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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702화 (702/1,007)

33권 11화

길버트는 그야말로 기대감 가득 한 눈빛으로 패키지를 훑었다.

스포츠엔 딱히 관심이 없는 취향 이었으니 일렉트로닉아츠의 피파 2004는 일찌감치 탈락이다.

헤일로2와 더 퍼시픽 두 개를 놓 고 고민하던 길버트는 결단을 내렸 다.

"더 퍼시픽! 너로 정했다."

엑스박스1의 성공을 이끈 헤일로 의 정식 후속작인 헤일로2도 너무 나 기다린 게임이었다. 하지만 더 퍼시픽은 그 이상이었다.

발매 전부터 어마어마한 화제를 일으켰고, 최근에는 독일과 일본에 서 판매 금지 처분이 내려지면서 불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더했다.

문제가 될 만한 연출은 물론이 고, 일본의 금기까지 건드렸다고 하니 헤일로2보다 더 호기심이 일 어났다.

더욱이 더 퍼시픽은 하드 디스크 에 이미 설치된 상태였다. 게임기 를 사면 그냥 덤으로 주는 번들 게 임으로 선정된 덕이다.

패드를 움직여 화려한 엑스박스2의 바탕화면에 있는 더 퍼시픽 아 이콘을 꾹 누르자 바로 게임이 시 작되 었다.

오로라가 움직이는 것처럼 아름 답게 펼쳐진 바탕화면이 검게 사라 지고 하얀색 단 하나로 ID 그룹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띄워졌다.

곧이어 ID 소프트웨어의 로고가 띄워지면서 점차 화면이 밝아졌다.

"오옷!"

길버트의 감탄이 나온 것도 이때 였다.

ID 소프트웨어의 로고가 사라지 고 나자 나타난 것은 짙은 푸른색 의 대양과 솜사탕처럼 피어나는 뭉 게구름이었다.

"리얼타임 렌더링이야?"

보통 게임의 시작과 함께 나오는 건 시네마틱 동영상이었다. 더 퍼 시픽도 그 유명한 ID 엔터테인먼트 의 CG팀이 1시간 분량의 시네마틱 동영상을 만들었다고 해서 큰 화제 가 되었었다.

그런데 처음 실행하자 나타난 건 시네마틱 동영상도 아니었고, 타이 틀 화면도 아닌 리얼타임 렌더링 컷신이었다.

곧이어 카메라 무빙으로 새로운 섬이 화면에 나타났다. 하와이였다. 마치 천국이 있다면 이곳일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답게 그려진 하와이의 모습이 완만한 카메라 워 크로 비쳐졌다.

"와."

길버트는 감탄을 그치지 못했다.

구름 표현 하나만으로도 더 퍼시 픽은 기존의 게임들과 차원을 달리 했다. 볼륨감이 느껴지는 구름이라니!

바다를 이루고 있는 물 그래픽은 또 예술이다. 파도가 치는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구름과 바다가 그리고 있 던 아름다운 풍경은 기이한 엔진 소리와 함께 깨졌다.

구름을 찢으며 나타난 것은 날개 에 붉은색 일장기가 선명한 제로센 이었다.

처음엔 한 대였다. 그러나 잠깐 의 시간이 지나자, 구름 속에서 수 십 대가 더 나왔고, 그 숫자는 계속 늘어났다.

선전 포고도 없는 기습 공격이었 다.

-도라, 도라, 도라!

제로센들의 가장 선두에 섰던 선 도기에서 기습 성공을 의미하는 암 호명이 사령부에 발신되었다.

진주만 상공에 무혈 입성한 제로 센은 정박된 미 해군 태평양 함대 의 전투함에 폭탄과 어뢰를 쏟아부 었다. 곧이어 민간인 지역에도 폭 탄과 총알이 쏟아졌다.

천국과 같았던 하와이에는 공습 경보를 의미하는 사이렌이 날카롭 게 울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카메라의 시점 이 달라졌다. 제로센 중 하나가 떨 어뜨리는 폭탄으로 포커스가 잡혔 고, 그 폭탄은 진주만 한쪽의 해군 막사를 향해 떨어졌다.

제로센을 모는 파일럿의 기량이 엄청나게 뛰어난 듯, 멍텅구리 폭 탄은 그대로 막사를 강타하며 폭발 했다.

충격파가 터지면서 콘크리트 건물이 무너졌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건물이 무너지면서 빠져나 오려던 수병들을 그대로 덮치는 모 습까지도 사실적으로 연출되었다.

-이봐! 빨리 나와!

순간 밀러라는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화면이 깜깜해졌다. 그러더니 잔해를 치우는 소리가 나면서 화면 이 밝아졌다.

곧이어 붉게 변한 시선으로 병사 들이 맨손으로 잔해를 치우는 모습 이 연출되었다.

1 인칭이었다.

-살아 있으면 움직여 봐!

하얀 구름이 나온 때부터 지금까 지, 거의 몇 분간 멍하니 보르도 TV에 집중하던 길버트는 움직여 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움직여 보라는 말에 길버트가 패 드의 아날로그 스틱을 움직이자 화 면 속 1인칭 시점의 캐릭터가 콰르 륵 소리를 내며 잔해를 헤치고 일 어서는 게 아닌가.

"어어? 이게 인게임이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리얼타임 렌더 링 컷신으로 알고 있었던 길버트는 캐릭터가 움직이자 깜짝 놀랐다.

본 게임이 시작되려면 적어도 로 딩은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로 딩도 없이 바로 시작이라니.

길버트의 놀람과 상관없이 본격 적인 게임은 지금부터였다. 그나마 익숙한 FPS의 유저 인터페이스가 나타나자 길버트는 곧장 캐릭터를 조종해 게임을 시작했다.

그렇게 상상 그 이상의 충격과 공 포가 담긴 더 퍼시픽의 미션들이 길버트는 물론이고 전 세계 수백만의 게이머들을 한순간에 사로잡았다.

동료들의 도움으로 길버트의 캐릭 터는 무너진 건물을 겨우 빠져나왔 지만, 안전이 확보된 건 아니었다.

제로센의 폭격은 현재 진행형이 었기 때문이다. 한숨 돌리고 있던 길버트를 향해 기총 사격이 이어졌 고, 폭탄도 계속 떨어졌다.

길버트는 게임 속 캐릭터를 미친 듯 움직여서 제로센의 공습을 피해 야 했다.

그 와중에 플레이어를 살려 준 동료들 몇은 총에 맞거나 폭탄의 파편에 휩쓸려 죽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나 복수심을 느끼기도 전에 플레이어가 해야 할 일은 많았다. 뒤집어진 자동차에서 다른 병사들 을 구해야 했고, 대공포를 쏘면서 동료들을 노리는 제로센을 견제해 야 했다.

선택의 갈림길도 나타났다.

임무를 표시하는 화살표가 하나 가 아니라 둘, 혹은 셋이 동시에 나왔으니 말이다.

처음엔 가까운 걸 하고 조금 멀 리 있는 화살표는 나중에 하자고 마음먹었던 길버트였지만, 가까운 곳에 도착해 임무를 처리하고 나와 보니 멀리 있던 화살표는 사라져 버렸다.

"What the FxxK!"

평소 욕을 하지 않던 길버트라도 이번엔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은 병원을 가리키고 있던 화살표였는데, 폭탄이 연달아 떨어지 면서 와르르 무너져 버렸으니 말이 다. 뒤늦게 그곳으로 가 보려고 해 도 건물 잔해에 막혀 진행이 불가 능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제로센의 공 격이 뚝 끊겼다.

수병들의 주둔지를 공격하던 제 로센까지도 모두 진주만에 정박된 미 해군 태평양 함대의 전함과 구 축함들의 공격에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션도 확 달라졌다.

원래 플레이어는 전함 테네시 소 속의 수병이었다. 그렇기에 전함으 로 복귀해 진주만을 벗어나라는 세 부 미션이 뜬 것이다.

전함 테네시로 복귀하는 길도 험 난했다.

복귀하고 나서도 비상 상황에서 승조원이 부족한 탓에 온갖 일을 다 해야 했다.

엔진 출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기 관실로 내려가 밸브를 돌려야 했다. 그리고서 다시 갑판으로 올라와 대 공포를 맞아야 했는데, 전함 테네 시 내부의 모습은 완벽한 고증으로 실제와 똑같았다.

다시 대공포를 잡고 상어 떼처럼 달려드는 제로센을 막아야 했다.

패드보다 한 박자 느리게, 천천 히 움직이는 대공포로 기동력 넘치 는 제로센을 잡는 건 어려웠다. 그 러나 한눈을 팔 수도 없었다.

제일 먼저 공습에 노출되었던 전 함 애리조나가 2번 포탑이 철갑탄 에 뚫리는 치명타를 맞고 탄약고가 폭발하면서 어마어마한 유폭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해수면 아래에 잠겨 있던 함수부 터 함교 앞 선저까지의 공간이 찢 기며 거대한 포탑들이 하늘로 떠올 랐다 떨어졌다.

그 결과 전함이 대각선으로 뒤틀 리면서 두 동강이 나 버렸다.

그 모습이 인게임 화면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길버트는 살아남기 위해 죽어라 트리거를 당겨야 했다. 지옥과 같 은 시간도 끝은 있었다.

죽기 일보 직전을 의미하는 신호 인 시야가 붉게 물들 무렵, 피 냄새에 이끌린 상어 떼처럼 무자비하 게 몰아쳤던 제로센들이 하나둘 물 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게임 화면도 점차 페이드 아웃이 이뤄지면서 컷신으로 넘어 갔다.

그것은 진주만 공습을 마친 제로 센이 일본 제국 연합 함대의 항공 모함으로 귀환하는 모습이었다.

착함에 성공할 때마다 환호성과 함께 반자이 소리도 이어졌다. 그 러면서 연합 함대의 항공 모함의 호위함인 기리시마와 히에이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거기엔 태평양의 바람에 휘날리는 욱일기가 큼지막하게 보였다.

-Yesterday, December 7, 1941.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어제, 1941 년 12월 7일- 이날은 치욕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 모습을 배경으로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이 의회에서 대일 선전 포고 성명을 내리며 했던 치 욕의 날 연설이 깔렸다. 음질은 당 시의 조악한 수준 그대로였지만 덕 분에 비장함은 더욱 높아졌다.

-Remember Pearl Harbor!

-Remember December 7th!

진주만 공습을 다시 한번 상기시 키는 문구가 보르도 HDTV 위에 큼지막하게 떠올랐다.

THE PACIFIC.

그리고 나서야 타이틀 화면이 나 타났다.

1시간 20분 남짓한 진주만 공습 미션이 겨우 프롤로그였던 것이다.

"미친 게임이네."

길버트는 그저 미쳤다는 소리만 나왔다.

그야말로 게임에 푹 빠져들었다. 게임을 하면서 먹으려고 소파 앞에 차려 둔 피자와 치킨, 콜라가 식은 줄도 몰랐을 정도다.

그제야 허기가 진 길버트는 식어 빠진 치킨 하나를 허겁지겁 먹었고, 콜라도 단숨에 마셨다. 그리곤 곧 장 다음 미션을 눌렀다.

이미 길버트는 더 퍼시픽의 마성 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비단 길버트에게 만 일어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엑스박스는 발표 당일 전 세계적 으로 200만 대 가까이 팔아 치웠 고, 이들 중에 반 이상이 더 퍼시 픽을 처음 플레이했다.

압도적인 프롤로그 미션으로 단 숨에 게임에 빠져든 이들은 다들 길버트와 같은 선택을 했다.

-더 퍼시픽 돌풍!

-5일 만에 3백만 장 팔아 치워!

엑스박스2가 발매된 날부터 며칠 이 지난 지금까지. 어떤 인터넷 커 뮤니티를 가든 더 퍼시픽 이야기를 찾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인터넷 전체가 더 퍼시픽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차세대 비디오게임기의 성능을 120% 끌어냈다는 엄청난 비주얼은 둘째 치고라도 게임의 내용이 기존 의 게임들과 완전 차원을 달리했다.

게임을 실행하자마자 시작되는 프롤로그 미션부터 게이머들을 사 로잡는 마력이 있었으니 말이다.

전문 리뷰어들은 엄청난 몰입감 의 비밀 중 하나를 게임 속 인물들 의 자연스러움에서 찾았다.

마치 배우가 게임 속에서 직접 연기를 하는 것처럼 표정이며 동작 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그제야 ID 소프트웨어에서는 게 임 속 거의 모든 캐릭터들의 동작 과 표정을 모션 캡처를 통해 구현 했음을 발표했다.

더 퍼시픽에 담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탈 것에 대한 표현도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의 FPS 게임들은 게임 중에 차량이나 비행기에 타는 묘사 가 약했다.

장비에 따른 조작감이나 무게감 의 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더 퍼시픽에서는 탑승 장비에 따 른 차이가 확실히 났다.

진주만 공습이 메인인 프롤로그 미션 다음은, 일본의 남방작전이 펼쳐지는 필리핀에서의 첩보 미션 이었다.

나치 독일이 일본 제국과의 동맹을 기념해 군사 고문을 파견했고, 필리핀에서 만나 만찬을 즐기는 모 습을 사진으로 찍어 증거로 남기는 등의 미션을 수행해야 했다.

거기에서 플레이어는 온갖 탈 것 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보트를 탈 때나 지프차를 탈 때의 느낌은 확 실히 달랐다. 조작감 역시 마찬가 지다.

여기엔 유재원의 공이 있었다.

더 퍼시픽에서 최적화를 담당했 던 게 유재원이었다.

최적화는 엑스박스2의 성능을 남김없이 뽑아내는 것도 있었지만, 타 격감이나 조작감도 포함이 되었다.

조작감이 엉망이면 잘 만든 게임 이라도 삼류처럼 느껴지는 참사가 터질 수 있다는 걸 잘 알았기에, 아 주 예술적인 세팅이 필요했다.

거기에서 유재원은 본인의 특기 인 '경험'을 제대로 살려 완벽하다 고 할 만큼 깔끔한 최적화를 선보 였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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