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권 23화
"이메일이 왔을 때, id톡이 왔을 때, 잠시 한눈을 팔면 알람을 깜빡 할 수 있지요. 2003에선 제때 문자 나 이메일을 확인하지 못한다는 스 트레스를 더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유재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슝~ 하는 효과음이 났다.
그러자 e메일함 아이콘에서 귀여 운 손이 나오더니 제 앞주머니를 뒤적뒤적하다가 편지를 꺼내 흔들 었다.
생각지도 못한 연출에 객석에서 유쾌한 웃음이 터졌다.
"안드로이드 2003에서는 아이콘 들이 더 이상 멈춰 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상황에 따라 각가지 움직임 을 보이고, 빠른 실행을 할 수 있 지요."
유재원이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 e메일함 아이콘 위에 올렸다.
그러자 편지를 팔랑팔랑 흔들던 손이 펼쳐지면서 이메일의 제목과 함께 몇 개의 선택 버튼이 나타났 다. 버튼에는 각각 읽기, 삭제, 스 팸신고 등의 글자가 박혀 있었다.
아이콘이 단순한 그림에서 벗어나 작은 프로그램처럼 작동하는 것 이다.
"이것이 라이브 아이콘입니다. 아 직 모든 아이콘에 라이브를 지원하 는 건 아니지만, 안드로이드의 중요 응용 프로그램에서는 라이브 아이콘 을 지원합니다. 파일 관리자, e메일 함, 웹브라우저, ID톡이나 톡톡 등 등. 설치 후 라이브 아이콘을 찾아 보는 재미는 확실히 보장합니다. 또 한, 라이브 아이콘 제작을 위한 툴 을 오늘 시간부로 배포할 것입니다."
다만 라이브 아이콘이 보기는 간단해도 직접 만드는 건 좀 어렵다.
아무래도 프로그래밍 실력이 있 는 사람들만이 가능했다. 아이콘과 프로그램 사이에 연동이 되어야 하 기에 그림 실력뿐만이 아니라 프로 그래밍 실력도 갖춰야 하는 탓이다.
그래도 유재원은 기능을 공개하 면 많은 이들이 참여할 거라고 보 았다.
안드로이드 ME만 해도 라이브 바탕화면과 연동되는 테마팩이 수 십만 개가 나왔다.
대부분 일반 유저들이 본인들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만들었고, 무 료로 공개한 것들이었다. 그만큼 퀄리티는 무척이나 낮은 것도 많았 지만, 돈 받고 팔아도 될 만한 것 들도 많았다.
라이브 아이콘 역시 자발적인 참 여자들이 많을 거라고 확신했다.
이어서 안드로이드 2003에 대한 신기술이 계속 공개되었다.
스마트폰과의 연동 강화가 뒤이 어 나왔다. USB 케이블로 꽂기만 하면 PC에서 스마트폰의 사진이나 음악 파일, 메시지와 주소록도 접속할 수 있고, 추가와 삭제도 한결 간편해졌다.
ME에서도 가능한 기능이었지만, 이번엔 유저 인터페이스에 보다 더 밀접하게 녹아들었다.
화룡점정은 글라이드X4였다.
원래는 3D 그래픽 라이브러리였 던 글라이드였지만 X4에 이르러 사운드, 조이 패드, 글라이드 컴퓨 터 등등, 게임과 연구 개발을 위한 통합 라이브러리로 확장되었다.
X4로 버전 업 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건 바로 픽셀 세이더 2.0이었다. 사실적인 빛, 그림자, 물의 표현이 가능해졌다. 텍스처의 질감 도 진일보했다. 이제는 천은 천으 로, 금속은 금속으로 확실히 구분 될 수 있을 정도다.
"간단한 예를 보여드리죠."
글라이드X4의 라이브러리 기능 과 차세대 CPU와 GPU의 성능을 100% 발휘하도록 만든 데모 프로 그램이 실행되었다.
그것은 낡은 비행기 창고에서 프 로펠러 경비행기가 나와 황무지 같 은 활주로를 달려 하늘을 날아오르는 장면이었다.
푸른 하늘은 놀라우리만큼 선명했 고, 햇빛이 닿아 반짝이는 비행기의 앞 유리는 너무도 사실적이었다.
그러다가 경비행기에 맞춰져 있 던 포커스가 구름을 뚫고 지나가면 서 자연스럽게 주변 환경으로 넘어 가자 객석의 감탄이 쏟아졌다.
구름이 걷히자 보이는 커다란 호 수와 산들, 그리고 도시의 모습은 이제까지 봐 왔던 게임 그래픽에서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이었다.
일부 성질 급한 관객 혹은 취재진 사이에서 무슨 게임이냐고 크게 물어보기도 했을 정도다.
실제 게임은 아니고, 이번 IDDC 2002를 위해 ID 소프트웨어에서 만든 짧은 데모였다.
차세대 게임 엔진으로 준비 중인 ID 테크엔진 4에 인텔의 최신 CPU 인 펜티엄4, 엔비디아사의 지포스 GPU 2개를 사용해 돌린 데모였기 에, 기존 컴퓨터로는 무척이나 버거 울 것이다.
하지만 객석의 반응을 보니 비행 기 시뮬레이터를 내도 좋을 것 같았다.
"당연히 보안 강화도 빼놓을 수 없지요. 사용자의 불편을 최소화하 면서 보안성은 극대화했습니다. 예 전부터 호평이었던 보안 영역에 대 해서도 보다 강화했습니다. 또한, 기본 보안 프로그램의 선택지를 크 게 늘렸습니다."
작년 사이버 테러로부터 큰 이슈 였던 보안도 특별히 언급했다.
기존에는 시만텍, ESET, 킴랩 이 렇게 셋에 불과했다. 게다가 지역 도 북미, 아시아, 유럽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다른 대륙의 선택지는 고를 수 없었다.
해당 업체가 맡은 지역을 전문적 으로 담당하면 괜찮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지만, 작년 사이버 테러 사태로 틀렸다는 게 드러났다.
킴랩은 중국 해커 집단이 뿌린 크랙에 숨겨진 악성코드를 감지해 내지 못했고, 시만텍 역시 마찬가 지였다.
이에 대한 유재원의 대책은 안드 로이드 운영 체제의 보안 영역에 새로운 보안업체를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비트디펜더, 맥아피, 바이 로봇 등등. 총 8곳에 달한다.
이러한 정책 변경으로 좋아지는 건, 업체간 경쟁으로 보안 수준이 높아지는 것도 있었지만, 해커들이 공략해야 할 대상이 하나에서 8개로 대폭 늘어났기에 과거처럼 대규모 좀비 PC가 양산되진 않을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사이버 테러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킴랩과 시만 텍이 제외되었다는 것이다. 퇴출이 나 마찬가지였다.
일반 사용자가 리테일 버전을 구매해 설치하는 것까진 막지 않겠지 만, 번들로 제공되는 것과 사용자 가 일일이 구매해야 하는 건 큰 차 이였다.
날벼락을 맞은 킴랩은 뒤늦게 안 드로이드사나 유재원을 찾아오려 했지만, 누구도 만나 주지 않았다.
사이버 테러 이후 오늘까지 거의 10개월이 넘는 여유 시간이 있었지 만, 별다른 혁신을 보여주지 못했 으니 퇴출은 당연했다.
반면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유재 원의 말대로 늘어난 선택지 말고는 딱히 달라진 걸 체험하진 못할 것 이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보안 체계 에 대한 대대적인 업그레이드가 있 었기에 해킹으로부터 한결 안전해 졌다.
"마지막으로 다들 가장 궁금해하 실 가격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2003 버전은 ME와 같은 가 격 정책을 이어 나가도록 할 생각 입니다. 또한, ME 정품 사용자들 을 위한 업그레이드 정책도 전과 같이 시행하겠습니다."
광고가 있는 게이밍 에디션은 무료!
광고가 없는 게이밍 에디션은 1만 원워크스테이션용은 10만 원대, 기 업용 엔터프라이즈 버전은 30만 원 대의 가격을 유지하겠다는 말로 유 재원의 발표는 끝났다.
당연하게도 메인 스테이지에 가 득 모여 있던 사람들로부터 박수가 절로 나왔다.
해가 지날수록 뭐든 가격이 오르 기만 하고 있는데, 안드로이드 운 영 체제의 가격 동결은 주머니가 가벼운 이들에겐 그야말로 희소식 이었다.
더욱이 ME 사용자를 위한 업그 레이드는 2003으로의 이전을 망설 이던 고급 사용자들에게 솔깃한 소 리였다.
무료인 게이밍 에디션과 달리 제 법 가격이 있는 워크스테이션 에디 션이나 엔터프라이즈 에디션은 새 제품을 구매하는 게 망설여지는데, 업그레이드라고 할인을 해 주면 부 담이 적어지니 말이다.
안드로이드 2003은 성공적이었다.
정식 버전 발매 후, 컴퓨터 업체 들 역시 본격적인 신제품을 내놓으 면서 경쟁을 시작했다.
인텔과 AMD 역시 120나노 CPU 에 최적화된 운영 체제의 등장에 맞 춰 본격적인 신제품 마케팅을 시작 했다.
안드로이드 2003을 성공적으로 발 표한 유재원은 이 기세를 이어 차세 대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발표로 이 어 가려고 했다.
그렇지만 상기된 유재원의 기분 은 다음 날 한국에서 날아온 다이 렉트 톡톡 하나에 싸늘히 식어 버렸 다.
-재원 님? 클라세 가전제품에 국 방부 에디션도 있나요?
의문의 문장이었다. 처음엔 이해 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첨부된 이 미지를 보니 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스크린 샷에 담겨 있는 건 클라 세 로고와 나란히 국방부 마크도 찍혀 있는 최신형 세탁기가 중고품 나라에 매물로 올라와 있는 내용이 었기 때문이다.
한국 군대에 대한 이미지는 좋았 다.
전생에 엉망이었던 자신이 정신 을 차린 건 군대에 가서였으니 말 이다. 더구나 정상인이라고는 볼 수 없었던 자신이 한 사람의 몫을 온전히 하게 된 것도 군대에서였다.
군 생활 초반에는 어리바리하며 한심한 모습의 극치를 찍고 있었는데, 그런 자신을 이끌어 줬던 것은 선임과 동료들이었다.
물론 선임들이 처음부터 이해해 줬던 건 아니었다. 폐급이 왔다고 난리였다. 그래도 자대 생활을 하 다 보니 서로 정이 들었고 이해해 주었다.
게다가 예전 군대에서라면 제 몫 을 못 한다고, 기분이 나쁘다고 구 타가 이어졌을 텐데, 다행스럽게도 맞아 본 적은 없었다.
유재원이 회귀 전 군대에 갔을 때는 마침 선진병영이다 뭐다 해서 한창 개혁 작업이 일어나던 중이었 고, 결정적으로 유재원이 배치를 받은 부대의 당시 선임들이 좋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아, 김 병장이나 정 병장, 나 상 병은 지금 대학교 다니고 있으려 나'?"
문뜩 함께 지낸 회귀 전 선임들 이 떠올랐다.
그들도 나름 유재원을 살려 준 은인이라 할 수 있었다. 레밍턴에 게 그랬던 것처럼 김 병장과 정 병 장, 나 상병에게도 회귀 전 받은 배려를 갚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그 시점은 그들이 군대를 전역하고 나서였기에, 아직은 연락 을 하진 않았다.
"근데, 이 간부 놈들은……
유재원은 중고품 나라 스크린 샷 한 장을 보고 간부가 저지른 일이 라 확신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병들은 부대에서 무단으로 한 발짝이라도 나서면 탈영이다.
반면 간부들은 출퇴근도 하고,
퇴근 후에 다시 부대로 돌아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더욱이 회귀 전에 군 생활을 하 면서 보았던 부조리는 병사들 사이 에서 일어나는 것도 있었지만, 간 부들 사이에, 간부들이 병사들에게 저지르는 게 훨씬 크고 무거웠다.
보나마나 이 중고품 나라에 클라 세 세탁기를 올린 것도 간부가 빼 돌려서 팔아 치운 게 틀림없다.
물론 군부대 간부의 짓이라고 단 정하긴 이르다. ID 일렉트로닉스의 직원이 빼돌렸다는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확률로 따진다면 대략 백만분의 1도 되지 않겠지만.
그만큼 유재원이 간부의 짓이라 확신하는 건 판매자가 등록한 주소 지 때문이다.
세탁기 공장은 전북 정읍에 있는 데, 판매자가 등록한 주소는 경기 도 철원이었다. 더구나 현재 시점 에서 모든 군부대로 보급을 완료하 진 못했다. 하지만 철원, 인제, 양 구 같은 최전방은 보급을 먼저 해 준 상태였다.
"생각해 보니 더 열 받네."
다시금 열이 바싹 오르는 유재원 이다.
한국은 징병제였다.
그러니까 군인들의 처우는 모두 국가에서 담당해 줘야 하는 게 상 식이다. 문제는 돈이 없다고 TV, 세탁기 같은 필수 가전이 전 부대 에 보급되지 않았기에 유재원이 나 섰던 것이다.
그럼 진짜 돈이 없나?
유재원이 ID 그룹을 일군 후부터 지금까지 한국에 낸 세금의 총액을 따져 보면 수십조 원이다.
이번에 ID 테크놀로지 상장에 대 한 세금까지 포함한다면 100조 원 을 넘길 수도 있었다.
국가 예산 규모를 회귀 전과 비 교하면 숫자 자체가 차원이 달라진 다.
지금의 한국이 IMF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탈출하고 있었던 것 도 유재원이 퍼부은 세금 덕이었다.
이는 곧 군대에도 영향을 주었 다. 국방부 예산으로 흘러간 유재 원의 세금을 아무리 적게 계산해도 조 단위는 훌쩍 넘는다.
그렇게 해 주고 있는데, 뭐가 부 족해서 사병들에게 간 세탁기를 가 져다가 판단 말인가.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티파니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유재원이 이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이었던 것이기에, 티파니의 눈 도 놀란 듯 동그래졌다.
"아, 그게 말이야."
화가 잔뜩 오른 유재원은 티파니 에게 스크린 샷을 보여주며, 자신 이 짐작하고 있는 것들을 말했다.
"세상에! 진짜?"
티파니도 유재원과 마찬가지로 깜짝 놀랐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군대 간부 가 그럴 수 있어?"
오히려 유재원보다 더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에서의 군인 에 대한 존경은 상당했다.
사병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가전 제품 수만 대를 뿌린 유재원에게 군소리는커녕 높게 평가하는 이유 가 여기에 있었다.
그렇기에 군인이 범죄를 저지르 면 더욱 크게 실망한다. 사병들을 위해 기부한 세탁기를 빼돌려 중고 품 나라에 파는 간부라는 건 티파 니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 선 것이었다.
유재원은 한국 시간을 확인했다.
"당장 최강욱 부회장님께 알아보 라고 해야겠어."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