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권 21화
유재원의 말에서 힌트를 얻은 티 파니가 조지 미첼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기 돈으로 600만 달러나 들여 서 미국 전역에 1만 개가 넘는 유 정을 팠고, 셰일 가스나 오일을 개 발하려고 힘쓰고 있는 괴짜였으니 말이다. 셰브롱의 현지 관리자 혹 은 석유 업계 관계자 몇 명을 잡고 물어보면 다들 조지 미첼을 제일 먼저 언급했다.
티파니는 바로 조지 미첼과 접촉 했고 그의 기술 시범을 보려고 출 장을 종종 나섰고, 드디어 결과가 나온 모양이다.
"채산성? 얼만데?"
"1베럴에 70달러가 넘어! 그것도 유정의 질이나 구조가 수압 파쇄법 에 제일 맞았던 곳에서 나오는 거 고, 환경이 좀 나쁘면 8, 90달러는 가뿐하게 오버해."
티파니는 완전히 포기했다는 듯 두 손을 털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현재 유가는 1베럴에 10달러였 다. 여름만 해도 12, 13달러는 했 는데 세계 경제가 좀 둔화되는 것 인지, 아니면 중동 나라들의 원유 생산량이 더 늘어난 것인지 몰라도 10달러 대까지 떨어졌다.
떨어지는 낙폭을 보면 10달러도 조만간 붕괴해서 9달러 대에 진입 할 것으로 보였다. 덕분에 한국은 원화의 가치가 크게 떨어졌음에도 유가의 하락 덕에 그 부작용을 많 이 회피할 수 있었다.
IMF 체제에서 유가마저 상승했 다면 그야말로 지옥이 펼쳐졌을 텐 데, 유가가 하락하다 못해 바닥까 지 뚫고 내려가고 있어서 다행이었 다.
하지만 유가가 언제나 이렇게 저 렴하진 않았다. 유재원이 알고 있 는 유가의 흐름을 보면 당장 내년부터 큰 폭으로 상승을 시작한다. 내년 여름쯤엔 20달러를 넘을 것이 고 북반구에 겨울이 와서 기름 소 모가 많아질 때가 되면 30달러도 넘본다.
물론 30달러도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이었다.
IT로 크게 한탕을 치고서, 서브 프라임 모기지로 거대한 돈을 모은 월스트리트는 또 다른 투자처를 찾 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원자재 시 장이었으니 말이다. 금부터 곡물 그리고 원유까지 투기 자금이 몰리 면서 어마어마한 가격의 상승을 만 들어버린다.
1베럴에 100달러는 가뿐하게 넘 고, 150, 160달러를 찍기도 했다. 그러면 지금 티파니가 확인한 1베 럴에 70달러라는 셰일 가스, 셰일 오일의 개발 비용은 경제성이 갖춰 지게 된다.
실제로 그렇게 유가가 폭등하고 서 미국에서는 셰일 개발이 본격적 으로 시작되었고, 이를 계기로 세 계정세도 크게 요동치게 된다.
중동으로부터 원유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야만 미국의 안보가 확보 되던 시절에는 드넓은 바다를 모두 지켜야 했다.
그런데 셰일 가스, 오일 기술의 발달로 자국 내 생산량이 소비량을 넘어서면서 더 이상 그 넓은 바다 를 혼자 책임질 필요가 없어진 것 이다.
아직 일어나진 않은 일이지만, 10년 내에는 벌어질 일이기도 했 다.
"그래서 그냥 바이바이한 거야?"
"아니. 나도 자기 옆에서 보고 배운 게 있는데, 그냥 을 수야 없 지. 600만 달러를 투자하고서 미첼 씨와 5 : 5 동업자가 되기로 했어."
역시 티파니도 셰브롱의 핏줄이었다.
텍사스 23번 유정에서 나오는 기 름을 셰브롱에 전량 매각하기로 하 면서 받은 돈이 있긴 해도, 600만 달러는 상당한 거금이었다. 미래의 일을 예측하고 과감하게 배팅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 잘했지?'하며 보는 티파니의 모습에 유재원은 잘했다 하며 머리 를 슥슥 쓰다듬어줬다. 그야말로 훈훈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불타오르는 연인답게 훈훈한 분위기가 뜨겁게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참 좋은 때였다.
아쉬운 건 그러한 나날이 오래가 진 못했다는 점이다. 시간이 지나 면서 멀리 예보로만 들렸던 태풍이 거느리고 온 먹구름이 가시권에 들 어온 것처럼, 표결을 대략 3일 앞 뒀을 때 잔잔했던 여의도 정치판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이었다.
전명헌 대통령이 1997년 대선 자금의 불법성을 가지고 개헌안과 빅딜을 하려 한다는 소문이었다.
이러한 소문을 퍼트린 자들의 의 도는 확실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고, 초까지 치겠다는 것이었다. 무조건 저지해 야만 사는 사람들의 마지막 발악이 었다. 원래는 대한 일보에 대문짝 만하게 실려야 할 이야기였다. 하 지만 경찰과 검찰, 심지어 국세청 까지 오너 일가를 정조준하고 있는 터라 이 민감한 이야기를 실어줄 수가 없었다.
덕분에 기사화는 되지 못하고 소 문으로만 돌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의도발 뜬소문은 실체가 드러나 기도 전에 더 큰 뉴스에 묻혀버렸 다.
전명헌 대통령이 개헌안 표결 협 조를 위해 야당 대표들과 청와대 영빈관에서 영수회담을 진행 하다 가 기력을 잃고 쓰러진 것이다. 게 다가 그 모습은 텔레비전으로 생방 송 중이었다. 정규 방송을 진행 중 이던 다른 방송까지도 긴급 속보를 내야 할 사안이었다.
대한민국이 다급하게 돌아갈 때,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유재원도 그 모습을 CNN 브래이킹 뉴스를 통 해 봤다. 그렇지만 그 화면을 보고 나온 반응은 일반인과 좀 달랐다.
"이제 3번째시네?"
위기 때마다 쓰러지신 게 이번 포함해 벌써 3번째였던 탓이다.
20세기 사람들이 좀 순박하다고 해도 같은 걸 3번이나 당해줄까 싶 었다. 오히려 위기 때마다 쓰러지 는 걸 3번이나 반복했다고 역풍이 부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있다.
유재원이 거느리고 있는 블리자 드 엔터테인먼트에서 만든 게임이 다. 당연히 그 인기는 세계적이었 다. 미국부터 유럽, 한국까지 모두가 즐겨하는 RTS 게임이었다. 물 론 스타크래프트를 가장 열심히 하 는 나라는 한국이었다.
퀘이크나 워크래프트 시절에는 프로게이머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 았다면, 스타크래프트 때부터는 프 로게이머라는 직업이 완전해졌다. 지방 방송이나 게임 전문 채널에서 프로게이머들의 경기를 정기적으로 방송까지 할 정도였다. ID 엔터테 인먼트에서 정규 리그를 진행하고, 이를 방송사들이 중계권을 얻어 중 계하는 방식인데, 그 인기는 놀라 웠다.
총상금 1억 원짜리 스타리그의
결승전에는 유료 관람객으로만 거 대한 경기장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오히려 ID 글로벌해드쿼터빌딩 상 업 층에 만들어진 e스포츠 경기장 의 규모로는 직관을 원하는 사람들 을 다 수용할 수가 없어서, 수천 석 규모의 공연장이나 경기장을 대 관해서 결승전을 치러야 했을 정도 였다.
이렇게나 스타크래프트가 한국에 서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소는 바로 PC방 때문이었다. 그 리고 개성 넘치는 스타크래프트의 세 종족이나 기상천외한 전략으로 온갖 변수들이 만들어져서 보는 재미가 있는 게임이기도 했다.
"3연벙 같잖아."
그런 스타크래프트에는 초반에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펼칠 수 있는 전략이 종족별로 있다. 일명 러시 공격인데, 프로토스는 포톤캐 논 러시, 저그라면 드론 러시가 있 고, 테란에는 벙커링 러시가 있었 다.
벙커링이라는 방어용 건물이 있 다. 초반부터 지을 수 있는 건물인 데, 공격용 유닛을 건물 안에 넣으 면 사거리도 늘어나고, 공격을 받 아도 벙커링 건물의 체력이 먼저 닳아지니 현실의 벙커와 그 기능이 똑같다.
창의력이 넘치는 한국의 프로게 이머들은 그 방어용 건물을 공격에 썼다. 벙커를 지을 자원만 후딱 모 은 다음, 일꾼을 모두 끌고 나가 적 진영 한복판에 벙커를 짓고 공 격 유닛을 넣어 놓기만 하면 알아 서 GG가 올라오는 것이다.
유재원이 말한 3연벙은 대단히 흥행한 인터넷 밈이었다.
그런 밈이 만들어진 연유는 간단 했다. 어떤 5전 3승제의 준결승전 에서 한 선수가 연달아 3번이나 쓴 일을 지칭하면서 만들어진 밈이었 다.
프로게이머들의 세계는 너무도 치열했다.
유재원의 죽마고우인 주민이도 게임에 특출한 재능이 있어 일찌감 치 프로의 길을 걸었다. 유재원도 주민이의 재능은 인정할 정도였다. 하지만 우승컵을 들어본 건 올해 봄 리그가 처음이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각 경기마 다 철저한 준비와 완벽한 실행이 있어야 우승컵을 들어 올릴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같은 전략을 3번 이나 연달아 쓴다? 그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그걸로 3승을 한다는 건 더더욱 비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거대한 밈이 되어서 수 십 년 동안 유행으로 떠돌 수 있었 다. 물론 그 전설의 3연벙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현재 스타크래프트 리그에서 뛰 고 있는 선수들은 0세대, 혹은 1세 대 인물들로 유재원이 보기엔 아직 도 체계가 온전히 갖춰진 상태는 아니었다.
일단 가장 미비한 점은 프로 팀 의 부재였다.
현재는 중소기업들의 작은 서포 트로 팀이 운영 중이었는데, 대기 업들이 본격적으로 이 판에 들어와 서 팀을 창단하고부터 제대로 된 프로게이머 리그가 운영된다.
3연속 벙커링도 이렇게 대기업 팀이 생겨나고 나서 일어나는 일인 데, 지금으로부터 6년은 더 기다려 야 하는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대체 어쩌시려고 똑 같은 방법을 3번이나 쓰신 거야."
와병이 효과가 좋긴 했다.
하지만 3연벙처럼 같은 전략도 3 번을 쓰면 그것도 밈이 되어서 굳어질 만큼 특이한 일이었다. 텀이 좀 길긴 했지만, 시대적으로 시간 이 매우 빠르게 흐르는 듯한 속도 감을 자랑하는지라 국민에게도 이 젠 좀 익숙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역풍이 부는 것이다.
걱정이 커지는 유재원이었다. 그 랬기에 유재원은 곧장 티파니폰을 들고서 전명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단 안부부터 물어보고 전술을 좀 바꾸시라고 조언을 드리고 싶어서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 소동으로 인해 전 화를 받을 상황은 아닌 모양이었다.
전화는 당장 불가능하니 유재원은 문자로 선회했다.
문자를 보내고 나니 좀 안심이 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느낌 이 바뀌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 날.
샌프란시스코 시각으로 오후 5시 쯤, 유재원의 티파니폰으로 전화가 한 통 왔다.
-유재원 회장님? 청와대 비서실 장 김광일입니다.
"네, 김 실장님. 안녕하세요."
유재원은 청와대 비서실장의 전 화를 받고 좀 싸한 느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 유재 원이 받은 티파니폰은 부모님과 티 파니 그리고 소수의 지인에게만 알 린 개인 전화번호였던 탓이다. 당 연히 전명헌도 그 번호를 알고 있 지만, 청와대 비서실장은 아니었다.
그런데 청와대 비서실장이 알린 적 없는 전화번호로 바로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게다가 일반 전화도 아니고 보안 회선이었다.
-대통령님께서 이 번호로 전화를 하면 유 회장님과 통화를 할 수 있 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역시 그 이유는 전명헌이었다.
"할아버지께 진짜 무슨 일이 있 는 거예요?"
김광일은 전명헌과 수십 년 손발 을 맞춰 온 미래 그룹의 측근이었 다. 전성기 시절에는 전명헌의 명 령을 미래 그룹 전체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전명헌의 부 재 시에는 전명헌을 대신하기도 했다. 덕분에 그는 청와대 비서실장 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그만큼 전명헌의 최고 측근이라 할 수 있었기에, 유재원과 전명헌 사이에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회장님에게만큼은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하셔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르신께서 많이 위독하십니다.
묵직한 충격을 느꼈다.
철저한 경호 덕에 그 누구도 유 재원을 해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휴대폰을 타고 넘어온 청와대 비서 실장의 말은 유재원에게 정신적 충 격을 선사해줬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유재원은 한편으로는 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긴가민가하는 느낌도 있었다. 적을 속이기 위해서는 아군부터 속이라 는 말이 있지 않던가.
" 진짜요?"
덕분에 유재원은 다시 한 번 물 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 매우 급합니다.
돌아온 답은 변하지 않았다. 짐 짓 침착하게 말하는 듯한 김 비서 실장의 목소리에서도 진득한 불안감이 풍겨났다. 이게 인위적으로 가능하다면 김광일은 회사일이 아 닌 배우가 되어야 했을 인물이다.
3연벙이 아니라 양치기 소년이었 다.
이솝 우화에 내오는 대표적인 이 야기 말이다. 늑대가 나타났다는 말은 두 번은 거짓말이었지만, 세 번째는 진짜였다. 전명헌의 와병도 두 번은 거짓이었지만, 이번엔 진 짜였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