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권 24화
다음 날.
유재원은 민주당 경선 준비에 열 심이던 앨 고어와도 만나 클린턴 대통령과 나눴던 이야기를 대부분 되풀이했다.
그렇다고 클린턴과 완전히 똑같 은 이야기만 나눈 건 아니고, 앨 고어만을 위한 몇 가지 조언을 추 가로 해준 것이었다.
"고향이라고 테네시 주를 소홀이 하면 안 돼요."
미국도 한국처럼 출신 지역에서 패배하는 걸 수치스럽게 여기는 풍 조가 있었다.
앨 고어가 그랬다.
고향이라고 방심했다가 부시에게 져서 큰 망신을 당했다.
부시 역시 본인이 태어난 코네티 컷 주에서 패하긴 했지만, 부시네 가문의 정치적 기반은 텍사스 주였 기에 타격은 앨 고어보다는 훨씬 덜했다.
"SNS를 적극 활용하세요."
"SNS? 톡톡 말인가?"
"톡톡도 좋고, 다른 SNS도 많이 있잖아요. 뭐든 끌어다 쓰세요."
톡톡이 서비스를 시작한 다음부터 유사한 SNS가 많이 출시되는 중이다.
아예 똑같이 베낀 것도 있었고, 뭔가 기능을 추가해서 만든 것도 있었다.
물론 가장 독보적으로 앞서나가 고 있는 건 톡톡이었다.
선거에서 조직적으로 SNS를 활 용한 사람은 오바마였다.
조직적으로 잘 구성된 선거본부 를 통해 차원이 다른 효율성을 보 이며 오바마 당선에 큰 공헌을 했 다.
"마지막으로 안보 이슈도 부시보 다 먼저 치고 나가시고요."
그러면서 유재원은 넥스트컴의 앨 고어 관련 검색어를 정리한 자 료를 보여주었다.
미국 넥스트컴에 매일 수백만 개 씩 쏟아져 들어오는 검색어 자체가 미국인들의 트렌드를 보여주는 빅 데이터 였다.
지금은 IT 전문가라도 이러한 데 이터를 재가공해 훌륭한 정보로 만 들 수 있다는 발상 자체를 하지 못 했지만, 유재원은 달랐다.
이렇게 정리된 자료를 보면 앨
고어의 취약점은 보이지 않았다.
앨 고어는 유약한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베트남전에 참가하면서 병역도 잘 치렀고, 안보관도 훌륭했는데 이상하게도 대중의 인식은 매우 부 드러운, 심지어 유약하다는 이미지 가 씌워져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군."
이러한 유재원의 지적에 앨 고어 는 살짝 놀라면서도 신선하다는 느 낌을 받았다.
워싱턴 DC에서도 올해 대선에서 앨 고어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들이 많았고, 덕분에 앨 고어의 선거대 책본부에는 잔뼈가 굵은 전문가들 이 자발적으로 참가해왔다.
그렇지만 이러한 인재들도 유재 원과 같은 분석 자료를 내보인 적 은 없었다.
"그럼요. 이런 정보는 저만 만들 수 있거든요. 일단 민주당 경선에 서 시범적으로 운용해보시고 잘 따 져보세요. 분명 손해는 아니까요."
유재원은 평소와 다르게 생색을 제대로 냈다.
어디 가서 구하지 못할 자료라는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알겠네. 자네의 조언은 잘 쓰도 록 하겠네."
앨 고어도 유재원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진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앨 고어에게 자료나 조언도 고맙긴 했지만, 가장 고마운 건 유 재원 그 자체였다.
유재원이 지지해주는 것만으로 54명이라는 미국 최대의 선거인단 을 보유한 캘리포니아 주의 지지는 따 놓은 당상이었으니 말이다.
"건투를 빌어요."
"고맙네. 과외까지 받았는데, 절 대 질 수야 없지."
"에이, 이게 뭐 과외라고 할 게 있나요. 제대로 된 전략은 본선에 서 알려드리죠."
앨 고어와도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낸 유재원은 다음 일정을 위해 아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재원의 다음 목적지는 보스턴 이었다.
미국 북동부 매사추세츠 주에 위 지한 도시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도시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드와 MIT 등등의 세계적인 대학과 유수 의 연구소들로 대표되는 첨단 과학 연구 중심의 도시라는 상반된 이미 지도 보유한 도시였다.
유재원이 오늘 이곳에 온 것도 보스턴의 최첨단 기업 중 하나와 미팅을 위해서다.
보스턴 다이나믹스.
오늘 유재원이 만날 회사의 이름 이다.
지금은 딱히 명성은 없지만 2005년 이후로 크게 유명해질 회사 인데, 바로 엄청난 운동 성능을 보 유한 빅독이라는 4족 로봇을 발표 하기 때문이다.
빅독 이후 치타, 펫맨이 발표되 었고, 이후 LS3라는 보병분대 지원 용 운반 시스템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인공의 로봇이 너무도 자연스러 운 동작을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로봇이 순간 생명체 같이 느껴져서 소름끼친다는 불쾌 한 골짜기 효과를 일으킬 정도였다.
이러한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마 스터피스와 같은 것은 바로 아틀라 스인데,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지 지대 없이 서서 완전한 자율로 직 립 이족보행을 하는 인간형 로봇이 었기 때문이다.
아틀라스의 후속 버전이 나올수 록 완성도는 더욱 높아졌고, 이후 안드로이드 로봇 산업에 혁명이 일 어났다.
오늘 유재원이 보스턴을 찾은 이 유는 이처럼 안드로이드 로봇 발전 에 지대한 공헌을 한 보스턴 다이 나믹스를 인수하기 위함이었다.
보스턴 다이나믹스가 아틀라스를 발표한 건 2010년 중반이었다.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인간의 노동력을 완벽히 대체할 수 있는 파이널 버전까지 가기 위 해서는 15년이 더 걸렸으니 말이 다.
하지만, 시간은 유재원의 편이었 다.
지금 보스턴 다이나믹스를 인수 하고서, 시간과 자금을 무한히 지 급한다면 아틀라스의 파이널 버전 까지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빠르게 단축할 수 있다.
더욱이 유재원의 머릿속에 잠들 어 있는 지식 중에는 아틀라스와 관련된 것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를 이용하면 10년을 단축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회장님, 곧 도착합니다."
김대석의 말에 유재원은 상념에 서 깨어났다.
자동차 창밖을 보니 보스턴 다이 나믹스 본사가 있는 월섬 (Waltham) 에 가까이 와 있었다.
보스턴 다이나믹스 본사의 정경 은 유재원이 알고 있던 이미지와 매우 달랐다.
그냥 보면 소박한 캠퍼스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1층짜리 건물인데, 옆으로는 상당히 길었다.
그나마 푸른 잔디가 깔려 있어 황량하게 보이진 않았다.
반면 유재원의 기억 속에 있는
보스턴 다이나믹스 본사 건물은 엄 청났다.
인간의 노동력을 완벽히 대체한 안드로이드의 가치는 얼마일까?
돈으로 따지기 어려울 만큼 엄청 난 가치를 가진 건 당연했다.
그렇기에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본사는 전 세계의 부가 다 몰린 것 처럼 화려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하늘을 찌를 듯 세워진 빌딩에 빗대서 신에 도전하는 바벨 탑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당연히 여기엔 부정적인 뉘앙스가 깔려 있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인데, 로봇이 이를 빼앗아 갔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 많았다.
심지어 안드로이드 로봇을 파괴 하자는 운동이 크게 늘기도 했다.
안드로이드 로봇의 대중화는 곧 사람의 일자리 감소로 이어지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의 처우는 고대 로마시절의 노예만도 못한 처지가 될 거라고 하면서 말이다.
21세기판 러다이트 운동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안드로이 드 로봇 보급의 양상은 이들의 예 측과는 많이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안드로이드 로봇 의 몸값은 최소 수십만 달러였고, 이처럼 비싼 몸값의 안드로이드 로 봇을 단순 노동직에 배치하는 건 그야말로 손해였으니 말이다.
안드로이드 로봇이 가장 먼저 보 급된 건 정밀한 자세 제어가 요구 되는 곳이었다.
전투기 파일럿, 수술실, 원자로 제어실이나 방사능 폐기장 등등.
위험하고 힘든 일이지만 고 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분야가 안드로이 드 로봇의 첫 번째 제물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보스턴 다이나믹 스가 기술력은 좋은데, 정치력은 형편없었고, 무척이나 폐쇄적인 기 업이었다는 것이다.
안드로이드 로봇에 대한 부정적 인 여론이 들불처럼 번져나갈 때 먼저 움직여 이미지 반전에 노력했 으면, 21세기판 러다이트 운동이 그렇게나 활발하게 전개되지도 않 았을 것이다.
게다가 폐쇄적인 조직 문화는 안 드로이드 로봇의 표준화에도 걸림 돌이 되었다.
오죽하면 2013년쯤 구글이 인수 했는데, 다른 조직과 융합하지 못 한 탓에 3년도 버티지 못하고 방출 되었다.
이후 소프트뱅크에 넘어갔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소프트뱅크는 8년 정도 보유하다 가 다시 매물로 내놓았다.
마치 저니맨 신세 같기도 했는 데, 여기엔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창립자인 마크 레이버트 박사가 큰 영향을 끼쳤다.
절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다 른 조직과 융합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마크 레이버트 박사 특유의 성향 에 남다른 기술력이 더해지면서 놀 라운 성과를 내긴 했지만, 빠른 안 드로이드 로봇에게는 걸림돌이 되 었다.
제2의 러다이트 운동 역시 마찬 가지다.
더욱이 비슷한 시기 발매된 일본 기업이 출시한 가정용 로봇들과 비 교하면 보스턴 다이나믹스에 대한 비토는 훨씬 컸다.
유재원의 목표는 간단했다.
한 고집 하는 마크 레이버트 박 사와 담판을 지어 지분을 확보하고, 로봇의 보급을 가속화하는 것이었 다.
그렇게 각오를 다진 유재원은 정 문에서 멈춰선 차에서 내렸다.
이미 보스턴 다이나믹스 사의 정 문에는 먼저 연락을 받은 관계자들 이 나와 있었다.
그들 중에서 유재원의 눈에 제일 먼저 든 건 역시나 마크 레이버트 박사였다.
후덕한 얼굴, 반짝이는 머리 덕 에 초면임에도 가장 먼저 찾아낼 수 있었다.
"마크 레이버트요, 마크 박사라 고 불러주오."
"유재원입니다."
"알고 있소. 최연소 필즈메달리 스트에다가 ID 그룹으로 세계 최고 의 부자에 오른 지도 몇 년은 되었 다지?"
인사말부터 본인의 성격이 그대 로 묻어나는 마크 레이버트였다.
터프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빈말은 못 한다고 봐야 할지 모르 겠다.
"올해 비전 발표도 잘 봤고. 시 스템 통합에 인공지능이라고 했던 가'?"
"와! 많이 아시네요?"
"그럼, 오랜만에 큰손 투자자님 께서 나타났는데, 이 정도는 알아 봐야지. 그런데 소프트웨어만 관심 이 있는 거 같은데, 우리 회사에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군."
"그렇게 보였나요?"
돌아보니 시스템 통합이나 인공 지능을 구분지어 보자면 확실히 소 프트웨어 쪽이긴 했다.
그렇게 따지면 마크 박사님은 완 전 골수 하드웨어 마니아라고 봐도 될 거 같다.
그의 로망은 사람을 닮은 완벽한 이족보행 로봇을 제작하는 것이었 다.
많은 로봇 학자들은 이족보행 기 능에 대해 비효율적이라고 말했다.
두 발로 서서 걷는 기능을 구현 하는 게 너무도 어렵기 때문이다.
두 다리를 견고하게 만드는 것도 힘들고, 동력 장치와 기어의 내구 성을 보장하는 것도 엄청난 일이었 다.
자세 제어 시스템을 구현하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럴 바에야 검증되고 전통도 쌓 인 바퀴를 다는 게 가장 편리한 해 법이었다.
이러한 비판을 하는 동료들에게 마크 레이버트는 이렇게 항변했다. 세상 사물이 인간의 모습을 기준으 로 만들어져 있다.
휴먼 인터페이스라는 것이다.
그러니 별도의 특수한 로봇을 만 들기보다는 사람의 형상을 그대로 따서 만든 로봇이라면 기존의 장치, 시설에 바로 활용할 수 있다고 말이다.
"두 발로 걷는 이족보행 로봇에 어찌 마음이 가지 않겠어요? 게다 가 그렇게 만들어진 로봇에 전문가 적 특성이 있는 인공지능이 얹어지 면? 그야말로 끝장나는 거죠."
"오호!"
살짝 상기된 유재원의 목소리에 마크 레이버트의 표정도 조금 달라 졌다.
여긴 무슨 일이냐면서 살짝 배타 적인 반응이었다가, 유재원이 본인 과 동류(?)임을 알아보자마자 배타 성이 확 사라진 것이다.
더욱이 완성된 로봇에 인공지능 을 얻는다는 건 마크 박사의 비전 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것이었다.
"인공지능이라. 의도는 참 좋은 데, 구현하려면 덩치가 어마어마하 게 커지겠군."
"스탠드얼론 버전의 인공지능이 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그럴 필요 있나요? 인공지능 클라이언트 프로 그램을 너끈하게 실행할 정도의 시 스템과 초고속 무선통신만 구현하 고, 인공지능 본체와 통신으로 연 결하면 끝이죠."
마크 박사가 설계하는 로봇은 기본적으로 독립적인 개체였다.
전원만 넣으면 알아서 움직이는 로봇이었다.
하지만 유재원이 생각하는 건 거 대한 클라우드 컴퓨팅 시스템으로 구현된 인공지능에 무선으로 연결 되는 방식이었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