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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489화 (489/1,007)
  • 24권 23화

    며칠이 지났다.

    개헌안 표결이 이제는 딱 하루가 남은 시점이었다.

    국회는 물론 한국 전체까지도 혼 돈의 도가니탕이었다. 일단 여당에 서는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붙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표결을 늦추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당연히 야당에서 도 반대였다. 전명헌 대통령이 쓰 러진 것은 국가 안보에 큰일이지만, 전명헌 정부의 개헌안이 이대로 폐 기되면 야당에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뒤로 미루는 것도 어려운것이, 정부가 개헌안을 발의하면 국회는 이를 심사하고 표결해야 한 다는 기안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 다. 야당 인사들은 전명헌이 쓰러 진 것에 대해 대놓고 웃진 못해도, 마음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쉴 수 있었다.

    반면 대한 일보도 웃음기를 감추 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전명헌 정부의 대한 일보 죽이기는 완전히 노골적 이었다.

    개헌안에 담긴 친일파 청산 조항 이나 대한 일보 사주 가문의 수많 은 혐의 수사와 대단위 세무조사, 그리고 자원 재생법까지.

    특히 자원 재생법의 경우엔 종이 신문을 발행하는 비용이 폭등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다. 법조문처럼 재 활용이 잘 이뤄지면 대한 일보의 부담은 없었다. 하지만 찍어놓고 배달도 없이 그냥 재활용 회사로 직행하는 분량은 오로지 대한 일보 의 손실이었다.

    이러한 가짜 발행 부수를 줄여야 손실이 생기지 않는데, 그렇게 하 면 발행 부수 200만도 무너져버리 니 그럴 수가 없었다. 전성기 시절 에는 하루 찍어내는 신문이 300만 부도 넘었는데, 200만으로 무너진것은 몇 년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 유료 구독자는 100 만 후반 대였으니 대한 일보의 영 향력 약화는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대한 일보는 전명헌이 쓰러진 것에 대해 대놓고 좋아할 수가 없었다.

    전명헌 대통령이 쓰러진 날에 쾌 유를 빌기 위해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 했다. 더욱이 다른 나라에서도 전 명헌의 쾌유를 성명들이 쏟아졌다. 한국의 최우선 동맹국인 미국에서 도 클린턴 대통령의 명의로 성명이 나왔고, 한국의 우방국들에서도 마찬가지 였다.

    심지어 북한의 김정일도 쾌유를 빌었다. 그러면서 금강산에서 난 산삼이라는 것을 보내오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과웅보니 하는 식으로 펜을 놀렸다가는 대한 일보 본사 건물이 불바다가 될 판이었다.

    그저 하루라도 빨리 개헌안 표결 이 이뤄지고, 부결되어서 폐기되는 게 최고였다.

    물론 개헌안을 발의하는 건 다음 번 정기국회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개헌안 폐 기는 곧 개헌 동력의 상실이니 다시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일은 쉽 지 않은 일이니 말이다.

    대한 일보를 비롯한 극우 세력들 은 시계만 바라보면서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회장님!"

    잠깐 잠이 들었던 유재원은 김대 석이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온 몸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났다. 전명헌이 입원한 VIP 병동에서 지 낸 지가 며칠은 되었지만, 아직도 잠을 자는 자리는 익숙해지지 않았 다.

    VIP 병실인 만큼 간병을 위한 가족들의 공간도 호텔처럼 잘 꾸며 놓았다. 하지만 유재원에겐 여전히 낯선 잠자리였다.

    "대통령님께서 곧 의식을 차리실 거라고 합니다."

    이어진 김대석의 말에 유재원은 잠이 확 깼다.

    깨어나셨다니, 이보다 반가운 소 리는 없었다. 의료진들은 쾌유의 가능성을 매우 낮게 보았고, 이대 로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온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청와대는 이미 김대중 총리가 대 통령 권한 대행이 되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유재원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전명헌이 있는 병실로 이동했다. 그러자 확실히 전과는 달라진 분위 기가 있었다. 경호실 소속 대원들 의 눈빛도 한층 날카로워졌고, 매 일같이 출입하는 의료진에 대한 검 색도 한층 강화되었다.

    유재원이나 전명헌의 가족들이라 고 예외는 없었다.

    그렇게 보안 검색을 다시 받고서 들어간 병실에서 전명헌을 볼 수 있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더욱 수 척해진 모습이었다. 달라진 건 뇌 파를 보여주는 모니터링 기계였다. 예전엔 잠을 자는 것처럼 잠잠한 상태였다면, 지금은 얕은 잠을 자 는 것처럼 격하게 움직였다.

    "아버지!"

    전재준은 아예 병실 안으로 들어 오면서 전명헌을 크게 불렀다. 그 러다 모두의 눈총을 받고 깨갱하면 서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깨어 났다는 식으로 잘못 전달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몇 분 지났을까.

    "으음."

    대기 중이던 주치의의 눈빛이 매 서워졌다. 그리고 그때, 전명헌의 눈꺼풀이 움찔거리는 걸 유재원은 직접 볼 수 있었다.

    "어어!"

    이번엔 전재구였다. 언제나 무게 감을 잃지 않은 무거운 성격이지만, 이번만큼은 전재구도 절로 말이 터 졌다.

    "자중하세요! 주의사항 다 잊으 셨습니까?"

    주치의가 낮고 강하게 말하자 전 재구도 움찔하면서 물러났다. 전명 헌의 주치의도 이미 환갑을 넘으신 나이였기도 했고, 한국 의료계 최 고 권위자이기도 했다. 더욱이 전 명헌 치료에 관한 일이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소란스 럽게 하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건 간단한 일에 불과했다.

    가장 큰 문제는 뇌출혈인 전명헌 의 뇌수술은 성공을 장담할 수 없 었다는 데 있다.

    두개골을 열어서 뇌 속의 찢어진 혈관을 찾아 상처 부위를 잘 봉인 하긴 했다. 문제는 찢어진 혈관을 통해 유출된 피였다. 현대 의학으 로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빼내긴 했지만, 미처 제거하지 못한 것들 이 남아 다른 혈관들을 막을 가능 성이 컸다. 또한, 뇌출혈로 인해 뇌 에 피가 골고루 돌지 못해 데미지 를 받은 부위가 얼마나 될지는 아 무도 모른다.

    뇌에 손상이 생겨서 각종 장애가 오는 건 필연적이라고 한다. 몸에 마비가 올 수도 있고, 기억 능력이 나 언어능력에 영구적인 손상이 생길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아예 뇌기능이 회복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말인 즉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 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지금 깨 어나고 있는 전명헌의 상태를 살피 는 게 제일 중요했다.

    그렇게 다들 마음을 졸이고 있을 때, 전명헌의 손끝이 움직였다. 깨 어나고 있다는 완벽한 신호였다.

    다들 헉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죽였다.

    그리고서 잠시 후, 전명헌의 눈 이 떠졌다. 초점을 잡지 못해 몇 번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방안을 둘러보았다. 낯선 천장과 본인을 둘러싸고 있는 의료진과 가족들 그 리고 유재원을 보고서 전명헌의 눈빛은 크게 흔들렸다.

    "대통령님, 저를 알아보시겠습니 까'?"

    가장 먼저 전명헌에게 말을 건 사람은 주치의였다. 그러자 전명헌 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의사를 표시했다. 그 모습에 의료진의 표 정이 확 밝아졌다.

    w O으"

    ?"

    司".

    전명헌은 단순히 고개를 끄덕이 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뭔가 말을 하려고 입까지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며칠간 의식을 잃고 쓰러진 상태로 있었던지라 입이 잘 움직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유재원에겐 언어 기능에는 문제 가 있나 하는 걱정이 막 들 때, 전 명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개…… 개, 개헌은?"

    기력이 매우 떨어진 듯 힘이 없 었지만, 발음은 매우 정확한 목소 리였다. 유재원은 속으로 혀를 내 둘렀다. 역시 전명헌은 전명헌이구 나 싶었다. 뇌출혈로 쓰러지고서 며칠은 의식을 찾지 못했다.

    상황이 최악이었으면 다신 만나 볼 수 없었을 만큼 위중한 상태였 다. 고령의 나이에 의식불명 속에서 위험한 뇌수술까지 받고 천신만 고 끝에 깨어났다. 그런데 처음 하 는 말이 개헌의 진행 상황을 물어 보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명헌이 의 식을 차렸다는 소식이 긴급 속보로 나가는 중이었다. 후속 보도로 개 헌 상황을 챙기는 전명헌에 대한 물음도 곧장 전파를 타고 한국 구 석구석에 전해졌다. 전명헌의 쾌유 를 빌며 모였던 전국의 집회가 개 헌 찬성을 외치는 집회로 변환되기 까지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개헌안,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 과-찬성 243표 반대 45표, 기권 12표다음 날, 석간신문은 대문짝만하 게 전명헌 정부의 개헌안이 국회 문턱을 넘었다는 걸 1면에 실었다. 어떤 신문의 경우에는 2면부터 몇 장의 지면을 할애해서 개헌안 전문 을 담기도 했다. 당연한 이야기지 만 이제 와서 뒷북을 치는 것이다.

    전명헌 정부에서 개헌안을 가지 고 홍보전을 할 때는 대부분의 신문들은 이를 축소 보도하거나 외면 하기도 했다. 극우 성향 신문사들 이야 당연했고, 좌파적인 성향의 신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재벌 출신인 전명헌이 추진하는 개헌안이니 색안경을 끼 고 보는 것이었다.

    전명헌이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개헌안은 부결되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깨어 난 전명헌이 '개헌은?'이라고 한마 디를 물으니 온 나라가 뒤집어졌다.

    이런데도 개헌안이 부결된다?

    그러면 야당 당사는 불타올랐을 것이다. 여당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렇기에 여당에서도 이탈표가 나 왔다는 식의 음해를 피하기 위해서 휴대폰 카메라로 본인이 투표용지 를 찍고 투표하기로 결의했을 정도 였다. 티파니폰에 기본으로 달려 나온 카메라 모듈은 이제는 휴대폰 의 표준이 되었다.

    최근에 나오는 모델은 저화질이 긴 해도 동영상 촬영까지 될 정도 로 발전했다. 국회의원들은 이러한 최신 카메라가 달린 휴대폰을 본회 의장에 가지고 들어가서 각자 증거 를 만들어 놓기로 약속할 정도로 만반의 준비를 했다.

    반면 야당 측에서는 뭔가 방향을 잡아줘야 할 사람이 없었다.

    누가 나서서 본인이 책임지겠으 니, 이번 개헌안을 반대해야 한다 고 했으면 상황이 좀 달라졌을 것 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 누구도 총 대를 메지 않았다. 관심이 고프면 스스로 논란이라도 만들어내는 정 치인들이 좀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라는 걸 느낄 만큼 위기감은 대단했다.

    결국, 개헌안 표결은 신문에 난 것처럼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 었고, 국민투표가 결정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었지만, 국민투표 는 해보나 마나였다.

    전국민 대상으로 실시된 개헌안 찬반 여론 조사에서, 찬성 측은 전 명헌에 대한 지지율보다 더 높은 비율을 자랑했으니 말이다.

    안타까운 일은 개헌안 국회 통과 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할 수 없었 다는 점이다.

    전명헌이 의식을 차리긴 했지만, 몸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치의는 전명헌의 가족 들 그리고 유재원에게 마음의 준비 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1998년 12월 17일은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한 날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한국 역사의 한 페이지에 영원히 기억될 날이 될 것이다. 바로 10차 개헌안의 국민 투표가 통과된 날로 말이다.

    딱 한 달 전에 국회의 문턱을 넘 은 전명헌 개헌안은 전광석화와 같 은 속도로 국민투표에 붙여졌다. 개헌안 전문이 신문에 실렸고, 인 터넷에도 공개되었다. 텔레비전에서도 다시금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극우 세력들도 가망은 없다는 건 알았다. 그럼에도 지푸라기라도 잡 는 심정으로 총력전에 펼쳤다.

    온갖 음해와 유언비어들이 난무 했다.

    유재원이 봤을 때, 60년대 고무 신이 오갔던 선거보다 더 혼탁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출마 자가 선거법을 위반하면 당선되더 라도 박탈될 위험이 있지만, 개헌 안 투표에서 반대 세력의 경우엔 선거법을 위반해도 페널티가 크지 않았으니 말이다.

    일부 방송국에선 이러한 극우 세 력의 논조도 비중 있게 다뤘다. 말 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도 기계적인 중립을 위해 극단적인 주장을 마치 논?리가 있는 것처럼 보도해줬다.

    가장 열심힌 방송사는 서울 방송 이었다.

    이곳도 사실 시작부터가 좀 이상 한 방송국이었다. 전국 지방 방송 들끼리 네트워크를 이뤄 공중파에 입성하긴 했는데, 방송국의 소유주 는 대영 건설이라는 건설사였으니 말이다. 방송국 허가를 받을 때에 도 특혜 시비가 있었고, 지금도 논 란은 진행 중이었다.

    불안한 구조 때문인지 방송국 자 체는 친정부 성향이지만, 근본은 역시나 사주 중심이었다. 대영 건 설의 오너가 어떤 식으로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방송국의 논조는 확 달라진다. 이번 개헌에 대해서 는 보도에서 알 수 있듯 매우 부정 적이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이러한 흔들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투표율은 88%였고, 찬성 69%, 반대 19%로 압도적인 지지를 보여 주었다. 게다가 전명헌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도 70%대를 회복했으 니, 압도적인 승리였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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