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권 3화
존 카맥이 노트북 속 기획안에 집중하는 시간 동안 유재원도 긴장 의 시간을 보냈다.
더 퍼시픽의 제작이 유재원에게 있어서는 역사 왜곡과 우경화로 가 는 일본에 카운터 펀치를 날리는 것과 다름이 없지만, 존 카맥에게 그걸 그대로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기획안에는 오로지 게 임으로서만의 호기심과 재미를 담 아야 했다.
진주만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 의 주요 전투를 모두 다루는 초대형 스케일, 엑스박스2의 런칭 타이 틀로서 현 세대를 뛰어 넘는 최고 의 그래픽, 리얼리티 스타일의 FPS 를 위한 혁신적인 게임 시스템 등 등.
기획서 다운 기획서로 승부를 해 야 했다.
덕분에 유재원은 어제 오후부터 저녁까지 거의 반나절을 더 퍼시픽 의 게임 기획서를 만드는 데 투자 해야 했다. 기억의 궁전 속에 저장 해 놓은 여러 게임들의 레퍼런스들 이 있어서 도움을 많이 받을 순 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똑같은 건 없었기에 유재원은 특히나 공을 더 들였다.
"재미있는 도전이 될 것 같군요."
드디어 터진 긍정적인 대답에 유 재원은 화색을 띄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존 카맥이 승낙했으면 게 임은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더 퍼시픽은 기획서만 봐도 이제 까지의 ID 소프트웨어가 출시한 게 임 스타일과는 한참 거리가 먼 게 임이었지만, 그것이 존 카맥을 자 극하는 포인트가 되었다.
둠이나 퀘이크도 명품 게임이지 만, 뭔가 좀 다른 걸 만들어보고 싶다는 건 마음 한쪽에 잠들어 있 던 욕망이었다.
더 퍼시픽은 그런 존 카맥의 욕 망을 제대로 자극하는 게임이었다.
특히나 존 카맥의 마음을 흔든 것은 3가지 약속이었다.
하나는 엑스박스2의 런칭 타이틀 로서 게임기 구매와 함께 기본으로 제공된다는 것이었다.
"싱글 플레이 타임은 12시간에서 15시간 분량이고, 멀티플레이도 당연히 포함될 겁니다. 그리고 수집 요소와 연동되는 백과사전 기능도 넣을 거예요."
수집 요소라는 건 싱글 플레이 중에 찾을 수 있는 비밀스러운 장 소에서 첩보 정보나 수집용 아이템 을 얻는 것이다.
그냥 스토리라인만 직진해 플레 이하면 애써 만든 콘텐츠를 제대로 다 못 보고 지나가기 일쑤다.
그러니 일부러 수집욕을 자극하 는 것을 넣어서 싱글 플레이 이면 에 담긴 여러 요소들을 직접 볼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이다.
"아마 ID 소프트웨어 역사상 가 장 크고 화려한 게임이 될 겁니다. 제작비도 역대 최고가 될 것이고 요."
두 번째는 초대형 스케일에 맞춰 이제까지 출시된 모든 AAA급 게 임을 뛰어넘는 제작비였다. 그 액 수는 무려 2억 달러!
3D 게임이 대세가 되고 나서 게 임 제작비는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 작했다.
AAA게임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적어도 수천만 달러를 게임 제작비 로 쏟아부어야 했을 정도다. 2000 대부터는 1억 달러가 들어간 게임 이 출현하기도 했다. 둠3가 포문을 열었고, 日人의 메달 오브 아너라는 게임이 뒤를 따랐다.
소규모 게임 개발사가 참신한 아 이디어로 승부하던 시절은 지나가 고, 자본력으로 승부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유재원은 더 퍼시 픽의 제작비로 무려 2억 달러를 책 정했다. 대작을 여럿 만들어 봤던 존 카맥도 과하다고 느껴지는 액수 였지만, 기획서를 보면 타당했다. 총기부터 각종 탈것 등의 효과음을 리얼 사운드로 녹음하고, 배경 음 악에도 오케스트라를 동원하는 건 기본이었다.
여기에 시네마틱 트레일러부터 인게임 동영상까지, ID 엔터테인먼 트가 자랑하는 CG팀을 적극 활용 하기로 했다.
ID 소프트웨어와 엔터테인먼트 CG팀은 크게 보면 식구지만 계열 사 간의 내부 거래는 실제 외주를 맡기는 것과 비슷한 가격을 주고받 도록 하는 게 ID 그룹의 내부 규칙 이었다.
시네마틱 동영상을 많이 사용할 수록 제작비가 치솟기 마련인데, 더 퍼시픽의 기획안에는 그런 시네 마틱 동영상 분량을 무려 30분 이 상 넣을 거라고 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저도 더 피시픽 제 작에 적극 참여하겠습니다."
여기에 유재원도 참전을 선언했 다.
더 퍼시픽은 엑스박스2의 런칭
타이틀이기도 하면서 대일본 카운 터펀치였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직 접 챙기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유재원의 가공할 프로그래밍 능 력을 잘 아는 존 카맥이었으니 그 어떤 약속보다 강력했다. 더 퍼시 픽을 제작하는 데 유재원이 손을 보태면, ID 테크엔진의 수준도 한 차원 더 높아질 것임을 믿어 의심 하지 않았다.
"예! 이번에 전설을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유재원과 존 카맥은 악수했다.
굳건한 신뢰 속에서 더 퍼시픽은 첫 발을 내딛었다.
행동력이 남다른 유재원이었고, 존 카맥도 그에 못지않은 사람이었 다. 더 퍼시픽에 관해 오전 내내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점심을 먹고 나서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엑스박스2 의 런칭은 늦어도 내년 추수감사절 전에는 되어야 했다. 그러면 남은 시간은 1년 남짓에 불과했다.
AAA타이틀을 1년 만에 만드는 건 미친 짓이지만, 그 미친 짓을 가능하게 하는 건 2억 달러에 달하 는 제작비였다.
유재원이 살던 21세기 중반에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이 있다면, 혹시 돈이 모자란 건 아닌지 생각 해 보라는 말이 있었다. 돈이면 웬 만한 문제는 다 풀 수 있다는 이야 기였다. 더 퍼시픽 역시 예외는 아 니었다.
더욱이 ID 테크엔진에는 수많은 서드파티 업체들이 등록되어 있었 다. 이들을 아웃소싱 업체처럼 사 용하면 귀한 시간을 벌 수 있다.
ID 소프트웨어의 전체 회의를 소 집해 더 퍼시픽에 대한 브리핑을 했고, 총력 개발체제로 전환했다. ID 소프트웨어의 개발인력 중 10% 정도만 ID 테크엔진의 유지보수를 위해 남겨 놓고, 나머지 모두를 더 퍼시픽 개발에 착수하는 것이었다.
촉이 남다른 게이머들은 ID 소프 트웨어의 체제 전환에 대해 기가 막히게 알아보았다. 인력 배치가 바뀌는 것만으로도 ID 소프트웨어 에서 뭔가 거대한 프로젝트가 시작 되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대다수 게이머들은 레전드 리그, 혹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첫 번째 확장팩 불타는 성전에 빠져 정신이 없었지만, 골수 FPS 팬들에 게는 ID 소프트웨어만한 개발사가 없었다. 몇 년째 신작 소식이 없었 던 ID 소프트웨어가 기민하게 움직 이는 모습에 기대감에 부푼 게이머 들도 많았다.
ID 소프트웨어의 개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프로젝트, 그것도 엑스박 스2의 런칭 타이틀을 맡게 되었다는 것에 열광하지 않는 개발자는 없었다.
재미있는 건 ID 소프트웨어의 개 발진 중에 이제야 처음으로 게임 제작에 참여하는 이들도 상당수였 다는 사실이다.
90년대와는 차원을 달리할 만큼 거대해진 ID 소프트웨어였고, 새로 운 인력은 매년 충원되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신작 게임 을 만드는 것 대신, ID 테크엔진 개량에 공을 들인 탓에 새로 취업 한 개발자 중에 게임 개발을 맡아본 이가 거의 없었을 정도였다.
빠듯한 시간에 대작을 만드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인데도, 개발자들 이 너무나도 좋아하는 건 그런 배 경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유재원은 바로 참가 하진 못했다.
지금 당장 유재원이 할 수 있는 일도 없을뿐더러, 선결 과제들이 많이 쌓여 있던 탓이었다.
유재원은 어설픈 형태라도 플레 이가 가능한 알파빌드가 만들어졌 을 때, 참가하기로 하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유재원이 시작한 건 과거 엑스박스 설계에 참여했던 TF팀을 다시 소집한 것 이었다.
ID 테크놀로지의 엔지니어들은 프로젝트에 맞춰 팀을 꾸리고, 일 이 끝나면 원래 자리로 복귀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ID 그룹이 조직된 이유가 유재원이 즉흥적으로 벌 이는 일을 체계적으로 바꾸는 것에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번에도 유재원이 엑스 박스 설계팀을 소집하자 거의 빠짐 없이 자리에 참석했다. 안타깝게도 100%는 아니었다. 퇴사한 사람도 좀 있었고, 장기 휴가를 떠난 사람 들도 있었던 탓이다.
사실 ID 그룹에선 잘 보이지 않 을 것 같은 의외의 수치가 있는데, 개발직군의 연차별 퇴직률이었다. 1년 차와 2년 차는 다른 기업들보다 낮았지만, 3, 4년 차에 퇴직하는 경우가 다른 IT 기업보다 높다.
이유는 아주 직관적이었다.
하는 일이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처음 통계 데이터를 접한 임원들 은 하루 8시간, 주 5일 근무이니 한국의 그 어떤 대기업보다 근무 환경이 좋고 북유럽과도 충분히 견 줄 수 있는 근무 환경인데, 무슨 말이냐 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근무 시간과 근무 강도는 별개의 일이었다.
ID 그룹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개발팀인 알파 팀에서 하루 8시간 이란 제한 시간 내에 최고의 퍼포 먼스를 꾸준히 유지하는 일은 무척 이나 버거운 일이었다. 3, 4년 동안 긴장감을 놓지 않고 달리다 보면 번아웃 증후군에 걸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나마 일반 사무직이나 생산직 의 경우에는 다른 기업들에 비해 월등히 낮은 퇴직률을 보이고 있어 서, 평균을 내보면 근속연수가 높 게 찍히고는 있다.
천만다행히도 엑스박스 TF팀의 경우 4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과거 TF팀의 80% 정도 되는 이들이 모 였다.
모두 16명으로 작은 숫자였기에 ID 테크놀로지 본사의 소규모 회의 실에 모두 모였고, 유재원은 그 앞 에서 본격적인 엑스박스2 프로젝트 를 가동했다.
"이번엔 800달러 후반대에 맞춰 볼까합니다."
엑스박스2의 기틀을 잡는 시작점 은 가격이었다.
"설마, 이번에도 299달러로 발매 하시려고요?"
과거 엑스박스 TF팀의 팀장을 맡았던 이가 사색이 되어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엑스박스 오리지널 의 경우엔 600달러 후반대의 원가 를 가진 제품을 299달러라는 반값 에 팔았다. 본체 한 대를 팔 때마 다 300달러에 달하는 손해가 생기 는 구조였다.
게임을 팔아서 손해분을 메꾼다 지만, 기기당 정품 패키지가 10장 씩은 팔려야 겨우 손해를 면하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엑스박스1의 기기당 패키지 장착 률은 4.8장에 불과했던 탓이다.
그런데 이번엔 600달러도 아니 고, 800달러 후반이라니. 과거처럼 299달러로 판다면 한 대 팔 때마다 500달러의 손해가 나는 것이다.
"이번엔 원가가 높아지는 만큼, 리테일 가격도 좀 올리려고 합니다. 499달러 정도로 생각하고 있죠."
유재원의 말에 엑스박스1 팀장이 안도했다.
그래도 300달러 정도의 손해가 발생했지만, 밑도 끝도 없이 퍼주 는 것보다는 나았다. 게다가 엑스 박스 팀장인 그도 IDDC 2003에 발표할 엑스박스2의 스펙을 정하면 서 이건 보통 비싼 물건이 아니구 나 예상은 했다.
유재원이 장담한 성능대로 PC를 만들면 1,200달러 정도는 가뿐히 넘겼으니 말이다. 더욱이 6코어 CPU같은 건 지금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인텔과 AMD에서 내년 출시할
신모델로 8코어 CPU를 준비하고 있긴 하다는데, ID 그룹도 아직 샘 플을 받아보진 못했으니 말이다.
GPU도 마찬가지다.
풀HD 환경을 정식으로 지원하는 GPU는 현존 최상급 모델에 한하는 데, 카드 한 장 가격이 5, 600달러 는 쉽게 넘었다.
재미있는 건 이러한 시세 형성에 ID 일렉트로닉스의 영향력이 제법 컸다는 점이다.
엔비디아에서는 빅칩을, ATI에서 는 메인스트림용 스몰칩을 ID 일렉트로닉스에 생산 의뢰를 했기 때문 이다.
ID 일렉트로닉스에서는 수주 받 은 두 회사의 칩을 성실하게 생산 했다. 덕분에 게임은 엔비디아라는 말이 나왔고, ATI는 중저가 시장을 장악했다.
같은 공정이라도 ID 일렉트로닉 스의 칩이 성능이 더 높았다. 덕분 에 빅칩을 쓴 최상급 모델에선 엔 비디아가 앞섰고, 중저가 시장은 ATI가 가져갔다. 이 구도만 보자면 엔비디아가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속은 ATI가 챙겼다.
생산량의 차이 때문이다. 웨이퍼 당 생산량에서 스몰칩이 압도했고, 이는 곧 가격 경쟁력이 탄탄하다는 걸 의미했으니 말이다.
문제는 풀HD를 지원하려면 빅칩 을 사용해야 하는데, 엑스박스 팀 장은 유재원이 도대체 어떤 식으로 단가 문제를 극복하려는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재원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