볼륨 때문에 몰락 작전을 선택하면 대규모 작전이 펼 쳐지기 직전 핵폭탄을 맞은 일본이 항복하면서 엔딩이 떠오른다.
둘 다 핵폭탄 엔딩이지만, 플레 이어들 중 십중팔구는 핵폭격기 호 위 미션을 선택했다.
일본 제국의 전쟁 범죄들을 생생 히 봤던 플레이어들은 광기를 잠재 우려면 핵뿐이라는 당위에 도달했 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동안 핵폭탄 투하로 피 해자인 척 자세를 취했던 일본의 두 얼굴에 대해서도 확실히 체감했 다.
자연스럽게 욱일기 역시 쿨하고 멋있는 문양이 아니라 나치의 하켄 크로이츠와 같은 전범기라는 인식 이 젊은이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다.
이러한 게임 속 내용 때문에 일 본 우익들은 더 퍼시픽을 두고 게 임도 아니라는 소리를 멋대로 지껄 였다.
재미있는 건 전문 리뷰어 사이에 일본 우익들의 말을 받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는 것이다.
-맞다. 더 퍼시픽은 게임이 아니 다.
- 예술이다.
본인의 말에 동조한 제목에 신나 서 클릭했던 우익들은 뒤통수를 맞 아 얼얼했다.
더 퍼시픽에 대해 박한 평가를 하는 건 세계에서 일본이 유일했다. 반대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더 퍼시픽의 인기가 올라갈수록 일 본에 대한 재평가도 빠르게 이뤄졌다.
그도 그럴 것이 IDDC 2004가 열리기 직전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 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야스쿠니 신 사에 참배를 했고, 공물도 올렸으 니 말이다.
과거 같았으면 야스쿠니 신사 참 배에 대해 한국이나 중국에서 항의 하는 선에서 끝이었겠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독일과 달리 역사에 반성하지 않 는 일본이라는 프레임이 미국과 유 럽에도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인식이 확산되는 것에는 더 퍼시픽이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기도 했다.
이러한 언론의 흐름에 참지 못한 이들은 일본의 우익들이었다.
일본의 젊은 학생들 중엔 2차 대 전 때 일본의 동맹이 나치였다는 걸 모를 만큼, 현대사를 감추는 데 열심이었으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남다른 행동력을 보 여주었던 일본 우익 단체인 일본회 의라는 곳이 행동을 개시했다.
그것은 바로 ID 소프트웨어와 유재원에 대한 손해 배상 소송이었다. 손해 배상의 사유는 바로 대규모 역사 왜곡으로 일본의 이미지를 더 럽혔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엑스박 스2에 대한 일본 내의 판매 금지 처분도 신청했다.
이미 더 퍼시픽의 일본 정식 발 매가 멈춰진 상태인데도 성이 풀리 지 않던 모양이다.
놀라운 점은 일본의 법원과 검찰 이었다. 법원에선 바로 가처분 신 청을 받아들였고, 검찰에서는 수사 착수를 시작했다.
굼벵이 같은 속도로 원성이 자자 했던 일본의 그 사법부가 맞나 싶 을 만큼 빠른 속도였다.
단순했던 게임 전쟁이 역사 전쟁 으로까지 확전되는 건 그야말로 순 식간이 었다.
#403. 인턴
며칠 후.
IDDC라는 일 년 중 가장 중요 한 행사를 마친 유재원은 오랜만에 일상으로 돌아왔다.
엑스박스2가 메인 이벤트였던 올 해의 IDDC였기에 호응의 크기가 남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게임은 그야말로 보편적인 취미였으니 말 이다.
서재로 출근해서 느긋하게 컴퓨 터로 전 세계의 소식을 직접 찾아 보는 것. 그것이 유재원의 평화로 운 일상이었고, 가장 즐겁게 즐기 는 일이었다. 덕분에 평소보다 훨 씬 즐거운 업무를 볼 수 있었다.
최근의 반년 동안은 한국의 총선 부터 더 퍼시픽의 완성, 그리고 엑 스박스2를 지원하기 위한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 했었다.
유재원이 직접 총괄해야 할 일이 많아서 서재에서 한가로움을 즐길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행히도 모든 작업은 잘 마무리 되었고, 엑스박스2와 더 퍼시픽을 비롯한 런칭 타이틀은 퍼스트 런칭 국가라면 재고 걱정 없이 구매할 수 있었다.
1년 동안 열심히 공을 들인 만 큼, 인터넷 어디를 가 보더라도 호 평이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인터넷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면서 호의적인 글들을 보면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 다.
물론 100% 모두 좋은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니었다.
발매 후 며칠이 지나면서 불평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제일 큰 불만은 가격이었다. 전작에 비 해 200달러나 가격이 상승했으니 말이다.
덕분에 엑스박스2를 포기하고 3 달 후 추수감사절에 나올 플레이스 테이션3를 구매할 거라고 하는 일 부 게이머들도 조금 보였을 정도다.
그런데 소니가 그 일부 게이머들 의 기대감을 충족할 수 있을까?
유재원이 보기에 절대 불가능이 다. 엑스박스2와 경쟁을 하려면 최소한 비슷한 수준의 하드웨어 스펙 으로 무장을 해야 하는데, 그 원가 만 해도 거의 800달러 후반대를 자 랑했으니 말이다. 플레이스테이션2 처럼 가격 경쟁을 하려고 해도 기 기당 최소 300달러 이상의 손해는 감수해야 한다.
결국 스펙을 줄이든, 가격을 올 리든 소니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 지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엑스박 스2에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다른 불만이라면 역시 더 퍼시픽 에 관한 것이었다. 헤일로의 정식후속작 헤일로2마저도 순간 뒤로 밀려날 만큼 더 퍼시픽에 대한 이 슈는 뜨거웠다.
게이머들을 위한 전문 매체뿐만 이 아니라, 일반 매스컴에서도 더 퍼시픽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다양한 이슈들이 파생되었다. 대부분 긍정적인 이야기들이었고, 그중엔 욱일기도 전범기였구나 하 는 자각을 하는 이야기도 많았다.
"아, 독일과 일본은 예외지만."
그렇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긍정 보다 불만이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고 독일과 일본을 똑같 이 등치시키는 건 부당했다.
같은 게임이 서로 다른 이유로 판매 금지되었으니 말이다.
독일은 매우 정상적인 이유로 금 지가 된 것이라면, 일본은 현실 부 정과 정신 승리의 끝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치즘 금지법에 의해 판매가 막 힌 독일이다. 그러니 독일 게이머 들은 재미있는 게임을 본인들만 즐 길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 다. 게임 속에서 등장하는 하켄크로이츠와 아주 작은 비중으로 등장 하는 나치 장교들만 좀 수정하면 될 텐데, ID 그룹은 단호히 콘텐츠 의 수정은 없을 거라고 못을 박았 으니 말이다.
물론 독일 게이머들이 더 퍼시픽 을 즐길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 다. VPN이라는 가상 네트워크 시 스템을 등록해 인터넷 접속 지역을 독일 외의 지역으로 바꾼다면, 회 색으로 비활성화된 더 퍼시픽의 아 이콘이 컬러로 바뀌면서 실행 가능 해진다.
엑스박스2에는 더 퍼시픽이 기본 설치된 상태였으니 말이다.
반면 일본의 불만은 독일과 180 도 달랐다.
일본의 경제가 탄력을 받기 시작 한 1970년대부터 일본의 문화를 세 계에 긍정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어 마어마한 돈을 써 왔다. 애니메이 션을 첨병으로 사무라이니, 닌자니 하는 일본의 문화들이 자연스럽게 미국의 하위문화로 편입될 수 있었 다.
덕분에 어린 시절 일본 문화에
심취하며 일본에 호의적인 성향의 와패니즈들이 양산되었고, 이들이 사회에 진출했을 때 유무형으로 많 은 이득을 챙길 수 있었던 일본이 었다.
그런데 더 퍼시픽이란 게임 하나 로 일본이 수십 년 구축한 이미지 가 와르르 무너지게 생겼으니 비상 이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때마침 김대석이 출근했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