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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570화 (570/1,007)
  • 28권 4화

    다음 날.

    유재원은 대전 공장에 다시 내려 왔다.

    연락을 받은 유재원은 마음 같아 선 당장 대전으로 내려가고 싶었지 만, 티파니가 서울 집에서 기다리 고 있던 터라, 바로 내려갈 수는 없었다.

    티파니는 따로 할 일이 있다고 해서 서울에 남았고, 유재원은 수 행원들과 함께 대전 공장으로 내려 왔다.

    간밤에 또 눈이 내린 탓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서, 대전 공장에 도착한 건 점심때가 막 지난 시간 이었다.

    "드디어 실물이 만들어졌나요?"

    "예, 회장님!"

    MAP 3는 검은색으로 패키징 된 엄지손톱 크기였다. 자체적으로 패 키징을 했지만, 퀄리티는 소매 시 장에 내다팔 수 있을 만큼 깔끔했 다.

    칩의 윗면에는 레이저 각인을 통 해 ID 그룹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들어갔고, MAP 3의 정보가 담긴모델명도 확실히 들어가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메이드 인 소리아라는 마지막 문장이었다.

    "성능을 보여주세요."

    "예! 당연히 보셔야죠!"

    유재원의 요청에 리사 수 박사가 테스트용 보드 앞으로 유재원을 안 내했다.

    보드의 크기는 컴퓨터용 머더보 드보다도 컸다. 휴대폰에 들어갈 칩이니 휴대폰용 보드에 테스트하 는 게 좋겠지만, 당장 준비가 되진 않았다. 때문에 반도체 성능을 체 크하는 범용 테스트 보드를 일단 동원한 것이다.

    대신 구동되는 소프트웨어는 모 바일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였다. MAP 3는 하위 호환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기에, 운영 체제의 별 다른 수정 없이도 바로 부팅이 가 능했다.

    부팅이 끝나자 곧장 벤치마크 앱 이 실행되었다.

    화려한 그래픽이 뿜어졌다.

    CPU의 성능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부동 소수점 연산부터, 그래픽 모듈의 성능을 알 수 있는 폴리곤과 텍스처 처리 능력까지 일 괄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수행하는 과제는 비주얼적으로 매우 멋진 연 출을 보여주었다.

    T터치폰에 탑재된 MAP 2에선 전혀 볼 수 없는 화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MAP 2는 2D만 지원했 고, 3D 가속 모듈은 탑재되지 않았 으니 말이다.

    몇 분간의 테스트가 끝나고 화면 에 큼지막한 점수가 올라왔다.

    "9,891 점입니다!"

    대박!

    대박이 터졌다. 어제 문자로 보 고받긴 했는데, 직접 와서 보니 전 해지는 감동의 크기가 달랐다.

    동일 앱을 MAP 2에서 실행했을 때 나오는 점수는 2,000점이었다. 이것도 보통 상황에서는 볼 수 없 고, 휴대폰을 잠깐 냉장고에 넣어 놓은 후에 앱을 돌렸을 때 나오는 치팅성 점수였다.

    한데 MAP 3는 그저 테스트용 보드에서 4배가 넘는 점수가 튀어나왔다.

    2에서는 지원하지 않는 3D 렌더 링 테스트가 가동이 되었고, 덕분 에 점수가 대폭 향상되었다고는 해 도, 유재원의 예상보다 훨씬 좋은 점수였다.

    원래 생각하고 있던 건 최대한 긍정적으로 잡아서 MAP 2의 4배 정도였다.

    그런데 테스트용 보드에서 4.5배 였다. 최적화가 잘 이뤄진 핸드폰 용 보드에 탑재되면 점수가 더 오 를 가능성은 충분했다.

    "역시, 일제인가?"

    유재원 뒤에서 수군거리던 연구 원의 말이었다.

    다 좋은데,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바로 일본 원재료를 통해 만들어진 샘플이었다는 점이다.

    J3라는 샘플을 구성하고 있는 모 든 재료가 다 일본산이었다.

    실리콘 웨이퍼부터 포토레지스 트, 식각용 기체 불산, 세척용 액체 불산까지도 모두 일본에서 가져온 것으로 테스트했다.

    물론 한국산 재료로 만들어진 샘 플도 있었다. K로 시작하는 샘플이 었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일단 수율부터가 문제였다.

    제일 좋은 수율을 보여준 웨이퍼 가 대략 40% 정도의 수율이었다. 웨이퍼 한 장으로 대략 300개 정도 의 MAP 3 칩을 찍어낼 수 있는 데, 그중에서 작동되는 게 120개 정도였다는 이야기다.

    작동된다고 제 성능이 나오는 건 또 별개의 문제였다. 수백 장을 찍 어봤던 K샘플 중에 가장 높은 점수를 찍었던 것은 6천 점 후반대였 다. 6천 점 후반대라면 유재원이 보수적으로 예상했던 바로 그 점수 였다.

    수율만 괜찮았다면 K샘플로 양 산을 시작했을 텐데, 40%의 수율 은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 다.

    그런데 J3 샘플은 성능도 압도적 이었고, 수율도 60%로 매우 좋았 다. 최적화가 이뤄진다면 80% 이 상의 고효율을 낼 가능성도 매우 컸다.

    이 차이는 당연히 재료의 품질에 있었다.

    식각용으로 쓰는 기체 불산의 순 도는 국산이 95%였지만, 일본산은 99.9%였다.

    4.9%의 차이인데, 유재원은 이 정도의 품질 차이는 익히 알고 있 었고, 큰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의 반도체 생 산 공정은 120나노미터로, 엄청나 게 투박했으니 말이다.

    초고순도 불산은 10단위 수준의 초미세 공정에서만 효과를 볼 줄알았는데, 단순한 미세 공정에서도 큰 차이를 보여준 것이다.

    기업 차원에서는 일본산이든, 국 산이든 상관없지만, 장기적으로 보 았을 때가 치명적이다.

    일본과의 관계는 점점 나빠져서 2020년쯤 최악이 되는데, 기습적인 원자재 수출 금지로 한국 기업에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타격이었는데, 지금은 ID 일렉트로 닉스가 직격탄을 맞을 확률이 100%다.

    일성전자와 하이닉스를 통합한 기업이 ID 일렉트로닉스였으니 말 이다. 괜히 일본산 원자재를 써서 일본에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기에 국산 재료를 중심으로 MAP 3 생산을 하려고 했고, 설계 도 이에 따랐다.

    국산 재료가 일본산보다 못하다 는 것도 충분히 인지했다. 하지만 10나노, 7나노처럼 초정밀 공정이 아니었으니 충분할 줄 알았는데, 현실은 아니었다.

    안타까운 건 지금 확보한 국산 재료의 품질보다 더 좋은 건 없다 는 것이다. 제일 좋은 걸 모았지만, 결과가 시원찮았다.

    유재원은 잠깐 고민에 빠졌다.

    "음. 일단 J3 샘플을 기본으로 양산 준비를 하세요."

    결국, 선택은 일본 원재료였다.

    수율과 성능의 차이가 너무 나서 국산 재료를 억지로 쓰기엔 부담이 컸다.

    "대신 메모리 반도체 생산에는 K샘플을 써도 무방하겠죠?"

    "예! 회로 복잡성이 큰 MAP 3 에 비해 메모리 칩의 구조는 간단 하니 국산이 훨씬 적합할 겁니다."

    리사 수 박사의 시원한 대답이 다.

    일본산의 품질은 탁월했지만, 단 점은 있었다. 가격이다. 고순도인 만큼 애초에 비싼 가격인데, 물 건 너오는 수입품이니 운송비가 상당 했다. 게다가 보관도 까다로워서 전체 비용을 따져 보면 국산의 5배 를 우습게 넘는다.

    "그리고 시험용 라인도 계속 돌 리면서 탈일본 연구도 계속해 주시 고요."

    단순한 애국심의 발로가 아니라, 경제성까지도 따졌을 때, 국산으로 의 전환은 꼭 필요한 일이다.

    "아! 그리고 반도체 사업부 협력 업체 사장님도 좀 모아 주세요."

    마음 같아선 이것도 자체적으로 하고 싶은 유재원이었다. 하지만 ID 그룹에는 화학 관련 기업이 없 었다.

    기껏해야 배터리를 만드는 산요전기 정도가 전부였다. 셰브롱 쪽 역시 석유에서 나오는 나프타와 폴 리에스테르 같은 화합물을 다루는 회사만 있는 정도다.

    불산처럼 반도체 생산에 필수인 화학 물질은 용도도 한정되어 있고, 다루기도 힘들었다.

    결정적으로 그렇게 만들어 봐야 협력 업체로 지정되는 것도 바늘구 멍 통과하기만큼 어려웠다. 그렇기 에 국산 기업의 품질이 일본과 차 이가 생긴 것이다.

    유재원은 MAP 3까지는 일본산

    원료를 쓰더라도, 다음부터는 국산 으로 전환할 생각이었고, 협력 업 체들에게 적극적인 개발을 요청할 생각으로 자리를 만들겠다 한 것이 다.

    생각이야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유재원의 입 밖으로 나온 건 이번 이 처음이었다.

    덕분에 협력 업체는 갑작스럽게 연락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도 이야기가 전해진 바로 다음 날 협력 업체 사장들이 모두 대전으로 모였다.

    유재원의 존재감을 단적으로 보 여주는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유재원은 모바일용 비메모리 반도체 제조의 성공을 알 렸고, 일본산과 국산 원재료의 차 이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했다.

    이와 함께 국산의 품질이 일본산 에 비견될 정도가 되면 무조건 국 산을 쓰겠다고 천명했고, 협력 업 체에 기술 지원은 물론 투자도 적 극적으로 하겠다고 천명했다.

    다만 협력 업체 사장단들은 유재 원의 발표에 반가워하면서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유재원 탓은 아니다. 대기업을 믿고 투자했는데, 나중에 말이 바 뀐다든가, 기술만 쏙 빼 가고 나 몰라라 했던 경우가 무척이나 많았 기 때문이다.

    "제 이름을 걸고 확실히 말씀드 리죠. 지정된 스펙만 확실히 넘는 다면 무조건 채용할 겁니다. 문서 로도 만들어 드리고, 제 사인도 넣 어 드리죠."

    문서에 서명이 들어가자 협력 업 체 사장들은 비로소 유재원이 진심이라는 걸 이해했고, 열화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곧이어 ID 일렉트로닉스와 협력 업체와의 계약이 보도되었다.

    이른바 반도체 소리아 21이었다. 국민의 정부가 야심 차게 진행하는 우수연구인력 양성 계획인 브레인 소리아 21을 오마주한 것으로, 2008년도까지 반도체 소재 국산화 의 60%를 달성하고, 2012년도에는 100%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 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어느새 20()1년 1월이 되었다.

    연말 휴가를 끝내고 복귀한 김대 석 비서실장은 아침 미디어 브리핑 시간에, 재미난 게 있다며 신문 하 나를 내밀었다.

    -ID 일렉트로닉스, 120나노 모 바일 CPU 자체 개발 성공!

    -반도체 불모지 한국에서 이뤄낸 10년의 기적!

    -ID 일렉트로닉스의 통합에 대

    한 우려 100% 불식!

    보통 유재원에게 보고되는 신문 기사는 ID 그룹 관련 기사만 나온 걸 스크랩한 것들이었는데 이번엔 좀 달랐다.

    1면부터 사회면까지 그야말로 ID 그룹의 이야기, 유재원의 이야기가 가득했다. 기사들이 많아서 언뜻 보면 IT 전문 잡지처럼 보일 지경 이다.

    게다가 기사의 논조를 보면 ID 그룹의 보도 자료처럼 보일 만큼 호의적이었다.

    신문 1면 상단에 박힌 신문사의 이름이 대한일보였으니 말이다. 대 한일보라는 타이틀만 빼면 ID 그룹 사보라고 해도 될 정도다.

    호들갑도 이런 호들갑이 없다. MAP 3의 시험 생산에 성공했으니 한국에서 비메모리 반도체를 생산 한 건 사실이지만, 아직 양산 단계 는 아니었다.

    양산을 위해서는 원자재의 대량 주문이 있어야 하는데, 해당 품목 은 일본 정부가 긴밀히 관리하는 터라 허가가 떨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탓이다.

    그나마 ID 그룹 이야기가 없는 정치면의 경우에도 김대중 대통령 이 신년 기자 회견에서 밝힌 인터 넷과 인공 지능 그리고 문화 개방 에 대한 호평으로 가득했다.

    동시에 야당에 대학 혹평도 서슴 없었는데, 대안 없이 반대만 한다 고 해서 야당 발목 잡기라는 프레 임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민주 세력이 야당인 시절엔 늘 따라붙던 말이었지만, 정권 교체 이후 보기 힘들었던 단어였는데, 지금 다시 등장한 것이다.

    덕분에 유재원은 대한일보가 신 년 첫 번째 신문을 왜 이런 식으로 만들었는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살려 달라'는 발악이 었다.

    작년 겨울 불도저로 흑석동 사택 이 밀릴 때까지, 대한일보는 망해 라는 저주를 멈추지 않았다.

    망하라고 저주를 퍼붓는 가장 큰 대상은 민주당과 통일국민당의 연 정이었고, 다음이 ID 그룹이었으며, 마지막은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사실 흑석동 사택이 밀리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유재원과의 악연이 었다. 대한일보도 이걸 잘 알고 있 었기에 화해와 용서를 유재원과 접 촉하기 위해 애를 썼다.

    처음엔 이렇게 열심히 용서를 구 하는데, 감히 안 받아줘? 하는 흐 름이 었다.

    마치 사과를 했으니 관계 정리는 끝났다고 여기는 모양새와 같았다.

    언제나 갑이었던 이들이 보여줄 수 있는 태도였다. 하지만 정작 슈 퍼 갑은 유재원이었다는 걸 뒤늦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잘 들어오던 광고들이 뚝 끊겼 다. ID 그룹부터, 미래그룹, 부산그 룹, TG그룹처럼 10대 기업 중 4곳 이 대한일보를 보이콧했다. 10대 기업에 아직 들진 못했지만 유경그 룹도 있었다.

    그나마 광고만 좀 끊기는 거라면 다행이었다.

    일성그룹과 금성그룹처럼 기존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기업도 있었고, 신문광고의 제일 큰 점유율을 차지 하는 건 부동산 회사들의 광고였으니, 타격은 미미했던 탓이다. 하지 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국회가 문제였다.

    자원재생법이 통과되면서, 신문 구독자 숫자를 뻥튀기하는 게 어려 워졌다. 그러더니 청탁금지법이 생 기면서 기자들이 뒷주머니 챙기는 것도 눈치를 보게 생겼다.

    결정타는 고위 공직자 범죄 수사 처 였다.

    공수처가 눈 깜짝할 사이에 만들 어지더니 ID 파운데이션 산하의 법 률복지재단인 김&정 법무 법인의 대표가 초대 공수처장으로 낙하산 을 타고 내려와 버린 게 아닌가. 열심히 저격했지만, 뭔가 부풀려 쓸 만한 티끌도 없어서 낙마시키지 도 못했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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