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642화 (642/1,007)

31권 1화

미래전략실 프론트매니저.

티파니의 명함에 셰브롱의 갈매 기 로고와 함께 담긴 직책이었다.

조합된 단어들만 슥 봐도 20대 중반인 그녀가 갖기에는 턱없이 높 아 보이는 직책이다. 특히나 셰브 롱에서 프론트매니저라는 직책은 특별한 자리였다.

프론트매니저에게 주어지는 각종 혜택은 사장급 대우였으니 말이다.

실제로 셰브롱 본사에는 커다란 개인 사무실은 물론이고 비서에 전 용 차량도 나왔으니 사장급으로서의 대우가 확실했다.

당연하게도 내부에서는 이를 아 니꼽게 보는 이들이 많았다. 제이 콥 사망 이후 프레더릭 테일러 2세 에 의해 티파니의 T&U 리서치의 인수가 결정되고, 프론트매니저라는 직위가 정해졌을 때 반대의 목소리 는 컸다.

지금에 와서는 모두 다 지난 이 야기 였다.

텍사스 유전 개발에서부터 텍사 코 인수까지, 티파니의 능력에 대 해 의구심을 갖는 셰브롱 임원들은 없었다.

예외가 있다면 바로 이모들이었 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들썩하게 만드 는 IDDC 2002 행사가 진행 중일 무렵, 셰브롱으로 출근한 티파니를 그런 이모들이 반갑게 맞이했다.

"호호, 네 천재 남편도 못 하는 게 있구나."

"그러게. 큰마음 먹고 기부했을 텐데, 바로 비리라니. 어떡하면 좋 니."

얼굴은 무척이나 반가운 표정인 데, 인사말은 영 아니었다.

2002 월드컵에서 유재원이 했던 한국군 기부품 삥땅 사건에 대해 살살 언급하면서 티파니를 자극했 으니 말이다.

"이모님들, 그건 어디서 들으셨 어요?"

티파니는 살짝 날을 세우며 되물 었다.

그렇지만 속으론 '역시 그럼 그 렇지'라는 표정을 감추기 위해 애 를 써야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티파니 의 이모들이 한국군 기부 물품 사 건에 대해 아는 게 이상했다. 아직 언론 보도 하나 없는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즉, 이모들의 귀에 그 소식이 들 어간 건 애초부터 티파니의 의도였 다는 것이다.

어렵게 머릴 쓸 필요도 없었다.

티파니는 셰브롱에 굴러들어 온 돌이었다.

셰브롱은 한참 전부터 낙점된 후 계자였던 제이콥이 실무를 전담했었고, 제이콥을 중심으로 내부 세 력들이 뭉쳐 있었다.

그러다가 제이콥 사망 이후 이들 은 갈라지게 되었는데, 제법 많은 숫자가 티파니의 이모들에게 줄을 섰다.

객관적 능력으로는 티파니가 제 일 낫지만, 그래도 후계자 낙점 예 상에서는 제일 낮게 평가되고 있었 던 탓이다.

젊고 진취적이며, 모험심이 좀 남아 있는 임원들은 티파니에 대해 선입견 없이 판단할 수 있었지만, 이미 조직이 상당히 노화된 셰브롱 에는 그런 사람들이 부족했다. 그 들은 가장 무난한 선택을 했고, 그 게 티파니의 두 이모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셰브롱에는 두 이모 를 위한 눈과 귀가 생겼다.

티파니가 한 일은 두 이모를 따 르는 임원들에게 남편 유재원의 기 부가 생각대로 잘 굴러가지 않는다 며 조언을 구한 것뿐이었다.

"어머, 우리가 남이니. 안타까워 서 그러지. 게다가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고 말이야."

그러면 이렇게 이모들이 와서 먼 저 티파니의 속을 긁기 시작하는 게 뻔한 일이었다.

예전에도 몇 번 당해 보니 단번 에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메커니 즘이 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전에는 속만 긁었다면, 이번엔 좀 쓸 만하다는 것이다.

"도와주신다고요? 어떻게요?"

"이번 사안 같은 건 대충 넘어가 면 안 돼. 네 남편을 얼마나 우습 게 봤으면 기부 물품을 빼먹겠어.

그것도 사회단체가 아니라 군대에 서 말이야. 게다가 군대라는 게 얼 마나 폐쇄적인 집단이니. 그러니 최대한 이슈를 키워서 경각심을 일 으켜야지."

"그래. 우리 남편이 뉴욕 타임스 에 있으니 내가 부탁한다면 크게 다뤄 줄 거야."

티파니는 아주 오랜만에 두 이모 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 다.

다만 이모들의 의도는 뻔히 보였 다.

이모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언론 을 이용해 도와주는 척 기사를 내 면서, 실상은 남편 유재원의 실책 을 더더욱 크게 부각시킬 거라는 이야기다.

'네 천재 남편도 못 하는 게 있 다.'

가장 처음 나온 말이 본심 아니 겠는가.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 언론들은 남편의 통 큰 기부가 너무도 즉흥 적이었고, 그로 인해 여기저기 구 멍이 많이 있다는 걸 보도할 것이다. 특히 그 기부처가 한 나라의 군대라는 것을 집중 부각하면서 말 이다.

사실 영향력 있는 언론의 규모를 따지면 유재원이 월등했다.

티파니의 이모들은 프레더릭의 의중에 따라 모두 언론인 집안에 시집을 갔지만, 그건 신문사 사장 혹은 방송국 사장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원래 티파니의 어머니인 마리나 여사 역시 언론인 집안과 정략결혼 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사랑을 선택해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이었다.

뭐, 사랑을 선택한 것 치고 장인 어른의 핑크 가문도 보통은 아니었 지만 말이다.

반면 유재원이 가진 타임워너 넥 스트컴과 NBC 방송국은 뉴스코프 에 맞먹는 매머드급 규모의 미디어 제국이었다.

다만 티파니는 언론과 대중의 성 향을 꿰뚫어 보았기에 먼 길을 돌 아가게 된 것이다.

자극!

언론은 자극적인 걸 좋아한다.

유재원이 기부를 했다는 것보다 는 기부를 했는데, 의도와 다르게 어디론가 새고 있어 망했다는 이야 기에 훨씬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소식을 전하는 데엔 타임워너 넥스트컴이나 NBC는 적 합하지 않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미국이지 만, 미국이라도 사주의 눈치를 안 보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이 보유한 미디어 회사에 망신을 당하 는 남편의 체면도 있었다.

대신 영향력이 없는 회사라면 이 야기가 다르다. 더구나 이모들의 부추김까지 있으니 MSG가 팍팍 쳐진 기사가 쏟아질 것이다.

그러면 독자들도 자극을 받을 것 이고, 제법 큼직한 이슈로 피어날 것임은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 다.

그때, 타임워너 넥스트컴이나 NBC 가 객관적이고 깊게 들어가 보도를 시작한다!

심층 보도로 대중은 사건의 전모 를 파악할 것이고, 비난은 곧 한국군대로 쏟아지는 걸 유도하는 전략 이다.

물론 남편 유재원의 헛발질을 크 게 보도하는 물량을 제대로 된 보 도들이 압도해야 하는데, 타임워너 와 NBC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면 이러한 움직임이 과연 이 번 사안을 처리하는 데 효과적인가?

티파니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유재원을 따라 한국에서 머문 날 이 상당한 티파니였다. 이제는 한 국말을 듣고 말하는 건 물론이고 쓰기까지도 할 수 있었다.

티파니의 눈에 비친 한국은 외국 의 시선에 민감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미국이었다.

한국 뉴스를 볼 때마다 신기한 건 ID 그룹이 미국서 얼마나 잘나 가고 있는지 심심치 않게 나온다는 것이었다.

멋모르던 시절엔 남편 유재원에 게 혹시 돈을 주고 좋은 기사들이 나오도록 부탁했냐고 물어봤을 정 도다.

그만큼 미국의 뉴스에 민감한 나 라인데, 한국군의 비리가 커다랗게 이슈화되고 무지막지한 비난이 쏟 아진다면?

군은 물론 정치권, 어쩌면 한국 인 전체가 들끓어 오를 가능성도 매우 높다. 이렇게 되면 남편을 실 망시킨 자들에 대한 처벌도 훨씬 쉬워질 거라는 게 티파니의 그림이 었다.

"그건 그래요. 그럼 부탁할게요."

티파니는 상큼하게 웃으며 이모 들에게 부탁했다.

다음 날.

-유재원 회장의 즉흥 기부, 결과 적으로 대실패!

-한국군에 수십만 대의 가전제품 기부를 약속했던 유재원 회장, 말 뿐인 공약이었나?

-준비되지 않은 기부에 한국군 관리 미흡, 대규모 횡령 정황 포착!

-돈 쓰고도 욕먹는 기적! IDDC 2002 흥행에도 찬물!

뉴욕 타임스를 비롯해 미국의 대 형 일간지들에서 일제히 유재원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가 쏟아졌다.

"회장님! 당장 정정 보도를 요청 하겠습니다!"

매일 신문 스크랩을 하며 언론의 동향을 파악하는 게 일상 업무였던 비서실에서도 난리가 났다.

아침 출근을 하자마자 김대석은 뉴욕 타임스를 보며 크게 분개할 정도였다. 새벽 조간신문이 포문을 열었고, 곧이어 인터넷 신문들도 이를 받아쓰면서 유재원의 기부를 크게 다루었다.

IDDC 2002를 진행하며 혁신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고 있는 유 재원이었고, 대중은 이에 열광했다.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넥스트컴 을 비롯한 포털 사이트와 검색 사 이트에는 해당 아이템이 실시간 검 색 순위 상위권에 바로 입성할 정 도였다.

그만큼 유재원에게 모든 이슈가 집중된 상태였는데, 부정적인 보도 가 시작되자 클릭 수가 순식간에 폭증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재원은 그런 김대석에게 웃으 며 답했다.

"아니요. 아직은 때가 아니에요."

이미 티파니로부터 그녀가 무슨 일을 꾸몄는지 이야기를 다 들었다.

열이 올라서 당장 통일국민당이 나 대통령에게 전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했던 유재원에게는 정말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발상이었다.

확실히 한국은 외부의 시선에 민 감했다.

인정받고 싶어 하고, 칭찬받고 싶어 하는 사람 같다는 티파니의 말에 도 완전히 공감했다.

당연히 미국에서부터 한국군의 기부 물품 횡령 뉴스가 대대적으로 보도되면 한국에서는 그야말로 메 가톤급 태풍이 휘몰아칠 것이다.

그렇기에 미국에서 여론을 몰아 가는 게 중요했다.

지금 단계는 자극적인 기사에 여 론이 들불처럼 일어나길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 사건의 전모를 밝히 는 심화 보도는 며칠 있다가 시작 해도 늦지 않는다.

"세상에. 사모님이 움직이신 거 로군요."

김대석은 유재원의 비밀을 공유 할 수 있는 최측근이었다.

전에 최강욱 부회장이 보낸 조사 보고서를 왜 티파니에게도 보내라 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김대석 은 그제야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되 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한 사람이 미국의 이슈를 다 잡아먹고 있는 이 현실이 놀랍기만 했다.

동시에 그 사람을 본인이 보좌한다는 것에서 뿌듯함과 자부심도 일 어났다.

"자,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죠."

"네, 회장님!"

우리 할 일이란?

아직 진행 중인 IDDC 2002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IDDC 2002, 3일 차에는 뉴에그

4와 i웍스 2, i웍스 노트북, 라이브 팟 S2 등의 IT 분야 신제품들이 일 제히 공개되었다.

신형 CPU와 GPU가 탑재되어 최고의 성능을 발휘했고, 전통적으 로 우수한 디자인도 21세기 감각이 더해지며 한층 세련되어졌다.

경쟁사인 애플에서도 새로운 아 이맥과 파워맥 등등을 연초에 발표 했었다. 스티브 잡스와 조나단 아 이브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의 제품들은 시장에 서 대호평을 받았다.

그렇지만 오늘 발표된 ID 테크놀 로지의 신제품들은 애플보다 몇 발 자국은 앞에 있었다.

특히 i웍스 노트북에는 '블레이 드'라는 초경량 라인업이 추가되었 는데, 웬만한 상급 노트북의 성능 에 무게는 1.6kg밖에 되지 않았다.

10년만 더 지나면 lkg 이하로 내려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2, 3kg 대 노트북도 많은 지금에서 1.6kg이란 무게는 그야말로 깃털이 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0인치라는 작은 모니터 화면이 단점이지만, 노트북이라는 모바일 기기의 핵심은 바로 무게였다. 무 게라는 절대적 가치 앞에서는 큰 문제도 아니었다.

다만 뉴에그 시리즈가 몰고 온 디자인 혁신과 초고성능 CPU와 GPU의 대량 보급으로 인해 애플뿐 만이 아니라, 델과 HP 등등의 다 른 업체의 역량도 함께 업그레이드 되어서 PC 시장은 상향 평준화된 상태였다.

덕분에 과거와 같이 수백만 대의 PC를 팔아 치우는 일이 앞으로는 무척이나 드물 것이란 전망이었다.

그렇지만 가장 돈이 되는 하이엔 드 시장은 ID 테크놀로지의 컴퓨터 들이 꽉 잡고 있었다.

게다가 90년대 초부터 일관되게 이어온 디자인 철학으로 인해 ID 테크놀로지의 제품만 사용하는 적 극적인 팬층은 두껍게 쌓여 있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고 지지해 줄 든든한 버팀목이었기에 ID 테크놀 로지의 PC 제조업은 그 어떤 회사 보다 탄탄했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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