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권 24화
산업 전반에 걸쳐서 불황이 장기 화되고 있었다. 선진국들, 심지어 한국과 같은 나라들도 IT혁명이 진 행 중이었지만, 러시아는 따라가기 도 벅찬 상황이었다. 이는 러시아 경제의 취약한 구조 때문이었다.
러시아 경제에서 원유, 가스, 석 탄과 같은 천연자원 수출이 차지하 는 비중은 반이 넘는다. 하지만 생 산성도 떨어졌고, 게다가 사회주의 계획 경제에서 자본주의로 급격한 변화는 국민들에게 큰 혼란을 자아 냈다.
그나마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던
때보다는 경제 사정이 약간 나아졌 다.
이유는 간단했다. 유가의 상승 때문이었다. 재미있게도 IT버블 붕 괴로 인해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자 금이 자원 시장에 몰렸다. 덕분에 유가는 작년 평균보다 배럴당 5달 러 정도가 상승했는데, 이는 러시 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최고의 부자 인 유재원이 러시아를 방문한 것이 다.
그것도 러시아가 제일 취약한 IT 분야 투자를 위해서라는 목적이 분명했기에 극진하게 대우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영접을 받는 유재원은 좀 지루했다.
애초에 유재원은 의전 같은 걸 따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용기가 활주로 끝에 도달했지만, 러시아 측에서 환영 행사를 준비한 다고 기다려달라는 통에 지루하기 만 했다. 덕분에 준비가 끝났다는 말에 유재원은 신선한 공기를 빨리 마시고 싶어서 제일 먼저 문을 나 섰다.
확실히 러시아는 러시아였다.
레드카펫도 단순한 빨간색 부직 포가 아니라 진짜 화려한 문양이 들어간 카펫이었고, 군악대의 규모 도 상당했다. 그러나 진짜 서프라 이즈는 따로 있었다.
"푸틴 총리님?"
극진한 대우의 끝은 푸틴의 등장 이었다.
"유재원 회장의 러시아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오."
몇 년 만에 다시 보는 푸틴이 활 짝 웃으며 유재원을 환영했다.
유재원은 푸틴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목적지는 러시아 대통령의 상징 인 크레믈린이었다. 2000년대 이후 로는 크렘린 궁이라고 칭하는 경우 가 많았지만, 지금은 그냥 크레믈 린이었다.
크레믈린에선 당연히 러시아의 현직 대통령인 옐친과의 예방이 있 었다.
러시아에 유재원과 같은 거물 경제인이 방문하는 건 참 오랜만의 일이었고, 투자를 어떻게 해서든 유치하려고 했기에, 옐친 대통령과 의 오찬은 당연한 일정이었다.
크레믈린까지 가는 자동차는 러 시아에서 준비한 의전용 자동차였 다.
사실 유재원의 전용기 안에는 유 재원이 탈 자동차도 실려 있었지만, 푸틴의 성의 때문에 꺼내지 못했다. 푸틴이 준비한 차를 타지 않는다는 건 푸틴을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었 고, 이는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도 있었다.
더욱이 유재원이 미국 대통령처 럼 국제 테러 단체의 표적도 아니 었다. IT 업계의 라이벌 회사들, 혹 은 한국에 대한 투자를 준비했다가 백호 펀드로 인해 닭 쫓던 개 신세 가 된 일부 투자회사들이 이를 갈 고 있겠지만, 행동으로 이어질 정 도는 아니었다.
경호팀에서 과한 경호를 준비한 것 역시, 무슨 테러 위협에 대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 자체가 혼란스 러웠던 탓이다.
이동은 요란스러웠다.
유재원과 푸틴이 탄 차의 앞뒤로 경호를 위한 사이드카가 붙었고, 도로 통제를 위한 오토바이까지 붙 었다. 덕분에 공항에서 크레믈린까 지 가는 길에 단 한 번의 정차도 없이 논스톱으로 달릴 수 있었다.
"총리 되신 것 축하해요."
"후후, 유 회장 덕이오."
"에이, 제가 뭘 한 게 있다고요. 총리님의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고 옐친 대통령님과 러시아 인민들도 이를 인정해준 결과겠지요."
그렇게 요란스럽게 달리는 와중 이었지만, 차 안은 훈훈했다.
푸틴에 대한 서포트는 예전부터 단 한 번도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 지고 있었다. 덕분에 푸틴의 입에 서 유재원 덕이라는 말이 절로 나 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재원 과 푸틴은 전과 달리 통역 없이 대 화중이 었다.
푸틴이 한국어를 하는 게 아니 라, 유재원이 어느 정도 러시아어 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재원 의 입에서 온전한 발음은 아니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러시아어 가 나오자 푸틴의 얼굴이 한층 밝 아졌다.
그렇지만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푸틴의 표정은 점차 차분해졌다.
뭔가 기분이 나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유재원이었기에 표정을 숨 기지 않아도 되었던 탓이다. 현재 푸틴이 놓은 상황은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옐친의 눈에 띄어 연초에 총리에 지명되었고, 국회에서도 별다른 반 대 없이 동의를 얻었다. 단번에 러 시아의 이인자가 되었지만, 정작 러시아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최악 이었다. 게다가 총리라는 직책은 러시아에선 어중간했다.
마음 같아선 확 바꿔버리고 싶은 데, 총리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다 지 많지 않았다. 모든 권한은 대통 령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반면 대통령이 벌인 일을 수습해 야 할 사람이 바로 푸틴 본인이었 다.
"뭐, 그렇다고 합시다."
확실히 푸틴은 쿨한 사람이었다.
"하여튼 본인은 유 회장 덕을 크 게 본 사람인데, 그런 유 회장에게 보답은 못 할망정, 부담을 주게 되 었소."
무슨 말이냐 하면, 이번 러시아 IT 박람회 투자 건에 관한 이야기 였다.
사실 러시아 IT 박람회라는 걸 처음 떠올린 사람은 옐친이었다. 전 세계가 IT 혁명 중이었는데, 러 시아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원래 역사에서는 없었던 일이었 다.
그런데 유재원이 등장해 ID 그룹 으로 승승장구하는 걸 보고서 옐친 대통령이 자극을 받은 게 분명했다.
물론 이렇게 일을 벌여놓은 건
옐친이지만, 수습을 해야 하는 건 푸틴의 몫이었다.
행사를 주관하게 된 푸틴은 서방 의 많은 투자자들과 접촉했다. 기 왕 행사를 시작했으니 빈 수레로 끝나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러시아 IT 기업에 해외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 만 돌아온 건 차가운 냉대뿐이었다. 한때 미국과 경쟁했을 만큼 러시아 의 기초 기술은 뛰어났다. 하지만 응용 분야라 할 수 있는 IT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는 중이었다.
일부 보안 분야에서는 제법 성과가 있긴 했지만, 나머지 분야는 불 모지나 다름이 없었다. 한마디로 그다지 매력적인 투자처가 아니라 는 이야기다.
일부 투자자들은 러시아가 가진 천연자원에 대해 욕심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내줄 수 없는 것이 었다.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 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라 자체가 무너지지 않은 건 천연자원 덕이었 다.
효율성을 위해서 가스프롬이란 민간 기업 중심으로 러시아의 천연 자원을 재편하긴 했어도, 최대 주 주는 러시아 정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성과를 내야 하는 게 푸틴이었다. 결국, 푸틴은 꼬깃꼬깃 숨겨 놓았던 유재원이라 는 카드를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마세요. 저는 절대 손해 볼 짓은 안 하거든요."
푸틴의 말에 유재원은 고개를 끄 덕이며 답했다. 그러자 푸틴의 눈 가가 실룩거렸다.
서방의 투자자에게 많이 시달렸 던 푸틴에게는 이익이 나지 않으면 투자도 않겠다는 소리로 들렸던 탓 이다.
"저는 일찌감치 러시아의 저력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었거든요. 분명 이번 투자를 두고 뭐라 말할 사람들이 나오겠지만, 몇 년이 지 나면 땅을 치고 후회할 겁니다."
이어진 유재원의 말에 푸틴은 짧 게 오해를 했다는 걸 알았다.
급하게 표정 관리에 들어갔지만, 눈치 빠른 유재원은 이미 푸틴이 살짝 흔들렸다는 걸 읽은 후였다.
유재원은 러시아 투자에 긍정적 이었다. 물론 러시아에서 갑자기 ID 그룹에 비견될 IT 혁명이 일어 나는 일은 절대 없다고 확신했다. 대신 유재원이 보는 건 유가 폭등이었다. 1배럴에 10달러 후반, 조금 비싸지면 20달러를 살짝 넘은 지금 의 유가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절이었다.
유가는 앞으로 끊이지 않고 상승 할 것이고, 몇 년 후에는 100달러 를 훌쩍 넘을 것이다.
푸틴이 러시아의 장기 집권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유가 폭등에 기인 했다. 유가 폭등은 러시아 재정에 어마어마한 수익을 안겨줬고, 이를 통해 푸틴은 고르바초프나 옐친이 이뤄내지 못한 강한 러시아를 만들 수 있었다.
푸틴이 유재원을 부른 타이밍은 참으로 적절했다.
지금 선행 투자를 해놓는다면, 시베리아 자원의 힘으로 러시아가 부활했을 때 몇 십, 몇 백 배로 돌 려받을 수 있었다.
비단 물질적인 면만 있는 게 아 니다.
러시아 IT 박람회 준비로 푸틴이 곤란하다는 소식은 글로벌 정보 팀 장인 레빈 윌리스의 보고로 이미 알고 있었다.
어려울 때 돕는 친구가 진짜 친 구라 하지 않던가. 오늘을 계기로 푸틴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면 그 걸로 충분했다.
며칠 후.
-유재원 ID 그룹 회장, 러시아에 대규모 투자 결정-러시아 대표 포털 사이트 얀덱 스와 전자 금융 소프트웨어 개발사 메타트레이더 지분 매입, 모스크바 에 대규모 종합 쇼핑 센터 건설 결 정, 시베리아 자원 탐사와 개발에도 참여하는 토털 패키지 형 투자
-총 규모 10억 달러
유재원의 돈 보따리가 풀렸고, 러시아는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푸틴은 물론이고 일을 벌려놓고 뒷짐만 지고 있던 옐친까지도 유재 원의 스케일에 깜짝 놀랐다. 반면 월스트리트와 런던 등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부터는 무모한 투자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이었다.
유재원은 본인이 틀리지 않았음 을 증명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딱 10년만 지나봐라! 음! 아니 지, 기술 가속이 있었지?"
본인이 일으킨 IT 기술의 발전은 T터치폰을 통해 최소 5년은 빨라졌 다. 기술 가속의 효과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갈 것이고, 러시아 역시 예 외는 아니었다. 그러니 기술 가속 을 통해 러시아의 부흥도 예정보다 더 빨리 찾아올 확률은 매우 높았 다.
"5년이면 충분하지!"
그 시점을 유재원은 5년으로 봤 다.
더욱이 시베리아 자원 탐사는 유 재원의 투자에 대해 무척이나 기뻐 한 옐친 대통령이 얹어준 덤이었다. 시베리아 동부 지역에 대한 자원을 탐사하고, 탐사된 자원에 대한 개 발권을 얻었다. 이에 대해 옐친을 비롯한 러시아 수뇌부는 당첨 확률 이 희박한 복권으로 생색을 낸 거 라고 생각했다.
시베리아가 자원의 보고이긴 해 도, 모든 땅에 널려 있는 건 아니 었다. 탐사를 하는 데 드는 비용도 천문학적이었지만, 그렇게 많은 돈 을 쓰고도 성과가 나지 않은 경우 도 많았다. 특히 이번에 유재원에게 떼어준 땅은 여러 탐사 업체들 이 손을 털고 나갔던 지역이었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달랐다.
유재원의 머릿속에는 전 세계 자 원 지도가 군사지도급으로 상세하 게 들어 있었다. 당연히 이번에 받 은 시베리아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 다.
그 땅에는 매우 질 좋은 원유가 대량으로 잠들어 있었다. 이걸 가 지고 활용할 방안은 무척이나 많았 다. 단적으로 티파니가 창업한 T&U 리서치와 연계하면 시너지 효과를 크게 챙길 수 있었다. 덤으로 좁쌀 같은 마인드 때문에 티파 니를 품지 못한 제이콥이나 그를 따르는 셰브롱 사람들의 배도 매우 아프게 만들어주고 말이다.
기분 좋게 모든 일정을 마친 유 재원은 푸틴은 물론 옐친의 환대를 받으며 러시아를 떠났다.
이제 남은 건 IDDC 99.
21세기를 준비하는 행사이니만큼 전력을 다해야 준비해야 할 행사였 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