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권 1화
"회장님!"
오후가 되었을 때, 김대석이 유 재원을 찾았다.
"김 비서실장이 찾아왔습니다."
김 비서실장?
유재원은 다양한 비서실장을 알 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김 비서실 장이라 할 수 있는 건 전명헌의 오 른팔인 김광일이었다. 거실로 나가 보니 진짜 검은 양복 차림의 김광 일이 그곳에 서 있었다.
"어르신께서 변고가 생기면 회장 님께 보내라 하셨던 물건입니다."
김광일은 보자기에 싸인 작은 상 자를 내밀었다. 그리곤 유재원의 부모님이 준비한 다과도 마다하고 바로 떠났다. 장례의원으로서 오래 머물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김대석과 부모님이 김광일을 배 웅하는 사이에 유재원은 보자기를 들고 본인의 방으로 돌아왔고 문을 잠갔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보자기 를 풀었다.
안에 든 것을 보자 눈물이 살짝 났다. 작은 목합 상자와 편지봉투 하나가 있었는데, 편지봉투에는 손 자 같은 재원이에게라는 글자가 적 혀 있었던 탓이다.
봉투 안에는 몇 줄 안 되는 할아 버지의 말씀이 담겨 있었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꿈을 꾸 는 것보다 더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모두 다 재원이, 네가 만들어준 시 간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마음 같아선 내 기업이라도 주고 싶지만, 세계를 경영하는 재원이에겐 도움 은커녕 발목만 잡을 거다. 게다가 못난 내 자식 놈들도 난리겠지. 보 나마나 내가 가고 나면 하나라도 더 먹겠다고 싸울 게 뻔하구나. 만 약 내 자식 놈들이 미래라는 이름 에 먹칠을 한다면, 재원이 너에게 처분을 맡기마. 김광일이에게도 말은 해놓았다.
-노파심에 조언 하나만 하마. 권 한이 허락한 만큼 힘차게 휘둘러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무조건 잡아 라. 일말의 여지조차 주지 않는 것 이야말로 승리를 가져다주는 법이 다.
이 대목에서 유재원은 울컥했다.
김창완 변호사를 공수처장에 올 리고, 총리를 바꾸고 했던 모습은 단지 본인의 뒤를 준비하는 것뿐만 이 아니라, 유재원에게 본인의 신 념을 전해주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마지막으로 작은 성의를 준비했 다. 네 취향과는 거리가 먼 것일 수도 있지만, 아직은 유용하단다.
-네 마음에 품고 있는 원대한 꿈 이 이뤄지길 기원하마.
전명헌의 편지는 그것으로 끝이 었다. 글씨 하나를 읽을 때마다 코 끝이 시큰해지는 유재원이었다. 게 다가 전명헌은 유재원이 품고 있는 마스터플랜에 대해서도 어렴풋 짐 작을 하고 있는 것처럼 편지를 쓰 셨다.
역시 연륜이라는 건 무시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렇게 한참 감정을 추스르던 유 재원은 편지를 소중하게 다시 밀봉 했다. 그리고서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세 개의 물품이 있 었다. 손때가 묻은 수첩이 제일 먼 저 눈에 들어왔다. 다음은 돼지 금 고라는 이상한 이름의 명함 한 장 이다. 일수니 긴급대출이니 하는 말이 큼지막하게 찍혀 있었기에 전 명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마지막 물건은 허름한 나무 도장이 다.
이렇게 어색한 조합의 세 개의 물건이 상자 안에 있었다.
"아주 신기한 조합이네."
유재원은 신기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감이 잡히지 않는 조합이었으니 말이다. 유재원은 일단 가장 생뚱 맞게 보이는 돼지 금고 명함을 집 어 들어 살펴보았다.
명함 뒤편에 보니 주소에 종로 귀금속 거리 골목의 특정 건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카카오맵 같은 어플리케이션이 있으면 바로 주소 를 찍어서 로드맵을 봤을 텐데, 지 금은 전자 지도도 없는 상태라서 대충 어림잡아 가늠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특이하게 누가 낙서를 해놓은 것인지 몰라도 206이라는 숫자는 볼펜으로 따로 적혀 있었다.
도장도 특이했다.
인주를 묻혀 찍는 면을 보면 이 름이 각인되어 있는 게 보통이다. 도장이라는 게 사인을 대신하는 물 건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 낡은 도 장에는 이름이 없었다. 4자리 숫자 가 매우 정교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6735였다.
유재원 본인의 생일부터 전명헌 할아버지의 다양한 개인 정보 등등 을 아무리 조합해 봐도 특별한 의미 같은 건 나오지 않는 숫자였다.
"수첩엔 뭔가 좀 있겠지."
마지막으로 유재원은 수첩을 들 었다.
수첩은 손바닥만 한 사이즈였다. 셔츠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로 작은 물건이었고, 두께는 살짝 있는 편 이었다. 미래 건설 로고가 박혀 있 었는데, CI 변경 전의 로고였으니 이 수첩의 나이가 최소 14살은 넘 는 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유재원은 곧장 수첩의 첫 장을 펼쳤다.
"아."
수첩 첫 장을 보고 무슨 내용인 지 대충 짐작이 갔다. 짐작을 확신 으로 바꾸기 위해서 유재원은 수첩 을 빠르게 넘기면서 전체 내용도 훑었다.
"역시 짐작이 맞았네."
수첩에 담긴 내용은 장부였다.
역대 장차관들, 판검사들, 방송인 이나 이름 있는 교수들, 그리고 여 의도 터줏대감 노릇을 하는 다선 국회의원들의 이름들이 총 망라되 어 있었다. 세심하게 관리가 된 듯 뒷장으로 가면 신인들이 많았고, 초반에는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도 있었다. 일부는 이름에 줄이 죽죽 그어져 있었는데, 모두 고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그러한 이름 옆에는 날짜와 숫자 그리고 특별한 기호가 붙어 있었다.
"떡값을 준 액수와 날짜, 전달 방법인가보네."
아무래도 이건 전명헌 할아버지 가 직접 떡값을 줘가며 관리한 인 사들 목록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가 유재원은 특이한 걸 발견했다.
수첩의 거의 마지막에는 국회의 원들 이름만 가득했다. 아예 페이 지를 따로 할애해서 통일국민당 의원들, 민주당 의원들 그리고 야당 의원들 이렇게 카테고리를 구분해 놨다. 그리고 숫자도 전에 보던 거 랑은 좀 달랐다.
첫 장에 나왔던 이름에 붙은 숫 자들은 백 단위였다. 중간쯤에 많 이 나왔던 검사들 이름은 천 단위 였다. 그런데 거의 마지막에 나온 국회의원들은 I에서 10 사이에 있 었다.
조금 고민해보던 유재원은 정답 이 보였다.
"앞에건 만 원 단위고, 국회의원 은 억 단위구나."
첫 장에 쓰여 있는 건 적어도 15 년 전 시점이다. 그러니 몇 백만 원도 제법 큰돈이었을 것이다. 그 러다 시간이 지나 인플레이션이 생 기면서 떡값의 액수도 커졌던 모양 이다.
"흐음."
확실히 이 수첩은 폭탄이었다.
떡값이라고 아무리 포장해도 뇌 물은 뇌물이었으니 말이다. 전혀 뇌물을 받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의 이름도 있을 정도니, 이걸 공개하 면 그 파급력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할아버지가 남긴 말씀의 의미는 그게 아니겠지."
할아버지는 움켜쥘 수 있는 건 잡으라고 했다.
이 수첩은 할아버지의 방식으로 사회 권력을 움켜쥔 것이었다. 덕 분에 통일국민당은 물론 연정 중인 민주당까지도, 할아버지가 말 한마 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진짜 숨은 비결이기도 했다.
"명함과 도장은 뭔지 모르겠네."
수첩을 내려놓은 유재원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인터넷 검색을 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21세기에는 대 출 광고가 인터넷을 다 덮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 었다. 돼지금고라는 검색어에 몇 개의 결과가 나오긴 했는데, 이름 만 비슷했지 주소지를 보면 다른 곳이었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기에, 유재원은 ID톡을 열고 정보 팀장을 소환했다.
미국에 있는 레빈 윌리스 팀장이 아니라, 한국 법인의 안종철 팀장 이었다.
"아, 이거 사설 금고네요."
한달음에 유재원의 고향집으로 찾아온 안종철은 유재원이 내민 명 함을 보고 딱 알아봤다. 유재원에 게 등용되기 전에 여러 언더그라운 드를 전전했던 안종철은 매우 익숙 하다는 듯 눈빛을 반짝였다.
"사설 금고요? 은행처럼 돈을 맡 아준다는 거예요?"
"돈뿐만이 아닙니다. 온갖 귀중 품부터 잡동사니까지 다 맡아주는 곳이죠. 심지어 사람도 보관해줍니 다."
안종철의 말에 유재원은 뭔가 그려지는 게 있었다.
아직은 나오지 않은 영화가 있었 다. '올드보이'라는 영화였다. 한국 이 낳은 세계적인 감독 박찬욱이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였 다. 2003년에 나오는 것이니 앞으 로 4년은 기다려야 볼 수 있다.
영화 올드보이에 등장하는 핵심 적인 장치가 바로 사설 감옥이었다. 영화의 주인공은 영문도 모르고 10 년이 넘는 세월을 사설 감옥에 갇 혀 있다가 갑자기 풀려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런 사설 감옥이 실제로 존재하 는 서비스였다는 걸 유재원은 이제야 처음 알았다. 당연히 커다란 궁 금중이 뒤를 따랐다.
"지금 가서 볼 수 있을까요?"
"24시간 영업하는 곳이니 문제없 습니다."
"그럼, 바로 가죠!"
안종철 팀장의 말에 그것으로 유 재원의 오후 일정이 정해졌다.
"그런데, 거기 가면 회장님 경호 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예? 왜요?"
이유인즉슨, 유재원이 이동하는 데 동행하는 사람만 최소 10명이 넘는다. 항상 뒤를 따르는 김대석 은 기본이고 보강된 경호원만 8명 이니 말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일시에 그 동네(?)에 들어서면 경 계가 강화되고 영업도 중단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입장할 수 있는 사 람은 2명이 최대란다.
안종철 팀장의 말에 유재원은 살 짝 고민이 되었다.
"안 됩니다."
그 모습에 뒤에서 가만히 이야기 를 듣고 있던 김대석이 다짜고짜 아니라고 말했다.
"응? 뭐가요?"
"경호원 없이 가시는 건 절대 반 대입니다."
역시 김대석이다.
유재원과 같이 다닌 지 이제 10 년이 넘었다. 덕분에 김대석은 유 재원의 표정만 보고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아보는 단계에 이르 렀다.
실제로 유재원은 안종철이 경호 원을 대동하고 그곳에 가는 것이 힘들다고 하니, 그럼 둘이서 가는 건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일 어나는 중이었다.
"할아버지의 유언과 유품이에요.
그렇게 위험한 곳이면 아예 넣어 놓지도 않으셨겠죠."
안전이 최고라는 건 유재원 본인 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얻은 두 번째 기회란 말 인가. 게다가 전생에서부터 만든 마스터플랜은 계획보다 120% 이상 으로 성공 중이었다. 나쁜 게 하나 있다면 전명헌이 이렇게나 일찍 세 상과 작별할 줄은 몰랐을 뿐이다.
"음, 그것은."
김대석도 전명헌 이름 석 자가 나오자 순간 멈칫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가까운 거리에서 대기하고 계세요. 만약 안 에서 일이 발생하면 티파니폰으로 신호를 보낼게요."
"전파 방해가 있을 수도 있습니 다."
유재원의 말에 김대석이 항변했 다. 하지만 설득력이 없었다.
무슨 전쟁을 치르는 것도 아니 고, 사설 금고를 운영하는 조폭이 전파 방해씩이나 한단 말인가.
"비서실장님, 그건 아닙니다. 제 가 몇 년 전 심부름 때문에 한 번 가봤지만, 안에서 전화도 쓸 수 있 었습니다."
안종철도 말을 보탰다.
"그럼, 바로 가죠."
그걸로 유재원의 다음 스케줄은 정해졌다.
덕진리 집을 출발하고, 1시간 30 분 정도가 지났을 때.
유재원은 안종철과 함께 종로 귀 금속 거리 뒤쪽 골목으로 들어섰다. 약속에 따라 경호원과 김대석은 돼 지금고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대기하고, 유재원은 안종철 팀장과 함 께 돼지금고로 이동했다.
건물은 허름했다.
70년대 지어진 것처럼 외벽을 타 일로 마감한 3층짜리 건물이었다. 게다가 건물 1층에 붙은 간판은 귀 금속 공방이었다. 금반지나 금두꺼 비를 만들어서 귀금속 거리에 공급 하는 작업소 같은 느낌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진짜 공방이 나왔다. 명함만 보고 왔다간 길을 잘못 든 것처럼 착각할 만한 모습 이었다.
"3층입니다."
다행히 안종철은 길을 잘 알았 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