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권 12화
"오중근 X박스 팀장님?"
성큼 다가온 김대석이 오중근의 이름과 직책을 불렀다.
"네네! 오중근입니다. 그리고 팀 원 다섯 명도 있습니다."
X박스 팀이라니.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구체 적인 조직이 만들어진 모양이다.
"샌프란시스코에 오신 걸 환영합 니다. 준비된 차가 있으니 저를 따 라 오세요."
김대석이 앞에 섰고, 오중근과 팀원들이 뒤를 따랐다.
김대석의 뒤통수를 보며 물어보 고 싶은 게 무럭무럭 피어나는 오 중근이 었다.
어디로 가느냐부터 앞으로 무얼 하면 되느냐 등등.
기다리면 답을 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었고,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도 아닌지라 김대석은 먼저 움직 인 것뿐이지만, 오중근에겐 무척 불편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게 계획적 이고 철저한 사전 조사를 바탕으로 움직여야 했던 일성 시절과는 너무 도 다른 업무 처리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 일성에 입사했던 오 중근은 일성의 기업 문화를 뼛속까 지 받아들인, 이른바 일성맨이었다.
그런 그에게 ID 그룹은 미래 그 룹 이상 가는 도깨비 같은 기업이 었다.
미래 그룹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게 '임자, 해봤어?'라는 문장이었다.
전명헌이 모험적인 선택을 했을 때, 임직원들이 온갖 데이터를 들 고 와 만류했다고 한다.
이때 숫자놀음을 물리치는 전명헌의 대답이 해봤냐는 말이었다.
반면 일성 그룹의 기업 문화를 설명하는 문장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지 않는다!'라는 말이었 다.
철저한 사전 조사를 해보고도, 뭔가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진출하 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덕분에 일성 그룹의 기본적인 전 략은 따라 하기였다. 어떤 새로운 사업, 새로운 제품을 출시할 때에 도 시장을 선도해본 경우는 별로 없었다.
선발주자가 시장을 개척하면, 그뒤를 선발주자보다 훨씬 더 업그레 이드된 제품으로 따라가는 게 일성 의 전략이었다.
반도체 부문과 자동차를 두고 일 부 언론이 따라 하기 전략을 포기 했다고 말했지만, 자세히 보면 그 사업 역시 후발주자 전략이었다.
그러면 ID 그룹은 어떠냐?
오중근은 미래 그룹보다 더 막가 가는 기업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불과 10년 만에 세계 최 대의 IT 기업에 등극한, 희대의 천 재 유재원이 이끄는 ID 그룹이 미래 그룹보다 더 막나가는 실체를 뒤늦게 알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 오중근 본인을 샌 프란시스코로 부른 건 X박스라는 물건 때문이었다.
오증근이 ID 일렉트로닉스 소속 이 된 지도 몇 달은 되었는데, 그 전까지 X박스라는 것에 대해 들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야말로 뜬금없이 하늘에서 툭 떨어졌다.
덕분에 오중근은 미국의 계열사 에서 담당하는 프로젝트인가 싶었 는데, 갑자기 오중근 본인이 소집된 것이다.
몇 년 전에 일성에서 알라딘이라 는 게임기를 담당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이렇게 ID 그룹은 신규 사업이 시작되었을 때, 조직 내에서 적절 한 이들을 뽑아 TF팀을 꾸리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ID 그룹이 출시했던 많은 제품들 이 이런 식으로 추진되었다고 했다. 티파니폰은 물론이고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초기 버전까지 말이다.
일단 유재원이 일을 벌려 놓으면 새로운 조직을 만들든, 기존의 조직이 담당하든 어떻게 해서든 양산 을 한다. 그리고 다 성공한 것이다.
천하의 미래 그룹도 이런 식으로 는 하지 않았다.
더욱 미스터리한 건 이렇게 추진 한 일이 다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천재 한 명의 역량이 얼마나 큰 파괴력을 행사하는지 확 실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여기에 오중근은 유재원이 보통 천재와는 다르다는 것도 일찌감치 알아봤다.
오중근이 아는 천재라는 개념은 하나의 분야에 특출한 재능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천재가 꽂힌 분야를 제외한 나머 지 분야는 일반인과 같은, 혹은 그 보다 떨어지는 능력을 가지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유재원은 그렇지 않았다.
정치력!
수학 천재, 음악 천재, 컴퓨터 천 재 등등.
세상에 다양한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천재는 참 많다.
하지만 정치에서는 아직 천재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오중근은 최강욱 부회장에게 호 출을 받아 샌프란시스코 행이 결정 된 다음, 유재원에 대한 그간의 행 적, 그리고 세간의 평들을 다시 돌 아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몇 개의 소식을 접했 다.
-일성 그룹 최현희 회장, 1심 징 역 7년 확정. 법정 구속-DH 호텔 사장, 항소심 5년 확 정. 집행유예 관례 깨졌다최현희 회장이 어떤 사람인가.
일성맨인 오중근에겐 최현희 이 름 석 자만 들어도 절로 움찔하게 만드는 존재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오중근도 알라딘이라는 이름으로 세가의 메가드라이브 그리고 후속 기종들을 가져와 게임기 사업을 할 때, 최현희 회장에게 직접 보고를 하기도 했다.
최현희 회장을 만나는 건 심적인 부담이 엄청났다.
혹여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생 각지 못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할까 봐 하루 전날부터 스트레스였다.
갑자기 훅 들어오는 질문들은 엄청나게 날카로웠고,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더욱이 준비가 부족해 제대로 답 변을 못하고 어버버거리면 불호령 이 떨어졌다.
불호령은 곧 불이익으로 이어졌 다. 보너스가 깎일 수도 있고, 진급 에 차질이 있었다.
더욱이 최현희의 영향력은 그룹 내에서만 발휘되는 게 아니었다.
관리의 일성이라는 말이 괜히 나 온 게 아니다.
정치권이든 검찰이든, 대법원이든 골고루 일성의 영향력이 투사되 었고, 그들은 알게 모르게 일성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
그렇기에 이번에 나온 1심 판결 은 예전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차명 계좌, 비자금 조성, 산업 재 해 은폐 등등, 복합적인 혐의가 적 용되어 형량이 높아졌다지만, 7년 이라는 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다.
오중근은 전례에 따라 5년 정도 가 나오고, 항소심에선 집행유예로 감소되어서,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 되는 걸 예상했다.
그런데 1심에서 7년이면 항소심 에서 아무리 감형을 받아도 집행유 예가 나오기는 힘들었다.
와병을 통한 형집행정지라는 수 단이 하나 남긴 했지만, 마냥 수월 한 것도 아니었다.
개헌을 통해 생겨난 또 하나의 헌법 기관, 공수처 때문이었다.
검찰과 대법원에 대한 확실한 견 제 기관이었고, 실제 그 역할이 이 뤄지고 있었다.
DH 호텔의 사장님이 항소심서 여유를 부리다가 감형을 하나도 못 받은 건 공수처가 그 존재감을 확실히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공수처는 DH호텔 관련 수사를 맡아서 호텔 나이트를 비호했던 경 찰도 모조리 날려 버렸다.
국내 최대 신문사인 대한 일보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대한 일보의 프레임 설정 능력과 존재감은 예전 만 못했고, 공수처에 대한 국민들 의 지지가 높았기에 가능한 일이었 다.
이제 와서 보니 이러한 변화 뒤 에는 모두 유재원의 영향력이 있었 다.
최현희를 최초로 고소한 건 유재원이라는 걸 잊은 사람이 많았고, 오중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이번에 조사를 하면서 깜짝 놀랐고, 공수처 관련해서도 처음 이야기가 언급된 건 전명헌의 대선 공약이었는데, 그걸 유재원이 만들어줬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연관이 없어 보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잘 세팅된 계획에 따라 차곡차곡 진행된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고도의 정치력이 고, 가히 천재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 오중근의 눈에 하얀 집이 들어왔다.
샌프란시스코만을 내려다보는 언 덕에 즐비한 고급 주택가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집이었다.
유재원 회장의 자택이라는 걸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제야 옆에 앉은 팀원들이 웅성 거리는 소리가 났다. 반면 오중근 의 표정 변화는 미미했다.
공항에 픽업을 위해 김대석 비서 실장이 온 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 확했기 때문이다.
유재원 회장과의 면담.
덕분에 오중근의 머릿속은 무척 이나 복잡했다.
일성맨으로 있던 시절이라면 이 런 식으로 호출이 되었을 때는 무 슨 질책이 떨어지던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유재원 회장을 처 음 만나러 가는 자리였고, 무슨 일 을 줄지 어떠한 언급도 없었다.
덕분에 오중근은 최현희를 만나 러 갈 때보다 더한 긴장감을 느끼 는 중이었다. 왜 불려가는지 알 때 와 모를 때의 차이가 이렇게 클 줄 은 오중근도 미처 몰랐다.
똑똑!
-회장님!
"네!"
평소처럼 서재에서 한창 작업 중 이던 유재원은 문 밖에서 나는 노 크 소리에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다.
그러면서도 키보드는 쉬지 않고 움직이는 신묘한 기술을 펼쳐 보이 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한창 기세 를 올리고 있었기에, 끊고 가기가 아쉬웠던 탓이다.
-X박스 팀이 도착했습니다. 오 중근 팀장 외 5명, 무사히 모셔왔 습니다.
"아, 네. 곧 나갈게요."
X박스 팀이 왔다는 소리에 유재 원은 반색했다.
웬만하면 끊지 않고 계속 하려고 했던 프로그래밍도 잠깐 멈췄다.
매우 사적인 프로그램이었기에, 공적 업무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멈춰도 상관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유재원은 착용중이던 작업용 복장을 갈아입었다.
서재에서의 프로그래밍 작업은 혼자서 하는 일이 대부분이었기에, 지금처럼 완전 프리한 옷을 입을 때가 많았다.
이대로 직원들 앞에 서는 것에 대해 유재원은 딱히 문제가 없었지 만, 직원들이 유재원에게 가졌던 환상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말끔 한 정장을 꺼내 입었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내려가보 니 40대 초반부터 30대 중반까지의 남자들 여섯이 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먼 길 오는 데 고생했다고 각자 시원한 음료를 내주었는데 긴장한 모양인지 손도 못 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맨 끝에 앉은 이가 한 모금 마시려는 순간 유재원이 내려 온 것이다.
그 모습에 다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히 앉으세요."
직원들을 집으로 불렀을 때 종종 보던 모습이었기에, 유재원은 바로 맞은편으로 가서 편하게 앉았다.
그러자 오중근을 비롯한 직원들도 자리 앉았다.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어요."
"아닙니다!"
아니긴.
장시간 비행으로 쌓인 피로가 어 깨에 남아 있는 게 딱 보였다.
"많이 피곤하실 텐데, 바로 본론 을 말씀드릴게요. 오면서 들으셨겠 지만 X박스 팀을 만들었어요. 저번 IDDC 99 발표대로 ID 그룹도 게 임기 시장에 진출을 결심했고, 자 체 개발 게임기의 이름이 X박스로 정해졌지요. 여러분 말고도 수십명의 인재가 모여서 X박스 팀을 만들었어요."
"저희가 다가 아니었군요."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이의 말 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X박스 팀은 이미 활동 중인 상 태였고, 이번 일처럼 계속 인력을 충원하며 몸집을 불리는 중이었다.
이미 업무에 들어간 파트도 있었 는데, 본체 디자인과 조이스틱 제 작팀이었다. 메인보드 제작도 시작 했다. 하지만 게임기 사업은 단순 한 하드웨어 하나만 완성한다고 해 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하드웨어를 만드는 게 제일 쉬운 과제였고, X박스용 운영체제를 만드는 건 그 다음이다.
제일 어려운 과제는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게임기에서 구동될 게임 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오중근 팀장님과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임무가 바로 일본의 서드파 티를 구하는 거예요. 특히 오 팀장 님은 일본 게임사들과 긴밀한 인맥 이 있으시다면서요?"
유재원의 말에 오중근은 아 하는 표정이 되었다.
"세가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오중근이 했던 일이 세가의 메가 드라이브 게임기를 한국에 유통하 는 일이었다. 당연히 그 일을 하면 서 세가와의 인연이 생겼다.
"맞아요."
오중근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온 이들 역시 비슷한 일들을 했었 다.
그제야 오중근은 긴장감이 조금 풀렸다.
만약 게임기를 직접 설계하고 유 통망을 뚫어 보라는 임무를 주었다 면 정말 까마득했을 터였다.
다행히 일본의 인맥을 활용하는 거라면 충분히 할 만한 일이라 생 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중근이 한창 실무를 보던 시절 함께 일했던 세 가의 사람들 중 상당수가 아직도 세가에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