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권 15화
문제의 해결은 제대로 된 현실 파악부터인데, 원인을 가리는 데 급급하니 일본이 제 정신을 차릴 가능성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다.
-……우리 한반도는 동북아의 중 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반도 는 중국과 일본, 대륙과 해양을 연 결하는 다리입니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가 지난날에는 우리에게 고통 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오히려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21 세기 동북아 시대의 중심적 역할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재원이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 이 노 대통령의 취임사는 동북아 허브론에 이르렀다.
취임사의 내용을 정확히 따져 본 다면 대구 지하철 참사에 대한 위 로가 사라졌고, 대신 동북아 허브 론이 일찍 등장한 그림이다.
대구 지하철 참사가 사라진 이유 는 역시나 유재원의 힘이 작용한 결과였다. 참사를 일으킨 범인을 유재원이 일찌감치 처리해 놓았다.
지옥으로 던져도 시원찮을 놈이 지만, 그렇다고 죽였다는 건 아니다. 뇌졸중 증상이 있는 그놈에게 ID 파운데이션에서 치료의 기회를 제공했고, 치료를 위해 서울의 병 원에 입원시키는 것으로 참사를 막 았다.
마음 같아선 치료를 대충하고 뇌 졸중 재발로 죽게 만들고 싶었지만, 치료는 제대로 하는 중이다. 그저 누구도 알아주지 못하는 일이지만, 옳은 일을 했다는 자부심만큼은 확 실했다.
하여튼 노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대구 지하철 참사가 빠진 대신 동북아 허브론이 일찍 나오게 된 것 이다.
"이번엔 가능하려나?"
유재원의 말이 이번에라고 시작 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과거에는 달성하지 못한 일이었다. 중국은 중국대로 문제였고, 일본 역시 마 찬가지였다. 더욱이 한반도는 북한 디스카운트로 인해서 반도라는 특 성을 살리지 못했다.
반면 지금은 동북아 허브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회귀 전보다 높았다.
일단 최악이었던 북한과의 상황이 너무나도 좋아졌다. 종전 선언 으로 북한과의 대치 상황이 끝났다. 북한의 경우에도 핵 개발 프로그램 은 정지된 상태였고, NPT(핵 확산 금지 조약)도 유지 중이었다.
경수로도 제대로 설치되어 북한 전역에 양질의 전기를 제공 중이었 고, 한국과의 경제 협력도 좋았다. 덕분에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이 자 리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경수로는 한반도의 새로운 모습 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전기의 안정적인 공급으로 북한의 생활상이 확 달라진 것도 있지 만, 조만간 북한의 경수로에서 첫 번째 폐연료봉이 나오는 탓이다.
폐연료봉은 북한에 임시 보관했 다가, 보관소가 다 차면 한국의 방 사능 페기장으로 옮기기로 했는데, 임시 보관소 경비를 미국군이 서기 로 했다는 건 시사점이 매우 컸다.
명분도 확실했다.
애초에 경수로라는 게 북한의 핵 개발을 중지하는 대신 설치되는 발 전소였다. 혹시나 북한이 약속을 어기고 폐연료봉 재처리를 할 위험이 있으니, 폐연료 처리에 미국이 참여하는 걸 막을 명분이 없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재조명되는 곳이 있으니 90년대 초 유재원이 만든 싱크탱크인 동아시아 전략 연 구소였다.
동아시아 전략 연구소는 중국의 위기론을 주장하며 펴낸 라이징 차 이나에서 북한의 미군 주둔 가능성 과 효용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 었다.
원래는 개마고원에 주둔하는 것 이었는데, 폐연료봉 보관소 경비로 현실적인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과거에는 상상도 못 했 던 엄청난 일이 현실화되고 있는데, 그걸 일찌감치 예측했으니 몸값이 폭등하는 건 당연했다.
안타깝게도 폐연료봉 임시 보관 소에 들어갈 경비 병력은 1개 중대 도 되지 않는 소규모였다.
게다가 임시 폐기물 보관소는 동 해안 쪽에 설치되는 터라 개마고원 과 한참 멀었다.
하지만 북한에 미군이 들어간다 는 건 엄청난 일이었고, 그만큼 의미도 있었다.
한반도의 가치가 미국의 세계 경 영 구도에서 새롭게 부각되었으니 말이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다시금 미국에 도전하게 된다면, 한반도의 가치는 더더욱 상승할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노 대통령이 말하 는 동북아 허브론도 성공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자면 개혁과 통합을 위 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정치부터 바꿔야 합니다. 진정 국민이 주인인 정치가 구현되어야 합니다. 당리당략보다는 국리민복을 우선하는 정치 풍토가 조성되어야 합니다.
-또한,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위 해서라도, 사회의 건강을 위해서라 도 부정부패를 없애야 합니다. 이 를 위한 구조적 제도적 대안 시스 템을 모색하겠습니다. 특히 사회지 도층의 뼈를 깎는 성찰을 요청합니 다.
이어지는 노 대통령의 말에 유재 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북아 허브에 도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역시나 국력의 증 진이라는 진단은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결론이었다.
실제로 한류라는 게 폭발하기 시 작한 것은, 한국의 경제력이 세계 최상위권에 도달하고부터 였다.
그러한 경제력을 만드는 발판이 개혁이었다. 나라에 큰 도둑이 아 직도 많은 상태인데, 이들을 처리 하지 못하면, 애써 이룩한 경제적 성장은 나라 전체에 퍼지지 못하고 고여 있게 된다.
아직 한국에서는 양극화가 큰 사회 문제가 되진 않았다.
회귀 전 있었던 IMF 구제 금융 체제에서는 고용의 유연성이니 뭐 니 하며 비정규직 양산 체제를 만 들었지만, 이번엔 유재원의 개입 덕에 그나마 지켜낸 것 중 하나가 정규직이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사회지도층이란 작자들 의 반발이겠지."
노 대통령은 기세 좋게도 취임식 자리에서 '사회지도층의 뼈를 깎는 성찰'이라는 걸 요구했다.
선출 권력이 가장 큰 힘을 가진 시점이 바로 인수위원회 시절과 취 임식 직후였다. 나는 새도 떨어뜨 릴 만큼 강력한 권력을 자랑하지만, 이후에는 꾸준히 내리막길이었다.
특히 노 대통령은 몇 가지 정치 적 실수를 하는데, 그로 인해 대통 령의 권위가 말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령'。] 서지 않는 수준 까지 떨어졌다고 할까. 그러니 개 혁 작업에도 온갖 반발이 쏟아졌다. 조금 전 언급된 사회지도층이란 세 력이 똘똘 뭉쳐 저항하자 제대로 이뤄지는 것도 없었다.
유재원은 이번엔 그렇게 되지 않 기를 바랐다.
노 대통령이 실패한 대통령이 되 면, 그만큼 유재원이 할 일도 많아 지니 말이다.
재미있는 건 사회지도층의 급을 따지면 한국에서 유재원보다 높은 사람은 없을 터인데, 정작 본인은 전혀 사회지도층이란 자부심은커녕 자각도 미미했다는 점이다.
"이번엔 그 어떤 때보다 타이밍 이 좋아."
노 대통령의 취임사가 마지막 대목을 향해 갈 때, 유재원의 머릿속 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여러 가지 변수들이 떠올랐다 내 려가며 노무현 정권의 성공 가능성 을 따져 보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성공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일단 전체적인 상황은 모두 긍정 적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물론 미국까지도 한국에 우호적이지 않 은가.
미국의 대통령이 문제아 부시가 아니라 앨 고어였고, 재선도 유력하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이라크 내전이 문제였지만, 굳이 미국이 아니더라도 유럽과 러시아가 나서 고 있었기에 중동 전체의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은 낮았다.
국내의 상황도 좋았다.
보수 세력은 한나라당과 민주한 국당이라는 두 개의 정당으로 나뉜 상태였다.
보수 세력의 나침반과 확성기 역 할을 하던 대한일보도 유재원에게 박살이 난 상태였다. 대한일보의 자산이 남아서 호텔이니 리조트니하는 사업은 유지되고 있었지만, 일간지부터 주간지, 월간지 모두 파산해 버렸다.
국회의 상황도 괜찮았다.
제1당은 민주당이었고, 얼마 전 까지 연정을 펼쳤다. 통일국민당도 분당 사태가 있었지만, 합치면 여 전히 과반 이상이다.
믿을 수 없는 군대도 이제는 꽤 나 깨끗해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하나회 숙청 으로 가장 큰 불안 요소가 제거되 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문민 통제가 확립되면서 인사권도 확실히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작년 월드컵 때의 기부 물 품 횡령 사건으로 군의 개혁 작업 에 박차가 가해졌다.
하나회 이후로도 군대 내 똬리를 틀고 있던 알자회와 독사파도 공수 처에 의해 발각되면서 완전 박살났 다. 현역 회원들은 물론이고 전역 한 이들까지도 모두 다 기소되었는 데, 그중에서 압권은 현역 알자회 회장이었던 권항주 대장에 대해서 는 사형이 구형되었다는 점이다.
독사파 역시 예외는 아니다. 우 수한 인재를 뽑아 해외에 보내 연 수를 받게 해 줬더니, 자기들끼리 뭉쳐 사조직을 만든 이들은 모두 불명예 퇴역시켰고, 죄에 따라 형 법으로 다스렸다.
검사의 구형이 곧 형의 확정은 아니었지만, 시사하는 바는 확실했 다. 바로 군은 더 이상 정치를 하 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위험 요소인 군까지 정리 된 덕에 국정 운영의 난이도가 불 지옥에서 어려움 수준으로 내려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여기에 유재원이란 치트 키도 있 으니 노무현 정권의 성공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렇지만 걱정거리는 없는 건 아 니다.
노 대통령이 어쩔 수 없이 단일 화를 받아들이게 만든 민주당 내의 후단협이란 작자들도 있었고, 민평 련이라는 민주화 운동 세력이 모인 계파도 언제든 터질 수 있는 화약 고였다.
여기에 탈권위주의적인 노 대통령의 성향도 유재원은 국정 운영에 큰 마이너스 요소라고 판단했다.
"아무래도 독대를 신청해야겠는 걸."
결국 유재원의 입에서 독대라는 단어가 나왔다. 역시나 노 대통령 역시 유재원이 알던 노 대통령이었 던 탓이다.
이러한 결론을 내린 건 조금 전 마침표를 찍은 취임사가 결정적이 었다.
취임사는 회귀 전과 달라진 부분 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유재원이 알던 것과 90% 이상 일 치했다.
그렇기에 노 대통령이 앞으로 보 여줄 행보 역시 전과 비슷할 거라 고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 었다.
예전의 행보라는 건 결국 실패로 가는 길이었기에, 유재원은 취임식 이 끝나자마자 행동을 개시했다.
회귀 후 청와대를 여러 번 방문 했던 유재원이었다.
이제까지는 모두 공식적인 방문 으로 방문 행사도 성대하게 벌어졌 었다.
하지만 이번의 경우에는 그 어떤 방문보다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유재원이 보통 평범한 존재는 아 니었지만, 독대를 한 사실이 알려 지면 대통령이나 유재원 본인에게 나 부담이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독대를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이인제, 전재준이 전혀 변하지 않은 것처럼, 노 대통령 역시나 그대로의 노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겨우 취임사 하나로 그걸 판단할 수 있느냐 하겠지만, 유재원은 다 양한 방식으로 노 대통령을 평가하 고 있었다.
정보팀의 동향 보고서는 기본이 었고, 유재원 본인이 알고 있는 미 래 지식까지 동원한 분석이었다. 취임사는 그저 막타에 불과했다.
청와대에 조용히 입성한 유재원 은 곧 집무실에서 서류와 씨름 중이던 노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
딱 봐도 인사 관련 서류라는 걸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 대통령 이 가진 강력한 권력 중 하나가 바 로 인사권이었다.
행정부는 물론 공기업과 정부 출 연 기관, 국책 연구소 등에 인사권 을 행사함으로써 본인의 정치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데스크에 쌓인 서류들을 보니 아 직 인사권을 본격적으로 행사하기 전인 것 같아 다행이었다.
"대통령님, 안녕하세요!"
"유재원 회장님, 반갑습니다. 직 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로군요."
유재원이 먼저 머리를 꾸뻑 숙이 며 인사했고, 그런 유재원을 향해 노 대통령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번에 논문 잘 봤습니다. 인공 지능이라는 최첨단 분야에서 유 회 장님이 한 건 크게 하셨지요? 대통 령 이전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으로 자랑스러웠습니다."
역시나 노 대통령은 IT 전문가답게 분위기를 푸는 서두에서 유재원 의 인공지능 논문을 언급했다.
사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중 하나가 노 대통령의 프로그래밍 실 력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1차 산업 전문가 처럼 보이지만, 프로그래밍에도 수 준급 실력을 가진 사람이 노 대통 령이었다.
청와대의 전자 문서 기반 행정 처리 시스템인 이지원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이 노 대통령 이었을 정도로 말이다.
정치인 중에서는 IT에 대한 이해 가 역대 최대라 할 수 있었기에, 유재원이 발표한 기계 학습 기반 인공지능 논문의 뛰어남도 바로 알 아볼 수 있었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