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권 19화
유재원이 선택한 방식은 레인보 우 테이블이었다.
레인보우 테이블이란 암호화를 통해 만든 값을 대량으로 저장한 표다. 애플사는 사용자의 암호를 해시 함수로 변환해 저장해 놓고 있는데, 이미 확보된 전화번호로 애플 ID를 찾았고, 애플 ID를 통해 용의자의 암호가 변환된 해시 함수 값도 알아냈다.
문제는 해시값으로는 원래의 암 호를 유추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변환되는 방법은 알고 있으니,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한 해시값 을 뽑아내면, 일치하는 값을 찾아 원래의 암호를 알 수 있게 되는 것 이다.
제대로 된 레인보우 테이블을 만 드는 데엔 엄청난 시간과 저장 용 량이 필요하지만, ID 그룹의 데이 터센터를 총동원하면 이를 순식간 에 해치울 수 있다.
또 하나의 장점은 일일이 아이폰 드를 잡고 암호를 입력할 필요가 없 다는 것이다.
암호를 10번 잘못 입력하면 아이 폰으는 벽돌이 되는데, 이를 해제하 기 위해선 관리용 키를 다시 입력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레인보우 테이블은 데이터센터 내에서 전체 키를 만들고 확인하면 그만이기에 입력 횟수 초과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설명을 하면서도 직접 프로그래 밍을 멈추지 않았던 유재원이었다.
"시작합니다."
순식간에 제작을 마치고 검산까 지도 완료한 유재원은 곧바로 엔터 키를 눌러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레인보우 테이블이라니."
누군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 렸다.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컴퓨터 전문가들이 모인 곳이 바로 첨단기술분석 팀이었다.
당연히 그들도 레인보우 테이블 에 대해 고려해 보았다. 레인보우 테이블이라는 기술의 이론적인 토 대는 1980년대부터 나왔으니 말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해 보지 못한 건, 레인보우 테이블을 만드는 데 필요한 컴퓨팅 파워와 프로 그래밍 능력 부족으로 폐기된 아이 디어 였다.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슈퍼컴퓨 터를 이용한다더라도 수개월이 걸 릴 작업이었으니 말이다.
한데 유재원은 평범한 i웍스를 가지고 레인보우 테이블을 만든다 니 놀랄 수밖에.
물론 스키너를 포함한 팀원들은 유재원이 개인용 PC에서 원격으로 ID 그룹의 데이터센터에 접속해서 데이터센터의 컴퓨팅 파워를 이용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것 자 체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어디 보자."
프로그램이 실행되자 유재원의 ID 웹브라우저에 텍스트로만 이뤄 진 상태창이 나타났다.
간단하게 어디까지 진행되었는 지, 처리 속도는 얼마 정도인지 나 타내 주는 정도였지만, 그 수치만 으로도 첨단기술분석팀의 팀원들이 깜짝 놀랄 정도다.
"음, 현재 초당 23MB 정도 나오 네요."
초당 23MB라는 의미는 해시값 을 처리하는 퍼포먼스의 의미였다.
애플사가 사용하는 해시 함수 하 나 처리할 때 128비트의 결괏값이 나온다. 바이트로 치환하면 16바이 트였다.
그러니 초당 23MB라는 건 해시 함수를 초당 128만 개씩 처리한다 는 이야기였다.
"음, 지금은 일부 노드만 작동되 고 있어서 속도가 좀 느리네요. 뉴 욕 데이터센터는 물론이고 ID 그룹 의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유휴 자원이 모두 가동되기 시작하면, 기 가바이트 단위까지 올라올 거예요."
이어진 유재원의 말에 스키너를 위시한 첨단기술분석팀이 깜짝 놀 랐다.
지금의 수치도 대단한 것인데, 기가바이트 단위라면 최소 100배는 더 빨라진다는 말이었다.
반면 유재원은 말은 여유롭게 했 지만, 정작 퍼포먼스가 예상에 미 치지 못해서 머릿속이 복잡해진 상 태다.
아이폰드의 암호 체계는 알파벳대소문자에 숫자를 포함한 임의의 암호를 최대 8자리까지 설정할 수 있었다.
자릿수가 올라가는 만큼, 조합하 는 경우의 숫자도 폭증하니, 레인 보우 테이블의 용량도 기하급수적 으로 늘어난다.
"현재의 세팅 값으로 예상한다 면, 최종적인 레인보우 테이블의 용량은 8.52테라바이트 정도 될 거 예요."
이걸 현재의 퍼포먼스인 초당 23 메가바이트의 속도로 처리한다고 보면 대략 5일이 걸린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시간이다.
그렇지만 유재원이 장담한 기가 바이트 단위의 퍼포먼스가 나온다 면 4~5시간 정도로 크게 단축할 수 있다.
"8, 8테라바이트란 말입니까?"
기가바이트가 겨우 대중화되기 시작한 때였다.
요즘 출시되는 게임들은 4기가바 이트 용량의 DVD 한 장을 가득 채워서 내는 게 유행이었다.
오죽하면 용량이 많이 남는 게임 들도 더미데이터라도 넣어서 꽉 채 워 냈다. 하여튼 기가바이트가 겨 우 유행이 되고 있는 시절에 테라 바이트를 말하니 다들 깜짝 놀랐다.
그렇기에 최대 관건은 분산 처리 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일은 유재원의 특기이기도 했다.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모니 터에 표시되는 처리 속도는 완만한 속도지만 꾸준히 상승 중이었다.
스키너 요원과 이야기하는 사이에 2MB가 늘어서 초당 25메가바 이트로 상승했다.
"허! 대단하군요."
스키너 요원은 감탄이 절로 나왔 다.
역시 애플사에 매달리지 않고, 곧장 유재원을 찾은 게 정답이었다 는 게 정확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유재원은 이것도 딱히 마음 에 들지 않았다.
GPU에 연산을 보조해 주는 다이 렉트 컴퓨팅 기능이 있었다면, 지금보다 몇 배는 나는 퍼포먼스가 나왔을 터인데, 지금의 GPU는 오 직 게임만을 위한 기능만 탑재하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 없는 물건을 가지 고 아쉬워해 봐야 바뀌는 건 없었 으니 그냥 속으로 삭이고 말았다.
"다만 이렇게 퍼포먼스를 끌어다 쓰면 ID 그룹의 웹서비스나 데이터 센터에 입주한 고객사의 서비스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게 문제죠. 일단 공지를 해야겠어요. 뭐, 이번 일은 제가 자발적으로 돕는 것이니이에 대한 비용 청구는 따로 하지 않겠어요."
"배려에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공과 사는 분명히 해야 하니 보고 서에 담아 놓겠습니다."
스키너는 유재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수동적이었던 애플사의 반응에 조금 남았던 인내심과 호감 이 바닥날 것 같았던 반면, 유재원 은 그야말로 사이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애플사는 911 이전에도 FBI의 협조 요청에 소극적이었으니 말이다. 반면 유재원은 미국인이 아니었음에도 미국의 국 가적 재난 상황에 회사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돕고 있으니 호감이 절 로 생겨날 수밖에.
"그러고 보니 아직 저녁을 드시 지 않았지요? 근처 호텔에 솜씨 좋 은 셰프가 있습니다만."
덕분에 스키너 요원은 이제껏 팀 원들은 구경도 못 해 본 호텔 레스 토랑을 언급했다.
스키너의 제안이 얼마나 파격적 이었으면 잘못 들은 줄 알고 동료들끼리 되물을 정도였다.
"고맙지만 배달 음식이면 충분해 요. 레인보우 테이블 생성 프로그 램이 잘 구동되는지 계속 모니터링 을 해야 하니까요. 음, 오늘은 꼬박 밤새야 할 것 같으니, 제가 쏘도록 하죠."
유재원은 사무실 한편에서 휴대 폰을 붙잡고 사방에 연락 중이던 김대석을 불렀다.
"여기로 출장 뷔페 좀 불러 주세 요."
"예, 회장님. 그런데 몇 인분을 주문할까요?"
김대석의 물음에 유재원은 스키 너를 보았다.
"여기 합동 수사본부에 몇 명이 나 근무하고 있죠?"
유재원의 말에 스키너 요원의 입 이 떡 벌어졌다.
한턱내겠다고 해서 3층에 근무하 는 첨단기술분석팀에게 대접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는 그게 아니라 합동 수사본부 전체에 저녁 식사를 대접한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음, 200명 정도 될 텐데, 일단 상부에 한 번 문의를 해 보겠습니 다."
합동 수사본부 직원들의 식사는 지금까지 자율이었다. 피자나 핫도 그, 중국식 볶음밥을 배달해 먹던 가, 나가서 人} 먹고 오는 것이다. 식사비가 따로 나오지도 않았으니 각자의 사정에 따라 알아서 챙겨 먹었다.
그러니 유재원이 호텔에서 출장 뷔페를 시키더라고 큰 문제는 없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상부에 문의해보는 게 좋다는 것이 스키너가 살 아오면서 터득한 노하우였다.
모두의 시선이 스키너의 전화 통 화에 쏠렸다.
짧은 침묵이 생길 정도로 집중했 다.
합동 수사본부가 차려진 건 아직 3일도 되지 않았지만, 벌써 배달 음식은 질려 버렸던 탓이다.
맨해튼에 자리하고 있다고 값은 비싸게 받으면서 맛은 그저 그랬으 니 말이다.
스키너의 통화는 곧 끝났다.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허가가 떨어졌다는 말에 다들 기 쁨을 감추지 못했다.
유재원도 김대석을 보며 신호를 줬고, 김대석은 바로 행동으로 옮 겼다.
잠시 후.
호텔 로고가 선명한 박스 차들이 합동 수사본부가 차려진 세계무역 센터 남쪽 빌딩 안으로 들어섰고, 각 층마다 뷔페상이 차려졌다.
200명이 넘는 대인원이지만, 3곳 으로 나눠진 덕에 큰 혼란 없이 빠 르게 저녁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대신 호들갑을 떤 곳은 역시나 언론이었다.
911 테러 합동 수사본부에 대한 취재 열기는 뜨거웠다.
로비 앞에 진을 치고 있던 기자 들이 상당했고, 호텔에서 온 출장뷔페 차량은 눈에 확 들어왔으니 말이다.
합동 수사본부에 호텔 뷔페라니.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 다. 당연히 그 이유에 대해 캐묻게 되었지만, 합동 수사본부에서는 이 유를 함구했다.
유재원이 용의자의 아이폰드를 해 킹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이상으로 큰 논란이 생길 걸 우려했던 탓이다.
911 테러에 분노하는 사람들은 유재원을 응원하겠지만, 용의자라도 개인 정보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헌법적 가치를 수호하는 데 중점을 둔 사람도 많았다.
스키너가 애플사의 소극적인 태 도에 분노하면서도 순순히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렇지만 모두가 보안 의식이 철 저한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ID 그룹 유재원 회장, 911 테 러 합동 수사본부 참여 중!
뉴욕디지털타임즈라는 인터넷 전 용 신문에서 특종을 터트렸다.
갑자기 소속이 다른 수백명의 사람들이 모였으니, 탈이 날 수밖 에 없다.
그렇지만 유재원이 합동 수사본 부 내에서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는 밝혀지지 않은 덕에 큰 소란이 일어나진 않았다.
"응?"
저녁을 잘 먹고 나자 사무실의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밥이 들어가니 뭔가 날이 섰던 것이 조금은 무뎌진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집중력을 잃지 않은 사 람이 있으니, 유재원이었다.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하던 유재 원에게 이상한 점이 포착되었다.
처리 속도였다.
ID 그룹의 데이터센터를 구성하 는 클라우드 서버가 점차 활성화되 면서 레인보우 테이블을 만드는 속 도도 꾸준히 상승 중이었다.
그리하여 현재는 초당 1,348메가 바이트의 속도를 발휘 중이었다.
유재원이 장담했던 기가바이트 단위에 진입한 것이다.
21세기 중반이면 개인용 컴퓨터 한 대로 발휘할 수 있는 성능이었 지만, 지금은 이 자체로도 대단한 성능이었다.
더욱이 아직 성능은 더 상승할 여지가 충분했다.
이론적으로는 초당 2.4기가바이 트 정도의 속도가 나올 거라고 예 상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화면상에 뜨는 수치는 꾸 준히 상승해야 하는데, 오히려 떨 어지고 있는 것이다.
"뭐지?"
유재원은 즉각 데이터센터의 서 버 상태를 보여주는 관리자 페이지 로 들어갔다.
서버의 상태를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화면인데, 대부분 초록색이나 노란색이었다면 한 지점이 빨간색 으로 물들어 있었다.
"코요테 시티?"
실리콘밸리 남쪽의 작은 위성 도 시 코요테 시티에 자리한 ID 그룹 최초의 데이터센터가 문제였던 것 이다.
유재원은 바로 안드로이드폰을 열고 영식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밤 늦은 시간이었지만, 영식이 녀석이라면 이 시간에도 데이터센 터에 상주하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영식이는 전화벨이 울리 자마자 바로 연결되었다.
"야! 서버에 무슨 일야'?"
-중국발 DDOS가 재발했어!
"뭐? DDOS라고? 그건 차단했잖 아!"
-변종이 생겼어!
그러니까 DDOS 공격이 다시 시 작되었고, 이를 방어하느라 레인보 우 테이블을 만드는 데 전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귀중한 컴퓨팅 파워 가 낭비되고 있다는 말이었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