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권 6화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 세력으로 뭉친 한나라당이야 민주한국당에 큰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삼당 합당 때문에 현실과 타협한 민주화 운동권이라는 손가락질을 이미 배 부르게 먹었고,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으로 타협의 대가는 치렀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반면 구 민정당 세력이 모인 민 주한국당은 한나라당에 이를 갈고 있었다. 그들의 가장 큰 구심점인 전두환은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의해 사형이 집행되었고, 노태우는 전 대통령 자격을 상실했다. 게다가 비자금으로 열심히 모아둔 돈도 다추징당해서 완전 개털이 되었다.
이제 남은 건 박정희의 후광뿐이 었다.
사실 그 후광의 존재감도 제법 거대하긴 했다. 역사의 평가가 어 떻든, 산업화 세대에겐 신화였으니 말이다. 덕분에 대구, 경북 지역은 민주한국당의 지지세가 확실했다.
문제는 자칭 보수 정통 세력이 한나라당과 민주한국당만으로 나뉜 상태에서는 다시 정권을 가져올 수 없다는 위기감이었다.
회색인 통일국민당과 손을 잡는 게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따듯한 자리를 기가 막히게 찾는 통일국민당이 이번 대선에서 는 민주당을 밀어주겠다는 표시를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겠 다는 것 자체가 가장 강력한 민주 당 지지 신호였으니 말이다. 민주 당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연정 을 통해 여당 노릇을 할 게 분명해 보였다. 게다가 이번 대선부터 연 임할 수 있었으니, 이러한 메커니 즘이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것이었 다.
민주한국당 의원들 입장에서는 미치는 일이었다.
그동안 꾸준히 여당 의원을 하다 가 전명헌 대에 이르러 야당 의원 을 했는데, 국회의원이라고 해서 다 같은 국회의원이 아니라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행정부 관료들의 응대부터, 기부 금 혹은 뒤에서 들어오는 돈의 액 수까지, 차원이 다르게 쪼그라들었 다. 여당 의원 때는 햇볕이 잘 드 는 양지였다면 지금은 혹한의 겨울 왕국이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 는 판단이 서자 곧장 한나라당과의 합당이란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 다는 이야기다.
김대석이야 상종 못할 작자들이 라며 머릴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유 재원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보 았다.
-긴급 대선 후보 여론 조사, 1위 김대중 48.6%! 2위 이회창 30.1%!
여론 조사를 보니 한나라당의 이 회창 후보 지지율도 30%를 넘었 다.
김대중 후보가 전명헌 정부에서 능력을 증명하긴 했는데, 보수적인 지역에서는 아직도 빨갱이 논란이 있었다. 게다가 전명헌의 갑작스러 운 서거로 인해 치러지는 선거인데, 김대중 후보의 나이는 국민들이 보 기에 위험하다고 느껴질 만큼 많았이런 상황에서 한나라당과 민주 한국당과의 합당 가능성은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 상승을 이끌었다.
유재원은 다음 기사를 보았다.
-전재근, 이익치 미래 증권 회장 을 미래 산업 개발로 파격 전보 조 치-전재구, 김재수 미래 전자 사 장, 경영 실적 미달의 이유로 해임-왕자의 난에 휩쓸린 가신들, 칼 바람은 이제 시작-미래 그룹 파편화는 이제 시작 일 뿐 대선 기사 다음으로 네티즌이 많 이 보는 건 미래 그룹에 대한 기사 였다.
이익치, 김재수 등등 미래 그룹 의 사장단 중에서도 전명헌의 가신 이라 불릴 수 있는 이들의 자리가 옮겨지는 중이었다. 김재수처럼 아 예 해고를 당하는 사람도 많았다.
전명헌이 어떤 식으로 삼형제에 게 그룹을 분할했는지는 유재원도 잘 모른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 실히 알고 있다. 유산 분배에 만족 하는 사람은 없고, 하나라도 더 빼 앗기 위해서 온갖 추태를 연출할 거라는 것을 말이다.
그걸 가지고 언론에서는 왕자의 난이란 타이틀까지 지어줬지만, 유 재원이 보기엔 금수저들의 아귀다 툼이 었다.
유재원은 미래 그룹 관련 기사를 모두 보고 다음으로 넘어가려는데, 로딩 중이라는 문구가 대문짝만하 게 떴다.
해가 지날수록 인터넷 화면은 화 려해졌다. 고해상도 이미지는 물론 이고 HTML 2.0을 통한 다이나믹 한 웹페이지 구성까지 추가되었다. 그 결과 웹페이지의 용량이 기하급 수적으로 상승했다.
2G 이동 통신으로는 한계에 온 것이다.
'넥스트컴도 이제 제2의 혁신이 필요할 때가 왔네.'
로딩 중이라는 문구 하나에 유재 원은 지금 넥스트컴에 무엇이 필요 한지 바로 파악했다.
바로 모바일 전용 페이지다. 지 금은 컴퓨터로 접속한 것이나 휴대 폰으로 접속한 것이나 똑같은 화면 을 뿌려준다. 모바일 전용 페이지 를 만들어서 용량과 속도에 최적화 를 해두면 조만간 대중화될 모바일 분야도 선점할 수 있다.
'그걸로는 좀 부족해.'
언제나 한 발 더 나가는 걸 좋아 하는 유재원은 단순한 모바일 전용 페이지로 만족하지 않았다. 넥스트 컴에도 뭔가 획기적인 서비스를 추 가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도 그럴 것이 현재 세계 각국에서 는 자국에 맞춘 포털 사이트가 속 속 등장하고 있었다.
미국이라면 야후와 라이코스가 무섭게 따라 붙었고, 일본은 야후 재팬이 있었다. 한국에서도 다움과 네티앙라는 후발 주자가 나타나서 파격적인 서비스를 시작하는 중이 었다.
이를테면 개인에게 무료로 제공 하는 인터넷 공간을 1기가바이트씩 준다거나, 무제한 용량의 이메일 서비스를 기본으로 했다.
넥스트컴이 최초의 포탈 사이트 였고, 완벽한 완성도로 전 세계에 서 압도적인 1등에 랭크되어 있었 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후발 주자 들에게 역전을 당할 수도 있었다.
'뭐가 좋을까?'
유재원의 머릿속에서 다양한 미 래지향적인 서비스들이 떠올랐다. 좋은 것들이 하도 많아서 선뜻 고 르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때, 고민을 덜어준 건 김대석 의 목소리였다.
"회장님, 도착했습니다."
목적지인 LSM 엔터테인먼트에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차에서 내렸을 때, 처음 보이는 모습은 LSM 엔터테인먼트라는 간 판이 내려가는 모습이었다.
LSM 엔터테인먼트란 간판이 떨 어진 자리에 붙이기 위해 도로 한 쪽에 모셔놓은 것은 드림 엔터테 인먼트 간판이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크롬을 이용 해 커다랗게 글자를 만들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웠다. 역 시 돈을 들인 티가 여기서 팍팍 났 다. 간판 제작에만 들어간 돈이 거 의 1억 원이라 했으니 말이다.
드림이라는 이름은 당연히 ID 그 룹이란 이름 중에 D에서 따온 것 이었다.
엔터테인먼트 회사 이름으로는 딱이었다. 스타가 되기 위에 연예 계에 뛰어든 이들의 꿈을 상징하기 도 하고, 스타들을 보면서 꿈을 품 는 이들을 상징하기도 하니 말이다. 덕분에 유재원이 LSM 엔터테인먼 트 인수하고 나서 드림이라고 이름 을 지었을 때, 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네이밍 센스가 부족 한 유재원인데도 이번엔 적절한 이 름을 지은 것이다.
곧이어 크롬으로 만든 드림 엔터 테인먼트의 간판이 크레인에 걸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작업자 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조심조심!"
"이거 니 몸값보다 비싼 거다!"
이뿐만이 아니라 흠?이라도 생기 면 인생 저당 잡힌다느니 하는 루 머까지 난무하는 가운데, 드림 엔 터테인먼트 간판은 잘 올라갔다.
원래는 성대한 개업식과 함께 간판을 베일로 가려놨다가 걷는 행사 도 했는데, 드림 엔터테인먼트는 LSM 엔터테인먼트의 인수를 통해 만들어진 업체라 그런 이벤트는 준 비되지 않았다.
간판이 올라가는 모습을 잠깐 보 던 유재원은 김대석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둘, 셋!"
"안녕하세요! HxT입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유재원을 반긴 건 HxT의 단체 인사였다. 유 재원과 동갑인 멤버가 셋에 나머지 둘은 2년차에 불과한 또래였다. 그 런데도 HxT 멤버들은 유재원이 들 어서자마자 정식으로 인사부터 했 다.
"안녕하세요, 유재원입니다."
유재원도 바로 고개를 숙여서 인 사를 받았다.
그리고서 HxT 멤버들의 얼굴을 보는데 시켜서 억지로 하는 티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 는 게, RATM과의 손해배상 소송으로 인해 소속사가 부도가 나버렸 고 사장을 비롯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모두 도망을 가버린 상황이 었다.
이번 앨범으로 그동안 뿌려둔 인 기의 최정점에 올라 이제 겨우 빛 을 보려던 찰나였는데, 모든 게 신 기루처럼 사라지는 상황이었다.
LSM의 소속 연예인들 그리고 연습생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간이 좀 지나면 나아지겠지 생각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HxT에 광고를 주었던 광고주들이 불미스 러운 일에 연루되어 이미지가 훼손 됐다고 광고 계약을 파기했다.
계약 파기만 해줘도 다행인데, 이미지 훼손 때문에 손해를 봤다고 소송을 건다는 회사까지 나오면서 그야말로 패닉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들에게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준 건 ID 그룹의 인 수였다.
법정 관리 중이었던 LSM은 인 수자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그냥 해체 수순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불과 1년 전 LSM 엔터테인먼트 의 위상을 보면 절대 상상할 수 없 었던 모습이었다. HxT의 인기 폭 발과 함께 소속 연예인들도 다들잘되어서 연예 기획사 중에 제일 앞선 자리에 있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인수 의향을 보이는 회사 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RATM에 물어줘야 할 배상금의 액수를 보고서는 두 손을 저었다.
그러다가 유재원이 나타났고, LSM은 순식간에 인수되었다. 다른 이들처럼 간만 보다가 사라지는 일 은 없었다.
더구나 가장 큰 문제였던 RATM과의 손해배상 문제도 깔끔 하게 풀었다.
거액의 손해배상금을 일시에 지급하는 대신에, 할인을 크게 받는 빅딜이 타결된 것이다. RATM 멤 버들은 지긋지긋한 표절에 대해 확 실한 종지부를 찍고 싶었던 것일 뿐, 소속사까지 망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배상금을 꼭 받는 판례를 만들어서, 자신들의 곡에 대한 표 절 의도를 완전히 박멸하겠다는 의 지는 확고했다.
유재원도 바라는 바였다.
그렇기에 LSM 을 인수하면서 RATM에 대한 배상 절차에도 즉 각 들어갔다. 교섭에 들어간 지 며 칠 지나지 않아서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놀랍게도 RATM 측에서 는 100억 대에 이르렀던 배상금 중 에 반을 깎아줬다는 것이다.
유재원에겐 너무도 반가운 소식 이었다.
마치 길을 가다가 50억 원을 주 운 느낌이라고 할까. 덕분에 유재 원은 넥스트 뮤직에 RATM 특별 페이지를 만들고 대대적인 할인 행 사로 되갚아줬다. 물론 할인 비용 은 유재원이 부담하는 것으로 말이 다.
"유 회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한상수입니다."
곧이어 수염이 덥수룩한 사람 하 나가 나왔다.
이승만 사장이 도망가고 프로듀 서였던 박영진도 사라지고 난 다음, 유일하게 회사에 남아서 뒤처리를 담당하고 있던 간부급 인물이었다. HxT의 데뷔를 함께 했던 로드 매 니저였는데, 연차가 쌓이면서 능력 을 인정받아 간부로 승진한 케이스 였다.
그러다가 표절 사태가 터지고서 나서는 유일하게 남은 책임질 사람 이 되었다. 곧이어 연습생들과도 인사를 했다.
통성명을 마친 유재원은 곧장 본 론으로 들어갔다. 바로 HxT 멤버 들과의 재계약이었다. LSM의 모든 자산을 인수했으니 HxT와의 계약 도 그대로 승계되는 게 맞지만, 유 재원은 새것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멤버마 다 계약 기존의 계약은 파기하고 새로운 전속 계약을 맺고자 했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