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권 7화
HxT 멤버들로서는 나쁠 게 없었 다.
요즘은 연예 기획사들이 표준 계 약서를 사용하는데, HxT멤버들이 계약했을 때만 해도 노예계약이라 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조항들이 가 득한 서류에 사인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표준 계약서로 갱신하긴 했지만, LSM 안에서 통용되던 것 은 신인 시절에 계약했던 것이었다.
드림 엔터테인먼트에서 제시한 계약서는 표준 계약서보다 훨씬 멤 버들에게 이득인 계약서였다. 변호 사를 찾아갈 것도 없이, 그냥 딱 봐도 음원, 음반, 각종 굿즈에 대한 분배 비율부터 차원이 달랐다. 게 다가 HxT 멤버들은 표절 사태로 인해 팀 해체와 강제 은퇴까지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드림 엔터테인먼트가 백지를 내밀 었어도 감지덕지하며 사인을 했을 것이다.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자리에서 HxT 멤버들과 유재원은 나란히 앉 아서 사인을 했다.
HxT멤버들이 제일 먼저였고, 다 음은 재작년에 데뷔한 3인조 여성 그룹이었다. 심지어 연습생들까지도 유재원의 이름으로 계약서를 갱신 했다.
앞으로 7년간 이들은 이제 ID 그룹과 한 식구가 되었다. 이를 기 념해서 유재원은 오랜만에 마이크 를 잡았다.
"길게 이야기하진 않겠습니다. 여러분께서 딱 하나의 조항만 지켜 주시면, 저는 여러분과 드림 엔터 테인먼트를 세계 최고로 만들어 보 이겠습니다."
세계 최고를 언급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특히 지금 시대에는 한 국의 연예인이 세계적인 인지도와 인기를 얻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유재원이라 면 같은 말이라도 전달되는 느낌이 달랐기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바로 준법이죠."
HxT 멤버들이나 이들이 기대했 던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도덕 선생님에게서나 어울리는 말 이긴 했다.
"사회인이라면 당연히 법을 지키 고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들은 연예계라는 특별한 환경에서 일하는 만큼 보통의 사회인보다 훨 씬 엄격한 요건이 적용됩니다."
이어진 유재원의 말에 아이들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이 법을 어겼고, 그게 기사를 타게 되면 일반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회적 지탄을 받습니 다. 그중에서도 최악은 마약입니다. 절대 금지입니다. 음주 운전? 만약 현 시간 이후로 음주 운전을 했다 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계약 해지 하겠습니다. 도박? 당연히 금지죠. 표절이야 입 아프죠?"
유재원은 도박을 언급할 때 삼인 조 여성 아이돌 그룹인 S.O.S 쪽을 봤다. 일부러 그런 것이지만, 자연 스럽게 고개를 돌린 터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유재원과 눈빛이 닿았던 S.O.S의 요정처럼 생긴 멤버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 다.
"앞으로 반년간은 자숙의 기간으 로 모든 외부 활동을 정지할 겁니 다. 하지만 그 시간을 멍하니 보내 고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능력 향상과 성공을 위해서 최고의 서포트를 해드릴 겁 니다. 저를 믿고 따라오시면 어느 순간 여러분은 최고가 되어 있을 겁니다."
유재원의 자신감은 대단했다. 하 지만 허세는 단 lg도 섞지 않았다.
앞으로 드림 엔터테인먼트를 통 해 선보일 시스템은 미국 연예계의 성공 공식이나 일본식 아이돌 시스 템도 아니었다. 21세기에 완벽한 성공의 신화를 쓴 K팝 시스템이었 으니 말이다.
유재원의 말이 끝나자 커다란 환 호가 쏟아졌다.
세계 최고 부자로 공인되었고, 실제 이들에게 닥쳤던 위기를 한 방에 해결해버린 장본인의 장담에 환호가 터지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 었다. 그런 이들을 보며 유재원은 속으로 명복을 빌었다.
K팝 시스템의 핵심은 광범위한 분업, 네트워크화된 팬덤도 있지만, 가장 큰 핵심은 바로 어마어마한 연습량이었으니 말이다. 신나는 노 래를 라이브로 부르며, 칼 군무를 맞추는 건 무지막지한 연습 없이는 불가능했다.
드림 엔터테인먼트에서의 스케줄 을 모두 마친 유재원은 한국에서의 마지막 일정인 밀리언 달러 챌린지 시상식장으로 이동했다.
밀리언 달러 챌린지 시상식장으 로 가는 길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은 완벽하게 일치했다.
시상식장은 바로 ID 글로벌헤드 쿼터 빌딩의 상업 층에 있는 e스포 츠 전용 경기장이었기 때문이다. 시설의 이름이 e스포츠 전용 경기 장이라 명명되어서 다른 용도로는 쓸 수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은 전혀 그렇지 않다.
무대와 객석의 구조를 보면 어떠 한 행사도 다 치러낼 수 있는 범용 적인 공간이었다. 전체 객석 규모 는 1천석, 어떠한 자리라도 무대를 향한 사각이 없고, 음향 시설도 최 고였다. 덕분에 작은 콘서트부터 규모가 있는 세미나까지, 각종 행 사가 이어졌다. 물론 전용 경기장 이니 e스포츠 경기가 없는 날에만 대관을 해주는 것이다.
집이자 행사장에 가까워오자 빌 딩 저층부를 다 덮고 있는 거대한 광고 천막이 보였다. 밀리언 달러 챌린지 시상식이라는 글자들이 반 쯤 해체된 타이포그라피로 박혀 있 었고, 그 아래엔 이번에 선정된 작 가의 이름과 작품 제목이 담겨 있 었다.
갑자기 걸린 게 아니라 드림 엔 터테인먼트에 가기 전부터 붙어 있 었던 건데, 그때는 눈에 안 보였다 가 지금에야 유재원의 눈에 들어왔 다.
이번 시상식에 선정된 사람들은 모두 다섯 명이다.
장르소설 부문에서 3명, 웹툰 부 문에서 2명이다.
김형도 작가의 괴물 초장이, 나 상균 작가의 검은 로냐프 강, 이우 혁 작가의 퇴마록이 장르소설 부문 밀리언 달러 챌린지에 당선되었다. 웹툰 부문에는 딱풀 작가의 일상다 반사, 김형환 작가의 폐인 생활이 선정되었다.
이걸 가지고 말들이 좀 많았다.
문단에서는 선정 작품에 작품성 이 하나도 없다면서 혹평을 주저하 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네티즌 들도 이에 동의하면서 일부 작품을 두고 이게 100만 달러짜리 작품의 퀄리티냐면서 동의할 수 없다는 댓 글이 많았다.
네티즌들의 혹평은 주로 웹툰에 집중되어 있다면, 문단의 비평은 장르소설에 집중되었다.
문단 관계자들은 말라 죽어버린 한국 순수소설이 밀리언 달러 챌린 지를 통해 되살아날 수도 있을 거 라는 기대를 했던 모양인데, 선정 작을 보니 죄다 아이들이나 볼법한 장르소설이었으니 실망감이 대단했 던 모양이다.
반면 유재원은 재미있으면 그만 이라는 태도였다. 덤으로 미디어 믹스로의 활용 가능성도 점쳤는데, 퇴마록의 경우엔 한국에 생소한 오 컬트를 소재로 공전의 히트를 친덕에 전생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 을 정도였다. 다만 영화화된 퀄리 티가 기대 이하인지라 홍행에 대해 선 말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 만 이제는 유재원이 개입해 자본과 기술을 지원한다면 한국형 오컬트 오락 영화의 표준이 될 확률은 매 우 높았다.
유재원은 아예 괴물 초장이나 검 은 로냐프 강까지도 영상화를 생각 하고 있었다.
미국과 한국서 빠르게 독자적인 영역을 넓혀가는 타임플릭스였다. 그 속도는 유재원의 예상보다 더 빨랐다. VOD 서비스가 이렇게 빨리 정착될 줄은 몰랐다. 그만큼 콘 텐츠 소모 속도도 빨랐다.
타임워너의 필름 라이브러리나 방송국의 인기 있던 쇼프로그램도 모두 타임플릭스에 올라왔다. 현재 방송 중인 프로그램도 속속 VOD 로 올라오고 있었고, 타임워너의 최신 영화들도 약간의 시차를 두고 올라왔는데, 이용자들의 욕구는 이 보다 훨씬 컸다.
VOD 고객센터에 모인 이용자들 의 피드백을 보면 다른 방송국의 쇼프로그램이나 다른 배급사의 영 화를 타임플릭스에서 찾는 경우가 허다했다.
유재원은 당연히 이러한 피드백 을 절대 무시하지 않았다.
자체적인 VOD 시스템을 만들 수 없는 배급사들부터 타임플릭스 에 콘텐츠 공급 계약을 협의 중이 었다. 물론 유니버설, 콜롬비아, 파 라마운트 그리고 디즈니와도 공급 계약 협의는 하고 있지만, 성사 가 능성은 낮게 보고 있었다.
이들은 엄청난 기반 시설이 필요 한 VOD 시스템도 자체적으로 만 들 수 있는 여력을 지니고 있었으 니 말이다.
하여튼 공급 계약이 잘 성사되어서 다른 회사들의 콘텐츠를 추가해 도 결국 VOD라는 한계는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콘텐츠를 공급하던 회사들이 떨어져 나가면 타임플릭 스에 타격이 클 수도 있었다.
단순한 우려가 아니라 과거에 실 제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니 필요 한 건 타임플릭스만의 오리지널 콘 텐츠였다.
괴물 초장이나, 검은 로냐프 강, 퇴마록은 잘 만들기만 하면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보편적인 인기를 끌 수 있는 이야기였다. 옴니버스 형태인 퇴마록은 제일 재미있는 에 피소드로 영화에 도전해보고, 긴호흡의 괴물 초장이와 검은 로냐프 강은 8부작, 혹은 12부작 드라마로 만들면 딱이었다.
웹툰은 지금 이대로 넥스트컴에 서 서비스하겠지만, 넥스트컴의 전 체적인 리뉴얼과 함께 주력으로 밀 어주는 서비스가 될 것이다.
"회장님, 도착했습니다."
"잠깐만요."
이번엔 김대석의 말에 바로 일어 나지 않았다. 머릿속에 떠올랐던 여러 아이디어들을 메모하기 위해 서다. 기억력이 남다른 유재원이지 만, 머릿속을 한참 뒤져보는 것과 메모를 보고 상기하는 속도의 차이 는 상당했기에 메모하는 습관을 들 이는 중이었다.
시상식은 성대하게 끝났다.
행사에 빠진 작가도 없었고, 객 석도 빈자리가 거의 없을 만큼 가 득 찼다. 작가들의 식구들은 물론 이고 팬들도 많이 왔지만, 그에 버 금갈 정도로 많은 취재진이 몰렸다. 그런데 취재진들이 집중한 건 100 만 달러의 상금과 미디어믹스 계약서를 받은 작가들이 아니었다.
취재진이 주목한 이는 바로유재 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한 달하고 며칠 남지 않은 대선에서 상당히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 이 유재원이었기 때문이다. 저번 대선에서 전명헌이 받은 득표수 중 에 유재원의 존재감이 최소 30%는 된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나오 고 있었다.
이번 대선에서 과연 유재원이 민 주당 김대중 후보를 지지할지가 요 즘 최대의 관심사였다.
-회장님! 이번 대선에 대해 한 말씀만 해주세요!
-유 회장님! 김대중 후보를 지시 하실 건가요?
기자들의 아우성에 유재원의 얼 굴에 짜증이 살짝 올라왔다.
목적이 있는 행사에 왔다면 일단 주인공에 초점을 맞춰줘야 할 것 아닌가. 오늘의 주인공은 밀리언 달러를 받은 작가님들인데, 주인공 은 뒷전에 놓고 취재도 안하면서 엄한 질문만 날리고 있었으니 말이 다.
"그것은 정식 선거 운동 기간이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오 늘은 밀리언 달러 챌린지의 첫 번 째 시상식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여기 계신 작가님들이라는 걸 상기 시켜드리고 싶네요."
유재원에게 한 소리를 먹은 다음 부터 작가들에게 플래시가 터졌다.
그 모습에 유재원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유재원 본인의 노력과 ID 그룹의 존재 그리고 한국민들의 저력이 시 너지 효과를 일으켜 IMF 체제였던 한국은 빠르게 나아지는 중이었다. 비단 경제 상황만 호전되는 게 아 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서 여러 가지 정치적 난제들이 풀리면서 역동 성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 딱 하나 거꾸로 가 는 게 있다면 바로 저널리즘이었다.
차원이 다른 유재원이지만, 아무 리 생각해봐도 한국의 저널리즘을 회복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저널리즘을 회복할 수 있는 조치 들, 이를테면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 금지 법률이나 재생자원법 으로 기업들로부터 언론이 독립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줬음에도 기 자들의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 진 게 없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보수 성향 신문사 소속 기자들은 기자 정신을 어디에다가 팔아먹었는지 몰라도 회사와 혼연 일체가 되어서 전명헌이나 유재원 을 성토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언론이 바르게 성장하라고 만들어 준 법안을 자기들을 죽이려고 만든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 기자들 때문 에 시상식에 작은 오점 하나가 생 기긴 했지만, 곧바로 이어진 만찬 은 분위기가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만찬장은 바로 유재원 본인의 펜트하우스였기 때 문이다. 작가들과 작가들의 가족들 그리고 출판사 관계자들을 합쳐 대 략 30명 정도가 초대되었다.
ID 글로벌헤드쿼터 빌딩이 완공 후 개장식을 한 날 딱 한 번 공개 되었고 이후로는 완전 비공개 상태 였는데, 오늘 행사를 위해서 두 번 째로 공개가 된 것이다.
작가들도 만찬이 있다는 건 사전 에 공지되어 알고는 있었다. 그런 데 그곳이 유재원의 펜트하우스라 는 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서야 알게 되었기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 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