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662화 (662/1,007)
  • 31권 21화

    "와 주셔서 고마워요."

    유재원은 거부감 없이 최재영의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눴다.

    1년 전만 해도 이렇게 서슴없이 악수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런 유 재원의 마음이 바뀐 건 최재영의 이혼 때문이었다.

    회귀 전보다 훨씬 빠른 이혼으로 인해 최재영의 셋째 아들이라는 존 재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복수의 대상 중 하나가 유재원이 직접 의도한 것도 아닌데, 태어나 지도 못한 것이었다. 복수에 대해서도 칼을 갈고 있던 유재원이었는 데, 이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유재원은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셋째가 존재조차 사라졌다고 해 도, 일성은 일성이었다. 첫째나 둘 째가 사라진 셋째를 대신해 똑같은 짓을 할지는 아직 모르는 법이니 말이다.

    이러한 결론 덕분에 최재영을 대 하는 유재원의 표정엔 해묵은 감정 은 없었다.

    오히려 감정이 있는 쪽이라면 최재영이어야 한다. 일성그룹에서 그 룹의 사활을 걸고 키워 왔던 일성 전자를 헐값에 강탈하다시피 가져 왔고, 일성그룹의 회장 최현희를 감옥에 보내 버렸으니 말이다.

    황제 옥살이라는 말이 나올 만 큼, 감옥에 있는 시간보다 병원에 가 있는 시간이 더 많긴 했지만, 내후년까지는 꼼짝없이 옥살이해야 한다.

    "환대 감사합니다."

    본인의 아버지를 감옥으로 보낸 사람 앞에서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버지와의 사이가 대중에게 알 려진 것처럼 좋은 게 아닐 수도 있 고, 아니면 일성통신이나 새로운 스마트폰 사업부 같은 신사업을 위 해서 당장은 고개를 숙이는 게 좋 겠다는 판단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 만, 최재영도 보통은 아님을 알게 되는 대목이었다.

    기업인들과의 인사가 다 끝나고 서 행사가 시작되었다.

    개장 행사 자체는 짧았다. VIP 중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단상으로 올라가 한 마디씩 하고 리본 커팅식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마지막으로 단체 사진과 같은 것 을 한 장 찍고 정치인 부류의 VIP 들은 제 할 일을 하러 이동했다.

    특히 바쁜 사람들은 통일국민당 사람들인데, 오늘이 대통령 후보 경선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다.

    3시부터 전당 대회가 있는 장충 체육관에서 전국 대의원 투표가 있 고, 저녁 6시부터 개표를 시작해 온라인 투표와 합산한 후 대선 후 보를 정하게 된다.

    다른 정당도 적어도 1월 초에는 대선 후보를 모두 정하게 되는 일 정을 갖고 있었기에, 통일국민당뿐 만이 아니라, 다른 정당 의원들도 다들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반면 나머지 사람들은 상대적으 로 한가한 모습으로 ID 디지털미디 어센터 안으로 이동했다.

    이미 디지털미디어센터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고, 들어오고 있었다. 리본 커팅식은 사실 요식 행위였다. 한쪽에서 유재원이 높으 신 양반들과 리본 커팅식을 하며 기념을 할 때, 다른 쪽 입구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입장 중이었으니 말 이다.

    개장과 함께 열린 행사가 있었던 탓이다.

    2002 스타 리그 윈터 시즌 결승 전!

    e스포츠의 겨울 시즌을 마감하는 가장 큰 행사가 바로 오늘 ID 디지 털미디어센터의 역사적 첫 행사로 잡힌 스타 리그 윈터 시즌 결승전 이었다.

    이번 행사가 갖는 또 다른 의의는 바로 유료 입장권이었다.

    1만 원이라는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이지만, 스타 리그 역사상 처 음으로 경기장 입장 티켓을 유료로 팔았다.

    일부 관계자들은 공짜로 보는 게 익숙한 관람객들이니 누가 돈을 내 고 볼까 싶어 우려를 표했지만, 그 들의 우려는 역시나 우려였을 뿐이 었다.

    인터넷으로만 예약을 받았고 티 켓을 팔기 시작했는데, 일주일 전 에 매진이었으니 말이다.

    원래의 역사보다 빠르게 자리를 잡은 e스포츠였고, 게임에 대한 사 회적인 인식도 나쁘지 않은 덕에 일어난 기적이었다.

    더욱이 행사장에서는 각종 사은 품이 뿌려지고, 다양한 게임 쿠폰 도 쏟아졌기에 티켓값 이상으로 얻 어갈 수 있는 게 많았다.

    무엇보다 대진표가 어마어마했다.

    JM파워 대 슬레이어즈박서.

    가을의 전설을 또 다시 쓰려는 원주민 선수와 황제의 귀환을 노리 는 임요환 선수와의 대전이었다.

    더욱이 오늘 경기가 끝나고 나서 는 일성그룹을 비롯해 미래그룹, 미래자동차그룹, TG모바일과 같은 기업들의 프로 게임단 창단 발표와 함께 프로 리그라는 새로운 프로 리그 시리즈가 발표될 예정이었다.

    이미 게이머들은 다 아는 소식이 었지만, 그동안은 몇 개의 기사나 풍문으로만 돌았던 것이 정식으로 발표되는 자리였다.

    그렇기에 해당 기업에서는 프로 게임단을 관리할 실무진이 온 것인 데, 일성에서는 최재영이 직접 와준 것이라 너무나 뜻밖이었던 것이 다.

    HxT와 S.O.S의 당대 최고 인기 남녀 아이돌 그룹의 사전 공연을 시작으로, ID 엔터테인먼트 e스포 츠 사업단과 온게임넷이 준비한 화 려한 무대에서 두 선수가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ID 디지털미디 어센터가 들끓었다.

    -경기, 시작합니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전용준 해설 의 멘트로 2002년의 겨울 저녁이 뜨겁게 타올랐다.

    비슷한 시각.

    뜨겁게 타오르는 곳이 또 있으 니, 수많은 역사가 잠들어 있는 장 충체육관이었다.

    첨단 기술을 상징하는 곳이 ID 디지털미디어센터라면 장충 체육관 이란 곳은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한창 열리고 있는 행사는 통일국민당 대선 후보 경선이었 다.

    3주간 이어진 이인제 대 전재준 이라는 불꽃 튀는 대선 후보 경쟁 에 드디어 뚜껑이 열렸다.

    -통일국민당 대선 후보는…… 전 재준!

    전재준! 전재준!

    대통령 후보 경선 관리 위원장 김동길이 전재준을 호명하는 순간, 장충체육관에는 전재준의 이름이 연 호되었다.

    모두가 박수를 보내는 가운데,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딱 한 명 있 었다.

    휘몰아치는 굴욕감을 억누르기 위해 입을 앙다물고 있는 사람, 바 로 이인제였다. 불타오르는 눈빛은 당장에라도 사고를 칠 것처럼 번들 거렸다.

    "저 양반 사고 좀 치겠는걸?"

    유재원의 말이었다.

    모든 스케줄을 마친 유재원 부부 가 서울 ID 글로벌헤드쿼터빌딩의 최상층 펜트하우스로 돌아와서 편 안한 차림으로 뉴스를 보는 중에 나온 말이기도 했다.

    "나도! 나도 좀 위험해 보여."

    티파니도 곧장 동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뉴스 화면 에 나오는 영상은 통일국민당 경선 에서 최종 승리자를 발표하는 순간 을 찍은 화면이었다.

    승리한 전재준과 패배한 이인제 를 번갈아 보여주는데, 두 사람의 반응은 무척이나 극과 극이었다.

    이미 대통령이 된 것처럼 두 손 을 불끈 쥐며 만세를 하는 전재준 과, 그런 전재준을 보며 마지못해 박수를 치는 이인제 대표였다.

    그런데 이인제 대표의 얼굴이 가 관이었다. 입은 억지로 웃지만, 눈 빛만큼은 그렇지 않고 번들번들 거 리는 게 당장 사고를 칠 것 같았 다.

    정치인이라면 본인의 속마음을

    가리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이 인제 대표를 보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사법 시험 합격 후, 판사 를 하다가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 해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 의원을 여러 번 하고, 노동부 장관에 경기 도지사에 총리까지도 했던 이인제 가 표정 관리 방법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즉, 이처럼 노련한 정치인인 이 인제가 그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무엇에?

    바로 이번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2등을 했다는 것에 말이다.

    이인제 대표 본인의 로드맵에는 2002년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 경 선에서 승리하는 것밖에 없었다.

    당내 조직을 탄탄히 다져 놓았으 니, 대중적 인기가 떨어지더라도 승산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렇게 대통령 후보가 되기만 하 면 좋든 싫든 유재원이 전력으로 도와줄 것이니 여론 조사에서 좀 뒤처지는 건 문제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인제 대표의 큰 그림이 찢겨진 건 유재원의 방한 때부터였 다.

    갑자기 오픈 프라이머리를 선택 하도록 강제했고, 인터넷과 스마트 폰 투표라는 새로운 방식도 전격 도입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모습이었 다.

    전재준이 승리했고, 이인제 본인은 패배했다.

    이렇게 된 이상 더는 가만히 있 을 수가 없다.

    이인제 대표의 머릿속에는 무서 운 생각이 자라나고 있었고, 그 생 각들이 마음의 창이라는 눈을 통해 고스란히 비춰지고 있는 것이었다.

    월드컵을 기점으로 방송국에서는 HD방송 전환이 거의 끝나가는 시 점이었다.

    취재진의 카메라도 HD카메라로 대부분 바뀌었고, 덕분에 유재원 부부는 안방에서 이인제 대표의 사고칠 것 같은 눈빛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사고를 쳐 봐야 결국 피닉제 루 트를 타는 거겠지.'

    안타깝게도 이인제 대표의 결기 는 이미 끝장을 본 유재원에겐 별 타격이 없었다.

    -2002 스타 리그 윈터시즌 결승 전을 유재원 회장과 일성그룹 최재 영 부회장이 직접 관람을 했다는 소식입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도 정치 이야 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화제가 전환되어 유재원과 최재영이 나란히 앉 아 스타 리그를 관람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재미있었어?"

    "그럼!"

    티파니의 물음에 유재원은 목소 리를 높였다.

    오늘 스타 리그 결승전에 티파니 가 함께하지 않았던 건, 참 안타깝 게도 티파니가 스타크래프트에 재 미를 느끼지 못했던 탓이었다.

    RTS보다는 FPS가 티파니의 취향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AOS는 재미있게 하는 티파니였으니, 내년 에는 같이 이야기할 거리가 많아질 것이다.

    바로 판타지 유니버스-레전드 리 그의 출시가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 다.

    -유재원 회장은 우승자 임요환 선수에게 트로피를 건넸고, 내년 e 스포츠 리그의 프로 리그화에 대한 대대적인 변화도 설명했습니다.

    -국내 8개 기업이 프로 게임단 을 창단했고, 세계 최초의 e스포츠프로 리그도 출범한다는 소식입니 다. 또한, 신작 게임에 대한 소식도 전하면서 게이머들에게 기대감을 심어 주었습니다.

    최재영이 유재원 옆에 앉아 있었 고, 결승전 종료 후 행사에도 함께 했었는데, 뉴스에서 전해지는 소식 은 완전히 유재원 위주였다.

    과거 일성그룹의 존재감을 잘 아 는 유재원에겐 그 모습에 여러 가 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올라왔다.

    물론 여러 가지 감정 중에서는 뿌듯함이 제일 컸다.

    다음 날.

    -이인제 대표 전격 사임!

    -당분간 칩거하며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생각해 볼 것.

    "이야, 빠르네."

    서재로 와서 일을 시작한 유재원 은 오전 뉴스에서 속보로 전하는 소식에 혀를 내둘렀다.

    어제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 최 종 경선에서 패배의 고배를 마실 때, 눈빛이 사고칠 것 같다 생각했 는데, 여지 없었다.

    -전재준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 가 만류하기 위해 이인제 대표 자 택으로 이동했지만,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대통령 후보는 보통 당대표가 하 게 되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선거대책위원장이 되는 게 보통이 었다.

    이러한 선례에 따라 좋은 그림을 그리자면 이인제 대표가 전재준의 선거대책위원장이 되어 줘야 하는 데, 당대표에서 사임을 해 버렸으 니 전재준에겐 대선 후보로서 활동 하는 첫날부터 마가 낀 것이나 다 름이 없었다.

    그나마 전재준이 전과 달라진 건, 소식을 듣자마자 이인제 대표 의 집으로 달려간 것이었다.

    과거의 전재준이었다면, '감히 초 를 쳐?'라고 생각하면서 무시해 버 렸을 텐데, 사회생활을 통해 모진 풍파에 날카로움이 깎이면서 사람이 좀 된 모양이다.

    -민주당 경선, 노풍(盧風)이 분 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광주 경선 에서 노무현 승리!

    다음 소식으로 전해진 건 민주당 소식이었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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