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567화 (567/1,007)

28권 1화

ID 그룹이 비전을 발표하면 항상 구체적인 변화가 있었다.

SNS만 해도 처음엔 다들 뭐가 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다들 능숙하게 사용했다.

너무나 많이 몰입해서 문제가 벌 어지기도 했고, 속으로만 해야 할 말을 SNS에 올렸다가 곤욕을 치르 는 사람들도 많았다.

연예인 중에서 SNS로 팬 관리를 하려다가 글을 잘못 써서 사고를 치는 경우도 많았다.

이번엔 좀 달랐다.

유재원은 1월에 시스템 통합과 AI를 이야기했었는데, 2000년이 며 칠 남지 않은 지금에도 가시적인 변화는 없었다.

사실 AI는 이미 핵심 알고리즘이 완성되었고, 영식이의 관리 아래 기계 학습을 묵묵히 수행 중이었다.

단지 쉽게 구체적인 서비스 형태 를 구현할 수 있었던 SNS와 달리 지금 당장은 필터링 시스템 말고는 AI를 상용화 할 수 있는 건 없었 다.

문제는 시스템 통합이었다.

유재원은 ID 그룹의 모든 전산 시스템을 통합하고서 AI를 올릴 예 정이었다.

ID 그룹의 전 직원들이 사용하는 전산 시스템 역시 기계 학습의 범 주에 넣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초기엔 인공 지능이 그룹의 현금 흐름에 대한 모니터링을 하다가, 궁극적으로는 반복 업무의 대체까 지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1년 가까이 지난 지금 미국 쪽 계열사들의 통합은 어느 정도 이뤄 졌는데, 한국은 아직도 작업 중이었다.

미국과 달리 인수와 합병이 광범 위하게 일어난 곳이 한국이었고, 합병된 기업 간 시스템도 저마다 달랐다.

난이도가 극상이라 유재원이 전 담해야 풀리는 수준의 문제는 아니 지만, 시간이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예상보다 시간이 걸 리는 일은 또 있었다.

"아! 이번에 나온 웨이퍼 수율은 어때?"

티파니의 질문이 바로 그 부분을 정확히 짚었다.

이번 한국행의 목적은 스마트폰 전쟁의 핵심이 될 MAP 3의 자체 생산을 위해서였다.

이를 위해 리사 수 박사팀은 MAP 3의 아키텍처를 완성했고, 유 재원은 반도체 성능 향상을 위한 두 가지 신기술을 풀었다.

자신 있게 시범 생산을 시작했는 데, 이상하게도 기대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레시피가 완벽하게 갖춰진 상황이었고, 레시피대로 만들 었는데 원하는 맛이 나오지 않는 것과 같았다.

"이번에도 실패래."

최근에 찍어본 웨이퍼 역시 수율 이 처참했다.

원하는 속도를 달성하지 못해 수 율이 안 나왔다고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제대로 작동되는 칩 자체가 너무 적다는 이야기다.

"그나마 다행히 이종효 교수님이 뭔가 감을 잡으셨대."

"진짜? 다행이네."

유재원은 본인의 마음이 불편해 이종효 교수님을 청했던 것이다.

그런데 반도체 분야의 전문가이 신 이종효 교수님과 리사 수 박사 의 시너지 효과는 생각보다 훨씬 컸다.

유재원이 정석 풀이를 하고 있었 다면, 실전에서 나오는 다양한 트 러블을 리사 수 박사와 이종효 교 수가 해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티파니의 말대로 참으로 다행이 다. 다만 그 방법이라는 건 수정과 보완의 단순 반복이었다.

스마트 전쟁을 준비하는 방법이, 단순 반복의 끝없는 노가다라니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청와대에서 IMF극복에 힘쓴 기 업인들과 연말 간담회가 있을 것임 을 발표했습니다. 현재 한국에 있 는 유재원 ID 그룹 회장의 참석 여 부에 재계와 정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티파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 누는데, 텔레비전에서 뜬금없이 유 재원 본인의 이름 석 자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응? 자기 청와대 초청 받았어?"

청와대 초청이라니? 티파니의 물 음에 유재원은 고개를 저었다. 들 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다음은 날씨 소식입니다.

-오늘 밤, 많은 지역에서 강설이 예보되었습니다. 내일은 화이트 크 리스마스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 니다.

뉴스는 곧 다른 소식으로 바뀌었 다.

"내일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래! 나 화이트 크리스마스 보는 건 처 음이야!"

"진짜?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처 음이라고? 신기하네."

티파니가 뉴스 소식에 강아지처 럼 좋아했다. 유재원은 그런 티파 니가 신기했다.

티파니가 눈 내리는 걸 좋아한다 는 건 한 달 전쯤 대전 반도체 공 장으로 내려갈 때쯤 알게 되었던 유재원이었다.

하긴, 기상 이변 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눈 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신기할 수밖에.

"그러면, 내일 1박 2일로 스키장 에 갈까?"

"스키장? 나 스키 타 본 적 없는 데?"

"나도 한 번도 타 본 적 없어. 같이 배우면 되지."

" 진짜?"

유재원의 즉석 제안에 티파니가 바로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사실 크리스마스 연휴 계획은 딱히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유 재원의 모든 신경은 대전 공장에 있었던 탓이다.

MAP3 생산 차질 때문이다. 이 렇게나 길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 던 일이었다.

덕분에 유재원과 티파니의 대전 체류 기간도 길어졌다.

시범 생산에서 합격점을 받고 올 라올 계획으로, 유재원은 몇 번의 실패는 있겠지만 빠르게 성공할 것 이라 확신했다.

그런데 리사 수 박사를 비롯한

반도체 연구원들은 유재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긋한 얼굴이었다.

공정의 난이도가 대폭 올랐으니 어느 정도 시행착오는 있을 거라는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다.

유재원은 그런 리사 수 박사나 반도체 연구원들에게 속마음을 보 여줄 수 없어 참 답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MAP3 설계도에 적용된 기술들은 21세기에 이미 검 증이 끝난 기술이었다.

설계 역시 성능과 발열, 전력 소 모량 등등을 모두 고려한 결과물이었다.

다행히 MAP3 생산을 위해 모인 이들이 최고의 전문가들이라 수차 례 시도를 하면서 피드백을 받고 있는 중이었고, 그에 따라 수율이 점차 상승 중이었지만, 구리 배선 기술처럼 한 방에 딱 성공하지 못 한 건 참 아쉬운 일이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질 때까지도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다.

덕분에 지친 머리를 좀 식히려고 유재원과 티파니는 서울로 올라온 상태였다.

"그런데 조금 전 뉴스에서 자기 청와대로 초청한다고 하지 않았 어?"

스키장 이야기에 좋아하던 티파 니가 조금 전 뉴스를 언급했다.

"아참. 그게 있었지. 그런데 좀 불쾌하네. 초청할 거면 내 의향부 터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생각해 볼수록 기분이 나빠지는 유재원이다.

이미 텔레비전을 통해 보도되어 버려서, 유재원이 부득이한 스케줄 로 청와대의 초청에 응하지 못하게 되면, 그 책임은 유재원에게 돌아 올 테니 말이다.

물론 손해 배상과 같은 금전적 책임은 아니겠지만, 유재원과 같은 인물에겐 이미지 하락이 더 큰 손 해였다.

대중에게서 호감을 올리는 건 어 렵지만, 떨어지는 건 아주 사소한 일로도 한순간이니 말이다.

티파니와 한참 이야기 중에 유재 원의 T터치폰 알람이 울렸다.

-청와대 한광욱 비서실장 연락입 니다. 회장님께 연말 간담회에 대 해 긴히 드릴 이야기가 있다고 합 니다.

김대석의 ID톡이었다.

메시지를 확인한 유재원은 티파 니에게도 보여준 후 잠깐 고민하다 가 답장을 보냈다.

밤이 깊었으니 지금은 곤란하고 내일 이야기하자고 말이다.

비슷한 시각.

청와대 여민관.

"휴?. 알겠습니다. 예, 그럼 내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기에 온 신경을 기울이며 통 화 중이던 한광욱은 조심스럽게 전 화를 끊었다.

그리곤 사나운 눈길로 책상 앞에 죄지은 얼굴로 서 있는 직원들을 쏘아봤다.

조금 전 통화를 할 때만 해도 그야말로 버터 바른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였는데, 지금 직원들을 보는 건 서릿발 같이 매서운 눈빛이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아마추어적인 행태를 보일 건가? 응? 이러면 내 가 여러분을 믿고 일을 맡길 수가 없어!"

급기야 한광욱 비서실장의 불호 령이 터졌다.

한광욱 앞에 서 있던 이들은 놀 라서는 자라목이 되어 움츠러들었 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연말 간담회는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로 만들 어지는 행사였다.

행사의 목적은 IMF 조기 졸업을 위해 노력해 준 기업인들을 치하하 고 애로 사항을 듣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큰 것이 대통령과 유재원 회장의 만남이었 다.

대통령과 유재원 회장의 만남은 경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일이었다.

경제적인 일이라면 몰라도 정치 라니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겠지만, 유재원 회장이 원내 2당인 통 일국민당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 실이었다.

경제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유재원 회장과의 접촉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광욱 비서실장 앞에 있 는 직원들의 가벼운 입 때문에 그 일이 꼬이고 말았다.

청와대에 상주한 기자들과 잡담 을 하다가 유재원 회장을 초청한다 는 말이 흘러나왔던 것이다.

당연히 그 이야기는 기자들을 타 고 언론사와 방송사로 흘러들었고, 결국 보도가 되고 말았다.

"네 녀석들에게 더욱 실망한 건, 사고를 치고 은폐하려고 했다는 거 다."

사고를 치면 멘붕에 빠지겠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려서 빨리 수습할 생각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애초에 실수했다는 자각도 없었다.

만약 보고라도 일찍 했으면 엠바 고라도 걸어서 시간이라도 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사이에 ID 그룹에 연락을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다 말아먹었다.

"유 회장이 이번 행사에 불참하 면 너희들은 진짜 나한테 죽는다."

얼마나 화가 치밀었는지 평소에 온화한 말투였던 한광욱에게서 죽 는다는 말이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연말의 행사는 말이 경제인들과의 만남이지 가장 중요한 인사는 역시 유재원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IT라는 신기술로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 유재원과 한국의 미래에 대해 심도 있는 이 야기를 하고 싶다고 속내를 밝혔기 때문이다.

"저기, 비서실장님."

한광욱의 불호령에 정신을 차리 지 못한 직원들이지만, 불참이라는 단어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설마, 대통령님 초청인데 불참 할까요?"

쾅!

커다란 파열음에 반론을 펼친 직원의 목이 쑥 들어갔다.

한광욱은 직원들의 태도가 너무 답답했다. 말이 직원이지 이 녀석 들은 모두 행정관 이상의 직책이었 다. 행정고시를 통과한 5급 이상이 라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세상 돌아가는 눈이 이 렇게 어둡다니.

"다른 재벌집 회장들은 청와대가 부르면 재깍재깍 달려오니 ID 그룹 도 만만해 보인다는 건가?"

한광욱 비서실장이 정곡을 찔렀 다.

청와대의 존재감은 한국에서 그 어떤 조직보다 강력하다고 한광욱 도 자부했다.

특히 IMF 체제라는 건 한국 경 제에 심대한 타격이었지만, 반대로 대통령 이상의 권력을 넘보던 재벌 과 같은 경제 세력에게 더욱 치명 적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재벌들의 반발 에 엄두도 못 내던 빅딜도 강제할 수 있었고, 경제 개혁 조치도 시작 할 수 있었다.

"ID 그룹은 재벌들과 아주 다르한광욱의 눈빛이 이번엔 매우 한 심해졌다.

한국의 재벌들 대하듯 ID 그룹을 대했다간 큰일 난다는 것을 일일히 말해줘야 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런 건 미리 알아야 하는 것 아 니겠는가.

게다가 이런 놈들이 고르고 고른 인재라니.

하지만 한광욱 비서실장은 이번만큼은 직접 이야기를 해야 했다.

또, 이런 식의 실수가 재발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하니 말이다.

"ID 그룹과 재벌 기업들 사이에 제일 큰 차이점이 뭔지 아나?"

한광욱은 질문을 던진 후, 20여 초 정도 답을 기다렸지만 누구 하 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얼굴이 된 한 광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

"ID 그룹 측에서 한 번이라도 우 리에게 뭘 해 달라고 요구한 적이있나? 다른 재벌들처럼 규제 좀 풀 어 달라, 법 좀 바꿔 달라, 세제 감 면 혜택 좀 달라고 징징거린 적이 있느냐 말이야!"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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