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권 13화
"보르도? 그 와인으로 유명한 프 랑스 보르도 말씀이십니까?"
가전 부문 사장도 유재원의 제안 을 바로 이해했다.
"네, 방금 보셔서 알겠지만, TV 디자인의 모티브가 와인 잔이거든 요. 16 : 9 비율이라 위아래로 꽉 눌 리긴 했지만."
유재원은 그러면서 i웍스 노트북 을 펼쳐 거실에 놓인 TV의 스케치 를 띄웠다.
ID 하이테크 연구소에 프로토타 입 제작 의뢰를 할 때 첨부했던 스케치였다.
"보르도 TV, 보르도 TV! 음, 어 색하긴 해도 입에 착 붙습니다!"
"클라세에서도 엣지가 느껴집니 다."
수평적 기업 문화를 지향하는 ID 그룹이지만, 유재원의 의견에 함부 로 반대하기는 어려웠다.
특히 한국의 경우, 기존 기업들 을 합병한 게 많은 탓에 그러한 경 향은 더욱 심했다.
그렇지만 이번 지시는 가전 부문사장이나 임원들이 듣기에도 기존 의 브랜드 이름들과는 확실히 달랐 다.
당연히 긍정적으로 말이다.
회귀 전 2000년대 초반을 휩쓸 었던 이름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바로 일성전자의 새로운 TV라인업 이 바로 보르도 TV 였다.
그런데 일성전자 전체가 ID 일렉 트로닉스와 합병되었으니 그 이름 을 가져다 쓰는 것에도 문제없다는 판단이었다.
클라세 역시 마찬가지다.
대호 그룹이 백색 가전 라인업을 정리하면서 만든 브랜드가 클라세 였다. 일성과 마찬가지로 대호전자 역시 모든 자산이 ID 일렉트로닉스 로 인수된 상태다.
"좋아요. 그러면 한국으로 가기 전에 프랑스 보르도 주 의회에 가 셔서 배타적 네이밍 허가를 받으세 요."
ID 일렉트로닉스 가전 부문의 난 잡한 모델 체계를 한 방에 정리한 유재원의 마지막 주문이었다.
"예? 보르도 의회에요?"
도의적인 문제였다. 농산품이라 면 원산지 문제가 걸리니 큰일이겠 지만, 공산품의 경우에는 그냥 가 져다 붙여도 문제는 없다.
하지만 뒷말은 무성하게 나올 것 이고, 유럽 판매도 고려해 보면 보 르도 주 의회로부터 사용권을 사 오는 것으로 확실히 매듭지을 수 있다.
"아참, 내년은 역사적인 남북 월 드컵의 해이니까 이와 연계된 이벤 트를 크게 열어서 새로운 브랜드를 단번에 세계인의 머릿속에 각인시킬 수 있도록 준비하세요."
"예, 회장님!"
유재원의 마지막 당부에 가전 부 문 사장과 임원들이 힘차게 대답했 다. 월드컵을 활용할 방안은 한참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기에, 목소리 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12월 30일.
충격적인 사건들로 가득했던
2001년도 이제 하루하고 몇 시간밖 에 남지 않았다.
유재원은 평소처럼 서재에 앉아 하루를 마무리 중이었다.
컴퓨터에 띄워진 프로그램은 비 밀 일기장. 키보드 워리어 안에 포 함된 작은 기능이었지만,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 기능을 하기엔 지금 도 문제없었다.
실행도 빠르고, 보안적으로도 문 제없었기에, 아무리 바빠도 최소 한 줄은 남기고 종료할 만큼 꼬박 꼬박 사용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다만 2001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오늘 컴퓨터에 남기는 기록 은 하루의 일기가 아닌 한 해의 정 리였다.
원칙적으로는 내일 31일에 하는 게 좋겠지만, 31일은 새해맞이 행 사로 바쁠 것이기에 하루 일찍 1년 을 정리하는 것이다. 공적으로 하 는 업무가 아니었기에 준비물이나 거창한 행사도 없었다.
구형 코드였기에 이젠 최신 컴퓨 터에서 네이티브 방식으로는 실행 할 수 없는 키보드 워리어였다.
덕분에 일기를 쓸 때마다 가상 머신을 실행하고 그 안에서 프로그 램을 실행해야 했다. 컴퓨터 성능 이 좋아서 가상 머신에서 구동된다 고 성능 저하는 전혀 없었다.
곧이어 익숙한 키보드 워리어의 타이틀 화면이 나왔고, 유재원은 본 게임 대신 일기 항목을 선택해 엔터키를 눌렀다.
이제는 준비된 원고도 없이 유재 원 본인의 생각과 감정 등등 소회 를 키보드 위에 풀어내는 시간이었 다.
"역시 911 테러가 제일 먼저지."
전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뒤흔들 어 버린 911 테러의 충격이 워낙 거대해서 다른 거대한 사건들을 묻 어 버릴 정도였다.
아프가니스탄의 멸절 작전은 12 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작전 성공을 발표하며 마무리되었다. 크 리스마스에 맞춘다고 다 끝내지도 않고 종료한 것이 아니라 반대였다.
원래 작전은 그보다 며칠 일찍 끝났지만, 미국 시민들에게 크리스 마스 선물을 준다고 좀 더 시간을 끌었다.
국내에 잠입했던 알 카에다 조직 원들의 체포도 순조로웠다.
자그마한 시골에서는 아랍인이라 눈에 잘 띄었고, 대도시에서는 CCTV와 연동된 이미지 분석 모듈 을 통해 빠르게 식별할 수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을 깔끔하게 정리한 미국은 12월 초부터는 중국에 집중 하고 있었다.
"역시 눈 돌아간 미국은 무섭 지."
국제 여론 공조로 압박을 넣어도 중국이 눈도 깜짝하지 않자, 미국 은 실질 조치를 시작했다.
-중국산 수입 관세 10% 일괄 부여-400억 달러 관세 폭탄!
현재 중국의 대미 수출 물량은 무려 4천억 달러다.
이러한 수출 물량의 전체에 일괄 적으로 10%의 추가 관세를 더하니 400억 달러 관세 폭탄이 만들어진 것이다.
더욱 경악스러운 건 관세 폭탄이 12월 25일에 이뤄진 조치였다는 점 이다.
실질 조치는 없을 거라고 장담했 던 중국 당국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관세 폭탄이 떨어지자 난리가 났다.
10%는 단지 시작이었다.
중국의 대응에 따라 20%가 될 수도 있고, 이보다 더 높아질 수도 있었다.
중국산 제품에 관세가 물리면 최 종 소비자가 부담할 리테일 가격도 상승하고, 그에 따라 물가 상승 압력도 크게 가중되지만, 미국인들은 중국에도 강력한 보복을 원하고 있 었다.
이게 다가 아니다.
"새해 선물도 있지."
그것은 청나라 대의 골동품이었 다.
중국의 경제 발전과 함께 크리스 티나 소더비에서는 중국의 골동품 가치가 크게 상승했다.
중국 정부는 해외로 빼돌려진 유 물을 환수해 국가가 부강해졌다는 걸 중국인들에게 어필했고, 실제로 도 효과적이었다.
미국 정부는 관세 인상 조치에도 중국이 반응이 없다면, 최근에 새 롭게 발굴된 청나라 시대의 골동품 을 중국에 보내줄 계획이었다.
그것은 바로 청나라 말기 호북과 광둥을 연결하는 철도 건설을 위해 발행한 국가 채권이었다.
당시 발행 규모는 대략 600만 파운드였다.
지금도 600만 파운드면 상당히 큰돈이지만, 1911년 발행 당시에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그런데 채권에는 이자가 붙기 마 련이고, 이자는 당연히 복리였다. 복리로 90년이 묶인 채권의 현재 가치는 그야말로 핵폭탄처럼 터지 며 천문학적인 숫자를 만들어낸다.
1조 달러다.
아무리 중국이라도 조상님들이 1 조 달러라는 막대한 빚을 지고 있 었다는 건 꿈에도 모르고 있을 것 이다.
그나마 지금 미국이 확보한 채권 은 전체의 1/5인 120만 파운드였
"현재 가치로는 대충 2천억 달러 쯤 되려나?"
미국의 계획을 내부 관계자처럼 잘 알고 있는 유재원이다.
그도 그럴 것이 HSBC의 비밀 금고에서 썩어 가던 청나라 채권에 다시금 햇빛을 닿게 해 준 사람이 바로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역사에서는 20년 후쯤에 터 질 아이템이었지만, 당시엔 그다지 좋은 결과를 만들진 못했다.
중국 역시 대비하고 있었던 탓이 다. 미국 측이 좀더 유능했더라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텐데, 그때의 미국 대통령이 그 유명한 트럼프였 다.
차라리 누구도 대비하지 못한 지 금 꺼내는 게 효과적이라 생각한 유재원이었다.
때마침 명예시민 의회 투표가 부 결된 날, 앨 고어 대통령은 직접 전화를 걸어 위로의 말을 전했고, 그때 청나라 골동품 채권에 대한 힌트를 준 것이다.
회귀 전과 완전히 다른 지금, 중 국은 과연 어떻게 대응할지 유재원 은 너무도 궁금했다.
2002년 새해가 되었다.
12월 31일, 말도 많고 탈도 많았 던 20()1년을 보내는 새해맞이 행사 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이어 졌다.
911 테러의 후폭풍이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던 미국 역시 마찬가 지였다.
세계 수많은 나라의 새해맞이 행 사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 뉴욕 타임스퀘어의 볼드랍 행사인데, 2001년 볼드랍 행사는 역대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
예전 볼드랍 행사와 달라진 건 규모뿐만이 아니었다.
정식으로 무대가 생겼고, 올해 빌보드 차트를 석권한 가수들이 여 럿 올라서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 여주었다.
데스니티 차일드부터 자넷 잭슨, 어셔, 니켈백 등등. 이름만 들어도 와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가수 들이 무대에 올랐다.
호화로운 출연진들만큼 무대를 구성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폭등 했고, 타임스퀘어를 찾은 이들에게 나눠 주는 모자 등등의 기념품을 마련하는 것도 큰 부담이었다.
그렇지만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하 게 할 수 있었던 건 강력한 스폰서 가 생겼기 때문이다.
ID 그룹이었다.
무대에는 ID 그룹의 로고와 마스 코트가 큼지막하게 들어가 있었고, 타임스퀘어를 찾은 이들에게 나눠 준 방한용 모자에도 ID 로고가 들 어가 있었다.
타임스퀘어 행사는 새해맞이 풍 경을 전하는 뉴스의 단골 소재였기 에 브랜드 가치 상승을 따진다면 후원 금액보다 더 큰 이득을 얻었 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유재원이나 티파니가 직접 타임스퀘어 무대에 오르진 않 았다.
연말에 많은 일이 있었기에, 이 번에는 집에서 조용하고 편안한 분 위기 속에서 맞이하기로 했기 때문 이다.
2002년이 되었지만, 유재원의 삶 은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시무식을 위해 ID 테크놀로지의 본사로 출근했고, 대강당에서 간단 한 행사와 함께 2002년의 비전도 발표했다.
올해의 비전은 바로 고해상도 (High Definition) 였다.
HD 모니터, HD TV, HD 캠코 더, HD 휴대폰, HD 사운드 등등.
HD 디스플레이 장치와 고음질 장치의 대대적인 보급이 있을 해라 고 확실히 못을 박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치를 지원한 콘 텐츠 역시 빠르게 늘어날 것임을 예측했다.
제대로 된 HD 모니터로, 잘 만
들어진 HD 콘텐츠를 한 번만 보는 것으로 눈높이는 확 올라가고, 그 렇게 올라간 눈높이를 다시 낮추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정적으로 기술적 숙성이나 시 장 환경 등등은 HD 기기의 보급에 최적의 상태였다.
역시나 유재원의 비전 발표는 IT 관련 업계에서 대대적으로 보급되 었다.
인공 지능처럼 너무 빠르다 싶은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구체적인 제품이 빠르게 등장하면서 시장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반 매스컴에서 2002 년은 HD 시대라는 유재원의 말보 다 더 비중 있게 다뤄지는 뉴스는 따로 있었다.
-중국발 사이버 전쟁, 경제 전쟁 으로 비화하나?
-앨 고어 행정부, 대중국 관세 일괄 인상, 미국 경제에 큰 부담 없다.
-청나라 600만 파운드 채권, 뜨 거운 감자 부상!
유재원이 예측한 미국과 중국의 충돌이 경제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이번엔 유야무야되지 말아야 할 텐데."
시무식 행사를 마치고 회장실로 돌아온 유재원은 컴퓨터를 보며 생 각이 복잡해졌다.
큼직한 트루 HD 시네마디스플레이 모니터에 띄워진 항목은 넥스트 컴 뉴스 페이지의 정치 섹션이었다.
기사를 작성한 워싱턴 포스트의 경제 전문 기자는 사이버 전쟁으로 부터 비화된 경제 전쟁에 대한 우 려를 크게 표하고 있었다.
기사에 담긴 기자의 의도는 사이 버 전쟁이 경제 전쟁으로 비화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유재원 은 반대로 유야무야되지 말아야 한 다고 하니, 기자의 의도는 실패했 다.
그렇지만 중국이 이대로 동아시아에서 아무런 견제 없이 성장하게 되면 일어날 일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가 유재원이었다.
기자는 그저 단기적 경제 지표가 하락하는 걸 걱정하는 것이지만, 눈앞의 이익만 좇다가는 나중에 엄 청나게 고생할 게 뻔히 보였으니 말이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