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권 22화
"음!"
유재원의 냉정한 지적에 별을 달 고 있는 장성들은 발끈했지만, 앨 고어 대통령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강경파들도 본인들의 주 장을 거듭 내뱉을 수는 없었다. 여 기에 유재원이 쐐기를 박았다.
"911 테러가 성공함으로써 오사 마 빈 라덴은 자신감이 넘치는 수 준을 넘어서 오만한 단계에 이르렀 습니다. 그 증거가 아이폰드에 남은 디지털 지문들이고, 인터넷 스트리밍을 통한 성명 발표입니다. 인터 넷의 근본이 알파넷에 있다는 것, 2.5G 휴대폰은 퀄컴 기술이었다는 건 까맣게 잊고 있었죠."
그러면서 유재원은 아프카니스탄 지도를 띄웠고, 오사마 빈 라덴의 가장 최신의 행적이 나온 지점을 지목했다.
상식적으로는 아프카니스탄 북부 의 험준한 산악 지형 속에 있을 것 같았지만, 그런 인식과는 반대로 수도 카불의 호화 주택가였다.
21세기 중반 풀린 극비 자료와도 일치하는 데이터였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오사마 빈 라덴은 911 테러 이후 10년 동안 카불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2011년쯤에는 파키스탄 으로 넘어갔다고 되어 있었으니 말 이다.
"생포 작전을 결정하신다면, 이 를 지원할 최첨단의 시스템도 있습 니다."
그러면서 유재원은 프레젠테이션 을 새로운 파일로 전환했다.
ID 하이테크가 10년을 넘도록 매진하고 있던 바로 그 프로젝트, 드론이 었다.
소형 쿼드콥터부터 터보제트 엔 진이 달린 대형 드론까지. 입체적 인 생포 작전을 지원할 드론들은 이미 이라크에서 만반의 준비가 끝 난 상태였다.
"너무 나댔나?"
백악관에서 발표를 복기하던 유 재원은 무리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백악관의 군사 참모들, 펜타곤의 장군님들이 유재원의 브리핑을 군 소리 없이 경청해 주었다는 점에서 네오콘이 장악했던 부시 시절보다 는 훨씬 나은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이들을 설득하지 못한다 면 과거와 똑같은 흐름으로 이어쩔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덕분에 아이폰드의 레인보우 테이 블도 만들었고, 드론도 풀었고, 오 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에 대한 정보도 대거 풀게 되었다.
"주말 추모식 직전에 결론이 나 오겠지."
유재원이 창고 대개방 세일을 한 것처럼 크게 질렀음에도, 앨 고어 대통령은 결정을 뒤로 미뤘다.
워낙 큰일이었으니 단번에 가타 부타 말을 하진 못할 거라고 짐작 은 하고 있어서 실망스럽진 않았다.
결국, 앨 고어 대통령이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는 추모식에서 밝혀 질 것이다.
물론 유재원의 경우 앨 고어와 돈독한 사이라는 장점이 있으니 좀더 일찍 연락이 오겠지만, 크게 차 이나진 않을 것 같다.
본인이 앨 고어라고 생각해 보면 누구 손을 들어줄지 선택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는 유재원도 마찬가지였다.
"도착하면 깨워 주세요."
육체적으로는 힘이 넘치는 유재 원이었다. 그렇지만 어마어마한 일 을 연달아 처리한 탓에 정신적인 피로도는 상당해서, 쉬지 않으면 못 버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 회장님! 걱정 마시고 푹 쉬 시길!"
김대석의 말에 유재원은 안심하 고 눈을 감았다.
똑똑!
귓가에서 들린 가벼운 노크 소리 에 눈을 떴다.
"뭐야, 벌써 도착했어요?"
유재원의 목소리에는 황당함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을 감 은 지 1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도착이라니.
"아, 네네."
덕분에 김대석 비서실장이 살짝 버벅거릴 정도였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보니 예상과는 좀 달랐다. 제이콥 의 장례식은 교회로 예정되어 있었 는데, 지금은 호텔 입구였으니 말 이다.
"회장님이 주무실 때 사모님께연락이 왔었습니다."
"티 파니가요?"
티파니의 연락은 의외였다. 더욱 이 티파니가 전한 말도 의외였다. 바로 장례식장으로 오지 말고 호텔 에서 좀 쉬다가 오후 2시쯤에 와 달라는 것이었다. 또한, 호텔방에 장례식용 복장을 준비해 놓았으니 꼭 입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흐음."
티파니가 전한 말은 너무 의외이 긴 했는데, 짐작이 가는 건 있었다.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당연히 좋 지 않겠지만, 제이콥의 장례식은 더욱 심한 게 분명했다. 남편인 유 재원에게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 는 게 망설일 정도로 말이다.
짐작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유 재원은 티파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몇 번 울려도 응답이 없 어서 ID톡을 날리려 했는데, 티파 니로부터 먼저 톡이 왔다.
메시지를 확인한 유재원은 고개 를 끄덕였다.
티파니가 보낸 메시지에는 움직이는 이모티콘 딱 하나가 들어 있 었다. ID톡의 마스코트 캐릭터들이 대난투를 벌이고 있는 이모티콘이 었다.
젊다는 건 좋은 것이다.
평소엔 이걸 잘 못 느끼고 있었 지만, 지금과 같이 엄청난 일들을 몰아서 할 때면 절로 느끼게 된다. 호텔에서 2시간 정도 눈을 붙이는 것만으로 유재원은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말끔히 풀렸다.
김대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무 수행 중이라면 유재원의 그 림자처럼 언제나 함께하는 김대석 역시 지난 24시간을 함께 보냈다. 유재원보다는 쉴 수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역시나 긴장을 놓치지 않고 있어야 했기에 피로는 많이 쌓인 상태였다.
이동 중 틈틈이 쉴 시간을 찾아 서 쉬긴 했는데, 피로가 누적되어 조금 피곤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두 시간의 낮잠은 꿀맛과 같 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푹 쉰 유재원은 간단한 샤워 후에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었 다.
장례식장 코드에 맞춘 검은색 클 래식 정장이었다.
"검은색이지만 잘 어울리십니다."
김대석이 유재원의 코디를 봐주 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음, 레귤러 핏이네."
반면 유재원은 거울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유재원은 보통 본인의 체형에 맞 는 맞춤 정장을 입는다. 그렇다고 통장 잔고가 넘쳐나는 걸 과시한다 고 희귀한 원단을 쓰기 위해 맞춤 정장을 하는 게 아니라, 이 시대의 양복 스타일이 펑퍼짐한 스타일이 었던 탓이다.
지금 입은 양복도 그런 스타일이 었다.
21세기 중반의 심미안을 가진 유 재원에겐 너무 옛날 느낌이어서 지 금껏 한 번도 입지 않았는데, 입고 나서 보니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 다.
곧이어 유재원은 넥타이, 행거칩, 와이셔츠 커프스 같은 아이템도 장 착했다. 오랜만에 완전 무장을 하 는 것이었다.
심지어 시계도 찼다.
유재원은 시계를 선택한다면 장 인이 만든 아날로그 시계보다는 지 구상에서 가장 정확한 휴대용 시계 라 할 수 있는 휴대폰이면 충분한 사람이였다. CDMA라는 기술은 시 분할에 핵심이 있고, 이를 위해 통신용 위성을 통해 정확한 시간이 맞춰진다.
덕분에 유재원은 매년 직원들을 위해 고급 오토매틱 시계를 많이 구매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사용하 지 않았는데, 이번엔 예외였다.
"출발하죠."
모든 준비를 마친 유재원은 호텔 을 나섰다.
알고 봤더니 제이콥의 장례식과 는 불과 몇 블록 떨어진 곳이라 금 세 도착했다.
≪ O "
=
거대한 성당에 들어섰을 때, 유 재원은 처음 느껴 보는 공기를 맡 을 수 있었다.
거대한 성당 안에는 미국식 장례 를 위한 인테리어로 화려하게 꾸며 진 상태였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 강당 앞에 는 제이콥의 시신이 안치된 관이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고인이 활 짝 웃고 있는 커다란 사진과, 그를 기억할 물품들이 놓여 있었다.
평소에 예배를 드리러 온 신도들 이 앉은 자리에는 이미 많은 사람 들이 자리해 추모를 하고 있었다.
티파니가 2시간 전쯤 보낸 이모 티콘은 ID톡의 대표 캐릭터들이 먼 지를 뿜뿜 뿜어대며 대난투를 벌이 고 있던 것인데, 지금은 완전 딴판 이었다.
대신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라고 말이다.
신선한 느낌이었다. 어디를 가서 도 VIP 대접을 받았던 게 유재원이 었으니 말이다. 오늘 아침만 해도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에서 앨 고 어 대통령과 참모들, 펜타곤의 장 성들 앞에서 미국의 미래를 결정하 는 데 결정적 분기점이 될 브리핑 까지 하고 왔었다.
그들은 누구 하나 유재원을 무시 하는 법이 없었고, 유재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반면 이곳 초대형 교회 안에서는 유재원을 위해 따로 나와 의전을 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이들이 새로 들어온 유 재원을 보고 흥미로운 시선을 보낸 다거나, 뭔가 날카로운 눈빛을 보 냈다. 반면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인사를 걸어 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대접 받지 못해 아쉽다는 건 아 니었다.
애초에 유재원은 의전에 목매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여튼, 티파니가 이모티콘으로 전한 난장판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 연장선상에 있는 건 분명했다.
그때, 맨 앞줄에 앉아 있던 티파 니가 고개를 돌렸고, 유재원과 눈 이 마주쳤다.
티파니의 눈빛은 유재원도 처음 보는 것으로 뭔가 침울해 보였다. 그러다가 유재원의 얼굴을 확인하 고서는 확 밝아졌다.
티파니는 바로 옆자리의 프레더 릭 테일러 2세에게 귓속말을 하고 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재원에게 다 가왔다.
이에 맨 앞줄에 있던 이들의 시 선도 뒤로 향했고, 그들 역시 유재 원이 왔다는 걸 인지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 그리고 티파 니의 이모들과 남편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이었다. 프레더릭은 고개만 끄덕였을 뿐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 다.
유재원을 본 이들의 반응도 가지 각색이었다.
장인과 장모님은 고개를 끄덕이 며 반가워했지만, 이모들은 서로 쑥덕이기 바빴다. 티파니 이모들의 남편들은 결혼식 이후로 처음 보는 데, 역시나 호의적인 시선은 아니 었다.
"자기 자리로 가자."
할 말 많아 보이는 티파니는 유 재원의 손을 끌고 앞으로 인도했다. 그렇게 안내된 자리는 프레더릭의 바로 오른편이었다.
자리에 앉기 전에 유재원은 먼저 프레더릭에게 위로의 말을 올렸다. 며칠 사이에 10년은 더 늙어 버린 프레더릭이었다.
원래 나이가 좀 있는 프레더릭이었고, 늦게 얻은 막내아들을 불의 의 사고로 잃었다. 그 슬픔의 크기 는 유재원도 쉽게 짐작할 수 없었 다. 그렇게 프레더릭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 유재원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유재원이 자리를 하고 나서 몇 분이 지나자 목사님이 주도하는 장 례식이 시작되었다.
장례식 겸 추도 예배는 한 시간 정도 걸렸다.
이후 제이콥의 시신이 든 관은 운구차에 실렸다. 여기서 유재원이 힘을 보탰는데, 제일 앞줄에 서게 된 것이다.
그렇게 유재원이 오른쪽 맨앞을 자리했고, 나머지 자리를 티파니 이모들의 남편들, 셰브롱의 임원들 이 자리했다. 장례식에는 제이콥의 친구도 적잖은 숫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서열과 명분에 밀려났다.
제이콥의 평소 행실이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았다는 건 분명한 사실 이었다. 덕분에 친구들 역시나 제 이콥과 비슷한 행실의 사람들이 모 였다. 경제계나 사교계에서 문제아 라는 인증을 받은 이들이 즐비했으 니 프레더릭이 호감을 보여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운구차에 옮겨진 제이콥 의 관은 JFK 공항으로 향했다.
제이콥이 영원한 안식을 취할 장 소는 뉴욕의 어느 묘지가 아닌, 캘 리포니아에 있는 프레더릭 가문의 가족 묘지였기 때문이다.
준비된 전용기에 운구차가 그대 로 실렸다. 캘리포니아로 함께 가 서 묘지에 입관하는 것까지 지켜볼 이들이 전용기에 올랐다. 프레더릭 이야 당연했고, 장인과 장모님 그 리고 이모들이 뒤를 따랐다.
유재원도 잠깐 스케줄을 따져 본 다음에 티파니와 함께 비행기에 올 랐다.
동부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일 은 모두 끝냈으니, 더는 뉴욕에 있 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앨 고 어 대통령의 선택에 따라 새로운일이 생길 수도 있긴 했다. 오사마 빈 라덴 생포 작전을 결정하고 드 론 시스템에 대해 지원을 요청한다 면 유재원의 할 일이 늘어나겠지만, 그건 다음주 초에나 있을 일이었다.
요청이 들어온다면 기쁜 마음으 로 동부로 다시 날아오면 그만이었 기에, 유재원은 스키너 요원에게 짧은 통화로 서부로 떠난다는 사실 을 알리고 비행기에 올랐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