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477화 (477/1,007)

24권 11화

일제강점기에 나왔던 대한 일보 의 1면이었다. 거기엔 '천황폐하 만 세'가 떡하니 박혀 있었다.

"와, 여기서 저걸 꺼내시네?"

유재원은 그 모습에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저걸 이 자리에서 꺼낸다는 것은 대한 일보와 대판 싸우겠다는 선전 포고와 다름이 없었다. 그것도 한 국의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대놓고 언론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일은 이제껏 없었다. 역시 전명헌은 원 조 불도저답게 거침이 없었다.

-매국을 하면 3대가 잘 살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는 게 한 국의 현실이라고 합니다. 분명 잘 못된 일입니다. 그렇기에 저 전명 헌은 개헌을 통해 그 뿌리부터 바 로잡아 이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 우려고 합니다. 친일 부역자들의 재산을 환수하여 독립운동을 하신 후손들을 보살필 것입니다. 또한, IMF로 나라가 어려운데 이들의 재 산을 환수해 나라 살림에도 보탠다 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을 겁니다.

매국을 하면 3대가 잘 살고, 독 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소 리도 유재원이 전한 이야기였다.

이 시대의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그러하듯 전명헌도 대화할 때, 종 종 '나 때는 말이야'라는 소리를 곧 잘 하셨다. 다만 전명헌의 레퍼토 리는 종종 시간을 달려서 6.25 전 후를 쉽게 왔다 갈 정도였다. 당연 히 일제강점기 때의 이야기도 있었 다. 그럴 때마다 유재원은 매국노 3대는 잘 살고 독립운동가 3대는 못 산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보니 전명헌도 그 이야기 가 머릿속에 콕 박힌 모양이었다.

그것이 오늘 전명헌의 선전포고 가 되어 튀어 나왔다. 크로스카운 터를 넣고 후속타까지도 완벽하게 이어가는 전명헌이었다.

그날 저녁.

전명헌 대통령의 넥스트컴 국민 과의 대화 프로그램은 아침 10시에 진행되었다. 덕분에 석간 신문에는 국민과의 대화에 대한 정치권의 반 응이 실릴 수 있었다.

-역사적 맥락을 생략한 대통령의 편협한 역사의식 너무나 위험하다.

-전 국민이 단결해야 할 IMF시 대에 국론 분열이 웬 말인가?

-남남갈등 획책하는 북한의 술수 에 넘어가선 안 돼.

대한 일보가 프레임을 잡아줬다 고 공세를 한 번 펼쳤다가, 핀치에 몰린 야당 의원들과 대한일보를 비 롯한 보수 성향 신문들은 만능의 방패를 들었다.

일단 여론이 너무나 좋지 않으 니, 반대로 말하면 전명헌에 지지 가 너무도 강력하니 소나기를 피하 자는 것이었다.

초전은 그야말로 완벽한 전명헌 과 유재원의 승리였다.

대신 진짜 본게임은 따로 있었

다. 바로 국회에서의 개헌안 인준 이었다. 국회의원 180명의 동의가 있어야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는데, 통일국민당과 민주당 연정으로는 국회의원 숫자가 좀 부족했다.

통일국민당이 기석이었고, 민주 당이 80석이니 둘이 합쳐 151석이 었다. 부족한 숫자는 49석인데 이 것을 김영삼 전 대통령의지지 세력 이 모인 한나라당, 혹은 과거 군부 세력의 잔재인 민주한국당으로부터 가져와야 했다.

전명헌의 구상은 김영삼 전 대통 령의 세력인 한나라당에 초원 복국 집 사건, 그리고 대선 불법 선거자금으로 달을 걸겠다고는 했는데 그게 잘 될지는 유재원도 의문이다. 공수처 때는 노태우의 사면으로 민 주한국당과 딜을 했고, 성공적이었 다. 이번에도 그렇게 잘 되면 좋겠 는데, 이상하게 느낌이 좋지 않았 다.

아무래도 민주한국당은 같은 군 부 줄신이 많아서 의리(?)라는 게 있었지만, 한나라당과 김영삼의 관 계는 그 정도로 끈끈하진 않았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플랜B가 있어야겠네."

석간 신문을 인터넷으로 열람하 던 유재원이 결정을 했다.

전명현 할아버지가 구상한 대로 약점을 잡아 딜을 거는 것으로 개 헌안이 국회의 문턱을 넘으면 참 좋겠지만, 수가 틀어지면 더 큰 문 제였다. 그러니 유재원은 자기 나 름대로 방법을 구상해 플랜B를 만 들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나저나, 대한 일보는 이제 무 슨 카드를 꺼내려나?"

유재원은 대한 일보가 꺼낼 수 있는 카드를 헤아려 봤다.

아무래도 친일 전력을 가리는 것 에는 반공이 최고일 것 같았다. 이 미 사골을 여러 번 우려낸 수단이 긴 하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효과도 확실하니 여러 번 우려먹었 다는 이야기도 된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전명헌 정부 나 연립 중인 민주당의 운동권을 공격하는 게 다음 대한 일보의 패 턴이라 보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유재원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며칠 후,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터졌다.

-인기 아이돌 그룹의 표절!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본 인들 홈페이지에 한국 아이돌이 자 신들의 노래 도둑질한다 밝혀!

LSM 소속의 남성 5인조 아이돌 그룹이 며칠 전 발표한 앨범이 있 다. 그런데 타이틀곡뿐만이 아니라 수록곡까지도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노래를 표절했단 이야기 였다. 유재원도 전생의 기억을 통 해 익히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아이돌의 표절은 하루 이틀의 일 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양상이 완전히 달랐고, 유재원도 예상치 못한 일로 치달았다.

레이지 어게인스트 머신.

보통은 줄여 RATM이라 부르는 미국의 4인조 랩 메탈 록밴드는 1992년 그룹명과 같은 앨범을 내고 데뷔했다. 1집 때부터 선풍적인 인 기를 얻었고, 1998년인 지금에는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세계구급 밴드였다.

세계인의 사랑을 단번에 얻은 RATM의 특징이라면 뛰어난 실력 과 사회 비판적인 가사, 그리고 본 인들의 곡에 담은 이야기를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른바 행동하는 본격적인 좌파 록밴드였 다. 비하의 의미가 아니라 밴드 멤 버들 전체가 진보적인 성향이기 때 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단적으로 데뷔 앨범의 커버 사진으로 틱광둑 스님을 쓴 것도 그 충 격적인 사진의 이미지를 차용해 깊 은 엣지만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불교 탄압에 침묵하는 남베트남 정부, 그리고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그런 남베트남 정부를 지원하는 미 국에 항의하기 위해 소신 공양을 한 것이고, RATM 멤버들도 그 뜻 에 공감했기에 커버 사진으로 사용 한 것이었다.

이것 말고도 RATM의 사회 참 여 활동은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 이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민감한 내용을 담고 있는 곡도 많았다.

이렇게 민감한 내용을 담은 곡이면 듣기에 호불호가 갈려서 대중적 인 인기를 얻기는 어려운데, RATM은 달랐다. RATM의 주장 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곡이 너무 좋아서 듣는 사람도 상당했다.

덕분에 언어적인 장벽이 있는 동 양권에서도 RATM의 마니아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번에 컴백한 LSM 의 초인기 아이돌 그룹인 HxT가 타이틀곡에서 RATM의 초 인기곡 Killing in the Name을 제 대로 표절하면서 딱 걸린 것이다.

처음엔 소수의 록 마니아 커뮤니 티에서 제일 먼저 표절 이야기가 나왔다. 예전이라면 아는 사람만 알고 말았을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고도화된 인터넷 인프라를 가진 나 라였다, 국민 PC사업과 함께 진행된 브 로드밴드 인터넷 보급 사업은 한국 의 지리적 특성 덕에 적은 인프라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용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도 아직은 프 리미엄 서비스인 8Mbps속도의 인 터넷이 기본이었을 정도다.

심지어 한국 최대의 IPS 업체가 된 데이콤에서는 VDSL이라는 기존 ADSL보다 8배나 빠른 초고속 서 비스를 준비 중에 있었다. 집집마다 컴퓨터가 있고, 초등학교에서는 컴퓨터 과목이 기본이었다.

예전이라면 록마니아들만이 좀 비토를 하고는 묻혔을 이야기는 퍼 지고 퍼져서 인터넷을 다 뒤덮였다. 심지어 이렇게 퍼 날라진 글은 태 평양을 건너 RATM의 멤버들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결국에는 RAMT이 본인들이 직접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한국 아이돌 그룹이 자 신들의 노래를 훔쳐갔다고 분노하 는 글을 올리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HxT의 앨 범이 나온 지 4일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HxT 표절 의혹!

-소속사 LSM. 표절 논란에 곤 혹스럽다. 음악의 유사성일 뿐.

"페이지가 왜 이리 지저분해!"

광활한 투르 시네마 디스플레이 화면 가득 뜬 기사를 스크롤 하던 유재원은 불평 가득한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회주 의 개헌 프레임에 맞서 전명헌 정부 개헌안 전문 공개라는 카운터 크로스가 터진 상황이었다. 단순히 대통령 임기만 바꾸고, 북한의 존 재를 인정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쉽게 말할 수 없었 던 여러 가지 금기를 확실히 건드 리는 개헌안 이었다.

과거사 위원회만 해도 경기를 일 으킬 사람들이 한국 사회 지도층에 아직도 많았다. 군부 정권에서 저 지른 각종 사태뿐만이 아니라, 해 방 전 일제강점기 시절에 부역한 사람들, 가문들은 아직도 떵떵거리 며 살아 있었다.

유재원은 당연히 그런 이들이 전명헌 정부의 개헌안을 보고 경기를 일으키는 반응을 기대했다. 특히 대한 일보의 반응이 궁금했고, 그 에 대한 네티즌들의 기발한 댓글도 기대했다. 그런데 오늘 켜본 넥스 트컴의 뉴스페이지 전면을 장식하 고 있는 건 HxT의 표절 논란이었 다.

"아! 아주 없는 건 아니네."

스크롤을 해보니 아래쪽에는 개 헌에 대한 기사들이 좀 보였다.

물론 처음부터 정치 섹션으로 들 어가서 보면 개헌 관련 기사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유재원이 보고 싶었던 것은 네티즌 인기 검색 기사였다. 현재 네티즌들이 가장 많 은 관심을 두고 있는 기사를 순차 적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이는 곧 인터넷 여론의 바로미터와 같았으 니 말이다.

그러니 이대로만 보면 네티즌들 의 관심이 개헌으로 몰려야 할 타 이밍에 엄한 아이돌 그룹의 표절 논란으로 흘러간다는 이야기다.

"어뷰징인가?"

유재원은 순간적으로 언론사들이 다 짜고 아이돌 그룹의 표절 이야 기로 인터넷을 도배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언론의 힘은 기사를 써서 알리는 것에도 있지만, 다뤄야 할 기사를 쓰지 않고 묻어버리는 것에도 큰 힘이 있었다. 물론 개헌과 같은 사 안은 한국의 사회구조 자체를 바꾸 는 대변혁이라서 신문사 몇이 작당 해서는 묻으려야 묻을 수 없는 일 이긴 하다.

개헌을 위한 시계는 거꾸로 둬도 뚜벅뚜벅 가고 있다. 조만간 국회 에는 각 정당마다 개헌 특위가 생 길 것이다.

이곳에서 정명헌 정부의 개헌안 을 검토하거나 각 당의 특성에 맞 춰 개헌안을 만들 것이고, 이를 통해 텔레비전 토론을 비롯한 공청회 가 시작될 것이며, 여론을 수렴을 거쳐서 국민 투표가 결정된다.

유재원의 전생에서 몇 차례나 시 도 되었던 개헌 작업은 국회의 문 턱에서 좌절되었지만, 이번 만큼 은 확실히 달랐다. 49명이라는 의 원 숫자가 부족하지만 전명헌이라 면 그 숫자를 가볍게 채워버릴 능 력이 있었다. 비록 그 방식이 밀실 정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개헌이 이뤄지기만 하면 대단한 진 보이자 혁신이었다.

다만 전명헌이나 유재원도 어찌 할 수 없는 건 바로 여론의 동향이었다.

국민적 동의가 있지 않으면, 개 헌의 의미는 사실상 없어지는 것이 나 다름이 없다. 그렇기에 과거사 청산과 같은 이슈를 전면에 부각한 것이다. 보수 언론들이 사회주의 개헌이니 뭐니 해도 한국서 가장 크게 작동하는 건 친일파 논란이었 다. 일본에서 독도 관련한 발언이 나 과거사를 부정하는 정치인들의 막말이 나올 때면 전국이 다 들썩 거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지금쯤 인터넷이 활활 불 타올라야 할 시점인데, 엄한 아이 돌 표절 논란이 이슈를 선점해버린 것이다.

유재원은 곧장 원격 제어 관리 프로그램을 열고 한국 ID 테크놀로 지의 데이터 센터에 접속했다. 그 리고서 넥스트컴 뉴스 페이지에 접 속하는 IP의 모니터링 프로그램을 띄웠다. 등록된 IP의 개인정보를 열 어보는 건 위법이지만, 접속한 IP 목록을 재가공해 보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모니터링 프로그램 을 띄워 보는 것은 데이터 센터의 관리자 중에서 인가를 받은 소수에 게 주어진 권한이었다.

시시때때로 발생하는 인터넷 트 래픽의 상세 데이터는 가공하기에 따라 커다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도 있고, 민감한 정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근속 연수가 제법 쌓여 능력과 신용이 확인된 중간 관리자 이상에게만 부여되었 다.

물론, 유재원은 가장 막강한 권 한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중간 관리자들의 모니터링에도 걸 리지 않는 새도우 프로그램을 실행 할 수 있었다. 유재원의 특권은 이 뿐만이 아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ID 그룹의 데이터 센터를 통 합해 다룰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단순한 모니터링뿐만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데이터 센터를 직접 조작해 필요한 작업에 끌어다 쓸 수 있다.

이러한 막강한 능력을 통해, 현 재 넥스트컴 뉴스페이지의 실시간 인기 뉴스 순위가 조작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네티즌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인지 바로 파 악할 수 있었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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