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권 9화
남북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좋 았다.
단적으로 올해 10월부터 드디어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다.
금강산의 사계 중 가장 화려하다 는 가을의 금강산을 보겠다는 사람 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들도 제품을 생산하는 중이었고, 간만 보던 대 기업들도 입주를 시작했다.
여기에 철광석과 고품질 무연탄 은 북한의 효자 상품이었다.
전생에서는 한국에 들어오면 난 리가 날 자원이었지만, 지금은 러시아 창구를 통해 대대적으로 수입 중이었다.
호주산보다 훨씬 저렴했고, 지리 적 이점으로 수송 비용까지 너무나 쌌다.
-덕분에 일부에서는 직접 수입을 하자는 말이 진지하게 나오고 있습 니다.
"욕심도 과하네요."
역시 돈에 눈이 돌아간 사람은 무섭다.
90년대 초까지 있었던 극심한 대 결 구도는 싸그리 잊어버린 모양이 다.
당장 유재원의 조치(?)가 없었더 라면 올해 6월에는 연평해전이 또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
NLL에 대한 북한의 도발은 계속 이어졌고, 그게 결국 무력 충돌로 이어졌던 것이다.
심지어 NLL문제는 한국에서도 대선에 영향을 줄만큼 커다란 이슈 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젠 다 옛날이야기다.
종전 선언 그리고 개헌을 통해 한반도는 새 역사를 쓰고 있었다.
휴전선 자체가 국경선으로 성격 이 달라졌고, NLL 역시 국경선의 연장이 되었다.
대신 북한과의 평화 수역을 구성 하고, 중국 어선에 대해 공동 대 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한국 사람들은 그저 꽃게가 풍년 이어서 누구나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정도의 체감이지만, 이전 역사를 아는 유재원에겐 여러 모로 감회가 남달랐다.
그렇지만 방심하진 않았다.
북한은 현재 중국 그리고 미국과 의 절묘한 줄타기를 하는 중이었다.
북한과 미국이 가까워지면 제일 큰 피해는 중국이 본다.
무조건 막아야 할 일이었고, 그 대가는 경제적 지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경우엔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는 장치로 한국과 북한을 쏠 쏠하게 사용했다.
게다가 동아시아 전략 연구소가 제시한 해법에도 긍정적이었다.
개마고원에 미해병대의 주둔이라 는 건 여전히 실현 가능성은 작지 만, 한반도를 지렛대로 삼아 중국 을 견제하고, 일본이 이를 서포트 한다는 건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 를 낼 방법임을 인정했다.
-ID 일렉트로닉스의 조직 개편 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어진 최강욱의 보고에 유재원 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IDDC 99에서 큰소리로 떵떵거 렸던 약속을 지켜내려면 ID 일렉트 로닉스에서 힘을 좀 내줘야 한다.
X박스의 구성품 중에 아직 한국 의 기술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CPU와 GPU를 제외한 모든 부품 은 ID 일렉트로닉스에서 만들어 원 가를 최대한 절감할 작정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2002월드컵을 대비한
HD방송과 HD텔레비전 보급에서 도 ID 일렉트로닉스가 할 일이 참 많았다.
정부에서는 단순히 IT 기술 강국 으로써의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제 한적 시범 서비스를 하려고 했지만, 마음을 달리 먹은 유재원은 2002년 부터 HD텔레비전을 전면 보급해버 릴 작정이었다.
모든 게 술술 풀리고 있었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에서 IMF 조기 졸업을 선언했습니다. 9월 초 에 30억 달러의 상환이 있을 것입 니다.
"예? 조기 졸업이요?"
꼭 모든 게 좋을 때, 초를 치는 일이 일어난다.
그냥 들어보면 IMF 조기 졸업은 참 좋은 소리였다.
아무리 유재원이 IMF 한국 사무 소를 순한 맛으로 만들었다지만, IMF강점기라는 말이 나올 만큼 압 박적이 었다.
게다가 김대중 대통령은 늦은 나 이에 대통령이 되었기에, 구체적인 성과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경제의 상황도 무척이나 좋으니 조기 졸업을 선택했고, 차입금 상환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럼 곤란한데요."
이건 유재원이 바라는 일이 아니 었다.
-음, 회장님께서는 조기 졸업을 탐탁지 않게 여기시는 것 같군요.
최강욱은 말'을 꺼낼 때 표정이 좋았다.
IMF와 유재원이 맺은 계약서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가 상환하면, 그 대금을 즉각 돌려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ID톡 화상 미팅이 연결 된 상태였기에, 최강욱은 유재원의 표정을 바로 읽고는 표정이 바뀌었 다.
뽀얗게만 나오던 옛날 버전이었 으면 미묘한 표정 변화를 읽기 힘 들었을 텐데,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의 버전 업이 꾸준히 이뤄져 HD급 화질로 연결된 지금은 딱 보였던 탓이다.
"그래요."
유재원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조기 졸업의 이점이 대체 뭐 죠?"
한 발 더 나아가 긍정의 기색을 보이는 최강욱에게 거꾸로 물었다.
-음, 제일 큰 이점은 아무래도 꽁꽁 얼어붙은 경제 심리 회복 아 니겠습니까. 다음으로는 대외 신용 도 회복이겠고요.
이번에도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 였다.
만약 온겨례 신문과 같은 진보 언론들이 말하는 IMF 압제 탈출과 같은 말이 나왔으면 처음으로 실망 했을 텐데, 역시나 최강욱은 최강 욱이었다.
한국 IMF 사무소의 구성이 어떤 식인지 잊지 않았더라면 절대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한국의 자칭 진보 언론들 사이에 요즘 유행하는 말은 IMF 압제 였다.
유재원이란 필터를 통해 걸러진 덕에 IMF가 요구하는 개혁 정책의 수준이 상당히 약해졌고, 한국의 현재 상황에도 적합하게 바뀌었다.
모순 덩어리였던 한국 경제 시스 템은 IMF 수준의 충격이 아니면 고치는 게 힘들었다.
유재원이 조기 졸업을 꺼리는 이 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님의 의지가 강합니다. 게다가 내년 총선과도 연계 가 되어 있어서 국회의 지지도 상 당하고요.
"어휴, 경제 대통령이라고 자부 하셨던 분 아니에요? 이런 사안에 정치적 판단이라니."
유재원은 실망감을 감추기 힘들 었다.
물론 내년 2000년도에 있을 한 국의 총선도 중요하다. 만약 한나 라당이나 민주한국당이 국회 다수 당이 되면 현재의 여당인 민주당은 물론이고 유재원도 갑갑해지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재벌들의 로비가 상당히 강하게 들어가고 있 는 정황도 보이긴 했습니다.
역시 그들이 왜 안 나오나 했다.
IMF를 등에 업고 펼치는 개혁 정책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 주 체는 재벌들이었다.
원래는 신자유주의의 전도사가 되어서 금융 산업에 가장 강력한 구조조정이 이뤄졌을 것이다.
자본시장이 완전 개방되고, 외국 의 거대 자본들이 들어와 헐값으로 우량한 자산들을 싹쓸이 할 수 있 도록 한 것이 과거 IMF의 경제 위기 해법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재벌간 빅딜을 통한 산업구조 개 편이 IMF 개혁 정책의 핵심이었다.
일각에서는 ID 그룹과 미래 그룹 이 다 해먹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 오기도 했지만, 차입경영에 문어발 확장으로 수십, 수백 개의 계열사 를 거느린 재벌들이 할 말은 아니 었다.
재벌들의 반발은 당연히 생겼고, 그들의 불만이 청와대와 정치권에 이어진 로비로 구체화된 모양이었 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재벌 개혁 의 기회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 도 있어요."
-그건 그렇습니다.
유재원이라는 변수가 생기긴 했 지만, 21세기 들어 돈의 힘은 생각 이상으로 강해진다.
괜히 권력이 청와대에서 시장으 로 넘어갔다는 말이 대통령 입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이번 1차 상환은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만, 2차부터는 최대한 뒤 로 미뤄보겠습니다.
"부탁해요."
진보 언론은 IMF 강점기라는 키 워드로, 보수 언론은 국민 자존심 회복이니, 국가 신용도 회복이니 하는 말로 약을 팔아서 조기 졸업 에 힘을 실어줄 것이고, 국민들도 다들 긍정적으로 생각할 테지만, 유재원은 절대 반대였다.
"통일 국민당도 움직여볼게요."
-그렇게 해주시면 한결 수월해질 겁니다.
최강욱 혼자 하기엔 버거운 일이 었기에, 유재원은 처음으로 통일국 민당 카드를 꺼냈다.
통일국민당과 유재원이 공식적으로 연결된 라인은 하나도 없었다.
과거 대선과 총선에서 감투를 쓰 긴 했지만, 모두 임시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적으로는 엄청나게 긴 밀한 관계가 유지 중이었다.
"김광일 이사에게 말해놓을 테 니, 필요한 일이 있으면 바로 활용 하시고, 사후 보고만 해주세요."
바로 김광일 이사를 통해서 말이 다.
김광일이 ID 그룹의 식구가 된 건 한 달 전이었다.
그 사이 미래 그룹은 미래아산 그룹와 미래 자동차 그룹으로 나뉘 었다.
미래 자동차와 미래 유통을 받은 전재근은 끝까지 그룹이 완전 분리 되는 걸 막으려고 했다.
어떻게 해서든 한 지붕 아래에 있어야 나중을 도모할 수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이점이 있었으니 말 이다.
하지만 미래 건설과 중공업 등 그룹 핵심을 물려받은 전재구는 유 재원과의 거래를 완료하자마자 분 할을 관철했다.
전재구의 생각은 간단했다.
완전 분할 후, 미래 자동차 그룹 을 다시 먹어서 진정한 전명헌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IMF로 인해 자 동차 시장은 꽁꽁 얼어붙었다.
해외 진출도 딱히 성과는 없으면 서 돈만 잡아먹고 있었다.
더욱이 자동차 중심으로 재편된 일성 그룹의 추격도 무시무시했다. 회장님의 취미 생활이란 비판에 직 면했던 일성 자동차였지만, 일본과 의 기술 합작으로 출시된 신모델의 완성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출혈 경쟁이 뻔히 보이는 상황이 었고, 미래 자동차가 어려워지면 도움을 주는 척하면서 집어 삼키자 는 게 전재구의 노림수였다.
유재원이 봤을 땐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IMF가 끝나자마자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게 미래자동차였으니 말 이다.
그렇다고 미래 자동차 그룹 쪽에 호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수를 바탕으로 성장한 미래 자 동차였지만, 국내 소비자들을 어떻 게 취급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국내에서 무지막지하게 차를 팔아치우면서도 국내에 새로 운 공장 하나 짓지 않았던 기업이 기도 했다.
예전까지는 전명헌의 얼굴 때문 에 미래 자동차를 ID 그룹의 의전 용 차량과 업무용 차량으로 사용했 었다.
하지만 미래 자동차가 이전과 똑 같은 길을 걸으면, 더는 미래 자동 차를 찾지 않을 생각이다.
해외에 좋은 자동차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뭐가 좋다고 미래 자동차를 찾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 김광일 이사라면 커뮤니케 이션 총괄인데 말입니다.
최강욱은 유재원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최강욱은 김광일 의 진정한 정체(?)에 대해선 아직 모르고 있었던 탓이다.
"아, 그게 말이죠."
유재원은 최강욱에게 김광일에게 약속한 그룹 커뮤니케이션 총괄이 사 자리를 만들어준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김광일에게 주어진 자리는 직책 에서 알 수 있듯 그룹의 대외 홍보 활동을 총괄하는 자리였다.
구체적으로는 언론사와의 커뮤니 케이션이나 ID 그룹이 개최하는 행 사들을 주관하고, ID 그룹의 이익 을 위해 로비 활동도 책임지는 게 그의 임무다.
간단하게 보자면 다른 기업들도 많이 있는 술상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짜 임무는 따로 있으 니, 바로 수첩 관리였다.
전명헌이 수첩에 이름을 올리면 그 인물을 실제 케어했던 이는 김 광일이 었다.
수첩에는 통일국민당은 물론이 고, 여당인 민주당, 심지어 민주한 국당이나 한나라당 의원들의 이름 도 있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 소문 이 사실이었군요.
"네, 제 방식은 아니지만, 할아버 지가 유언으로 남겨주신 만큼 써보 려고요."
수첩을 물려받은 유재원은 전명 헌의 방식을 따르기로 했기에, 김 광일을 커뮤니케이션 총괄이사로 등용했다.
김광일도 본인이 제일 잘하던 일 을 그대로 하면서, 오히려 직책과 보수는 크게 올랐으니 마다하지 않 았다.
-예, 회장님.
최강욱은 유재원의 선택에 대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호불호를 유추할 수 있을 만큼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선택 그 자체를 존중한다는 의미 였다.
IMF 조기 졸업 건에 대한 이야
기와 대책은 이것으로 마무리 지었 고, 유재원은 다음 사안으로 넘어 갔다.
"그나저나 최현희 회장님은 언제 큰집에 들어가나요?"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