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권 8화
-백혈병에 걸린 직원만 10명이 넘고, 폐 질환 또한 10명이 넘습니 다. 백혈병의 경우엔 모두 메모리 반도체 생산 라인에서 근무했던 직 원들입니다.
최강욱의 쪽지 내용이 이거일 줄 알았다.
유재원이 괜히 일성 전자의 전 직원들에게 건강 검진을 실시하라 고 한 게 아니었다. 전생에도 일성 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 이슈 가 큰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반도체 공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수율이다.
수율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이든 다 동원하는 게 반도체 생산 라인의 기본 방침이었다. 그 중 하나가 클린룸을 구성하는 것이 다. 클린룸은 단지 먼지만 제거한 다는 게 아니라, 생산 라인 내부의 공기 구성을 바꿔버릴 정도로 극단 적이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화학물질을 사용하는데, 이게 인체에 어떤 영 향을 주는지는 지금까지 크게 생각 해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반도체 생산 과정 중에 웨이퍼의 증착이나 세척 과정에서는 더더욱강한 유독 물질이 투입되는데, 생 산 라인이 정밀하지 못하면 그 물 질이 유출 될 수도 있다.
"생산 라인에 문제가 확실히 있 다는 거군요?"
-그렇게밖에 볼 수 없는 결과입 니다.
"당장 역학 조사를 시행해서, 무 엇이 잘못됐는지 알아보세요. 그리 고 설계 미스나 고장 난 부분이 나 오면 바로 고치시고요."
-그러면 공장의 정상 가동은 한 참이나 미뤄지게 됩니다만.
"어차피 지금 메모리 반도체 가격은 바닥이잖아요. 마진 없이 팔 고 있는데, 공장 돌려봐야 손해만 나죠. 게다가 직원들 건강까지 위 협하면서 말이죠. 공장에 대해 철 저히 조사해서 원인을 밝혀내세요. 만약 설계 미스가 발견된다거나, 의도적으로 직원들 건강을 무시하 고 이렇게 만든 거라면 다 뜯어 고 쳐야죠. 아예 미세 공정 강화를 위 해서 리모델링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예, 회장님.
반도체 공장의 공정 전환은 조 단위 자금이 투입되는 거대한 작업 이었다. 유재원은 그런 작업도 마치 고장 난 컴퓨터 부품을 교체하 라는 식으로 간단하게 말했다. 어 마어마하게 쌓인 자본력이 그 자신 감의 근원이었다.
더욱이 이 작업이 절대 손해를 보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어차피 컴퓨터의 메모리 반도체 수요는 항상 팽창한다. 컴퓨터에서 실행하는 프로그램의 크기나 사용 되는 리소스의 용량은 줄어들 일은 없다. 게다가 서버나 엔터프라이즈 시장의 규모도 날로 커지고, 인공 지능이나 빅데이터 검색 등 그야말 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시스템이 필 요한 사업도 생겨난다.
비단 IT 분야만 메모리 반도체를 쓰는 게 아니다. 휴대폰도 있고, 자 동차도 있다. 군사 분야에도 메모 리 반도체를 필요로 하는 분야가 많다.
속도가 빠르고, 용량이 큰 메모 리 반도체는 늘 환영받는 상품이다. 그러니 미리 미세 공정 전환을 하 면 나중에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사람들 모 두 고소하세요. 민사, 형사 모두 요."
유재원이 봤을 때, 일성 전자의 백혈병 사태는 생산 라인을 설계할때 돈 몇 푼 아끼려고, 직원들의 건강을 끌어다 쓴 게 분명했다.
-예, 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고소인 대표를 하 겠습니다."
-예? 회장님이 직접 이름을 올 리신단 말씀입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최현희 회장을 비롯한 일 성 전자 수뇌부는 비자금 건으로 이미 고소된 상태입니다만…….
"아뇨, 꼭 해야겠습니다. 대신 최 현희 회장까지 고소하세요. 최대한 빨리요. 그리고 역학 조사할 때, 일 성의 입김은 전혀 받지 않는 곳으최현희 회장이야 당연히 모르쇠 로 일관하겠지만, 일성 전자 반도 체 사업을 주도했던 사람이 최현희 였다. 공장이 지어지는 모든 과정 에도 관여했고, 그에 따른 책임도 있었다. 게다가 유재원의 일성 전 자 인수 직전, 빼돌려진 비자금도 결국 그 끝에는 최현희 회장이 있 었다.
예전에는 이러한 죄목들을 잘도 피해 나갔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 다.
"아, 그리고 병이 확인된 이들은 바로 치료 시작하고요. 물론 병원비는 회사 보험으로 처리하고, 최 현희 회장한테 모두 청구하는 거로 하세요."
-예, 회장님.
유재원이 물러설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걸 확인한 최강욱은 지시를 따르겠다고 했다.
최강욱과의 ID톡을 마친 유재원 은 약간의 상념에 빠졌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최현희 회장이 법정 구속이 되어 서 쇠고랑을 차고 호송되는 모습을 보면 속이 좀 풀릴 것 같다. 그렇 지만 전생의 악연을 겨우 고소 한 번으로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안타까운 건 이미 백혈병이 발병 된 직원들이다. 건강이 나빠지면 다시 회복하는 데엔 정말 많은 시 간과 노력이 있어야 하는 탓이다. 게다가 지금은 백혈병이라고 하면 불치병이라고 인식할 테니 엄청나 게 절망적인 기분일 것이다.
다행히 백혈병은 불치병은 아니 다.
조혈모세포 이식 치료법도 있고, 글리벡이라는 치료제가 2001년에 출시될 것이다. 그때까지 조금만 버티면 된다. 치료비도 ID 그룹에 서 지원할 테니, 환자가 의지만 있으면 절망적인 상황까지 치닫진 않 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처럼 최현희 회장과의 악연이 하나씩 풀려가고 있어서 그런 것일 까?
이날 유재원은 오랜만에 꿀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꿈은 여전히 꾸지 않았다.
며칠 후.
-ID 테크놀로지, 일성 전자 반도 체 생산 라인에서 유독성 화학물질 확인-반도체 생산 라인 근무자 중 백 혈병 발병 10명 확인-유독성 화학물질과 높은 역학관 계 존재 가능성-유재원 회장, 대규모 역학 조사 위해, 반도체 설비 완전 정지 -제독 장치 미비에 의도성 확인! 일성 전자 회장 최현희 직접 고소 키로 공중파 방송에서 일성 전자 반도 체 공장 관련한 보도들이 쏟아졌다.
이를 시작으로 신문을 비롯한 인터넷 매체의 보도도 이어졌다. 90 년대 뉴스처럼 건조하게 사실만 알 리는 공중파와는 달리 신문은 경악 이니 충격이니 하는 말들을 남용하 면서 사람들의 클릭을 유도했다.
일부 기사에서는 마치 유재원이 격노한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유재원이 샌프란시스코 집에 숨어 있다가 최강욱의 보고를 받고서 화 를 버럭 낸 것을 상세하게 묘사하 기도 했다. 동시에 최현희 회장을 직원들의 건강을 팔아서 제 돈 버 는 데 혈안이 된 사람처럼 그리기 도 했다.
"이건 좀 아닌데."
넥스트컴 뉴스 페이지에 올라오 는 인터넷 기사들의 폭주에 제동을 걸어야 하나 싶은 유재원이다. 넥 스트컴 뉴스 페이지에 오른 기사들 은 기본적인 고료뿐만이 아니라, 클릭 수에 따라 추가적인 인센티브 를 받는다.
넥스트컴으로 몰리는 인터넷 광 고들은 기사와 함께 자동으로 붙여 지는데, 클릭 수가 높으면 광고 노 출도 많아지니 인센티브의 액수도 올라가는 것이다.
노력을 들여 좋은 기사를 쓰고, 그게 사용자들의 호응을 받아 많이 클릭되면, 그에 따른 인센티브도 커져서 더 좋은 기사로 돌아오는 게 선순환이다. 그런데 선순환이 잘 되는 매체는 얼마 없었다.
그냥 돈만 보고 기사를 쓰는 업 체도 상당수였던 것이다. 더욱 놀 라운 점은 기존 종이 신문사들도 이런 기사가 많다는 점이다. 오히 려 이제 막 태동한 인터넷 전용 미 디어들의 기사가 종이 신문보다 더 알찬 경우도 많았다.
"참, 돈 쉽게 벌려고 하네."
돈을 쉽게 벌 수 있다는 건 끊을 수 없는 유혹인 모양이다.
당연히 안 될 말이다.
애초에 남의 돈을 버는 건 원래 어려운 일이었다. 유재원만 하더라 도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건 전생에 그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렀 기 때문에 지금에서야 빛을 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인센티브 정책을 좀 고쳐야겠 네."
일단 손을 보기로 작정한 유재원 이다.
좋아요나 싫어요 버튼을 만들어 서 기사의 평가를 네티즌들에게 맡 기는 것이 괜찮을 것 같다. 좋아요 가 높으면 인센티브를 많이 주고, 싫어요가 높으면 적게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완벽하진 않다.
그러면 좋아요나 싫어요 버튼을 전략적으로 누르는 조작질이 성행 하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나 마 어뷰징에 대한 처벌 조항이 신 설되었기에 처벌은 가능하지만, 돈 이 걸린 일이니 위험을 감수하고 작업을 칠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원래 시스템이라는 게 상황에 맞게 바꿔가면서 쓰는 거지."
유재원은 넥스트컴의 헨리 사장 에게 뉴스 페이지의 인센티브 정책 을 수정하라는 내용의 쪽지를 만들 어 보내면서 중얼거렸다.
시스템이나 정책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바꾸는 것이 유재원의 기본적인 철학이었다. 덕 분에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는 100일 마다 메이저 업데이트를 하고, 소 규모 패치는 한 달 텀으로 나온다.
긴급 보안패치 같은 경우에는 그 러한 공식적인 업데이트 일정에 상 관없이 문제 인식 후, 곧바로 처리 해서 최대한 빨리 배포된다.
"그나저나, 국회는 대체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이러한 유재원의 생각은 그대로 국가에도 적용된다.
국가의 변화나 문제점에 대한 실 시간 패치를 하는 곳이 바로 국회 아니겠는가. 그러니 전명헌이 개헌 선언을 했으니 국회에선 열띤 토론 이 벌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헌법 을 바꾸는 건 나라의 운영체제를 바꾸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 기대감도 잠깐뿐이 었다.
국회에서는 통일국민당과 민주당 만이 열심히 개헌안 작업을 착수했 고, 나머지 당들은 거의 반응이 없 었다.
개별적인 몇몇 야당 국회의원들이 반발을 했는데, 당 차원에서의 대응은 미미했다.
"뭐지? 누구의 지시라도 기다리 는 건가?"
전명헌의 개헌 성명 타이밍이 워 낙 빠르긴 했다.
종전 선언이 이뤄진 지 며칠 지 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종전 선 언에 대한 정치 세력마다의 이익을 따져보기도 전에 개헌 성명이 나왔 다.
대부분 나이가 많은 정치인들은 한반도의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이것이 앞으로 정치 지형을 어떻게 바꿀지 따져볼 시간도 없었다. 게다가 개헌은 생각보다 훨씬 거대 한 문제였다.
일단 대통령 임기제에 대한 변경 부터, 북한에 대한 규정, 국민 기본 권 문제, 공수처와 연관된 영장 청 구권 문제, 군인들의 이중 배상 금 지, 국민 소환제 등등.
하나만 해도 후폭풍이 어마어마 하게 일어날 일들의 토털 패키지였 다.
그렇기에 전명헌과 유재원은 폭 풍처럼 몰아쳐서 순식간에 끝장을 내버릴 작정이었는데, 마치 이 전 략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다른 야당들이 거의 무반응이었다. 원래 했던 예상은 끓는 기름에 물을 끼 얹은 것처럼 폭발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렇기에 유재원은 마치 야당들 이 아예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이럴 때 방향을 잡아주던 게 보 수 언론이지?"
꼬집어 말하면 바로 대한 일보 다.
미국이라면 보수 성향의 싱크탱 크들이 고도의 연구 결과가 담긴 리포트를 내고, 리포트에 대한 피드백이 언론이나 정치인들 사이에 서 쏟아져 나오면서 하나의 담론을 형성했다. 한국은 싱크탱크라는 게 없고, 언론이 이를 대신했다.
특히 대한 일보의 사주는 밤의 대통령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한국 정치의 흑막이라는 걸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유재원은 곧장 웹브라우저를 열 어서 대한 일보 사이트를 검색했다.
여렸을 때부터 시작된 악연이었 기 때문에 넥스트컴에는 대한 일보 는 물론 대한 일보 계열의 스포츠 신문이나 잡지는 일절 받지 않았다. 넥스트컴의 존재감이 작았던 시절에는 이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았 던 대한 일보였지만, 매년 수백 % 단위로 폭풍 성장을 하며 존재감을 키우자 뒤늦게 아쉬운 소리를 하기 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도 일절 접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감정이 상한 대 한 일보 역시 자체 홈페이지를 만 들고, 다른 포털사이트에 기사를 공급하기 시작한 이후로 딱히 접촉 도 없었다. 대신 ID 그룹이나 유재 원에 대한 비하 기사는 제일 먼저 쓰는 곳이 대한 일보가 되었다.
"역시 대한 일보도 아직 계산기 를 두드려 보는 중이나 보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전명헌 대통령의 개헌 선언에 대 해 대한 일보는 아직까지 조금 건 조한 톤으로 사실을 전달하는 기사 정도만 보였다.
한국 최대의 보수 싱크탱크이자 스피커인 대한 일보가 프레임을 만 들어주지 않았으니, 야당의 대응이 맥이 없는 것이다.
유재원은 대한 일보가 개헌에 대 한 손익 계산을 끝내면 곧 기사를 낼 것이고, 그러면 곧장 야당들이 반응할 것이라 예상했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