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473화 (473/1,007)
  • 24권 7화

    단적으로 최근 합의에 성공한 기 업 임금 체계 개혁은 IMF 체제가 아니면 불가능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기업이나 아르바이트를 하 는 대학생이나 최저임금에 적용을 받았다. 이는 대기업이 기본급은 최저 임금에 준하게 주고, 여기에 추가로 보너스와 수당을 더해서 임 금을 맞춰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퇴 직금 문제가 제일 컸고,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혀서 이 상태에 이르 렀다. 이러한 임금 체계에서 가장큰 부작용은 최저 임금법의 왜곡이 었다.

    본래 최저 임금이란 최소한의 삶 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책이다. 그런데 최저 임금을 인 상하면 고소득 노동자에 해당하는 대기업 임금도 자동으로 인상이 되 는 일이 벌어졌다. 기본급이 최저 임금에 맞춰져 있었던 탓이다.

    그 결과 당연히 최저 임금 상승 에 대한 반발력은 몇 배로 커진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목소리가 큰 집 단이 대기업인데, 이들이 한 목소 리로 아쉬워하는 소리를 하면 그 목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리니 말이다.

    전명헌 대통령도 정치인 이전엔 사업가였기에 그 사실을 정확히 알 고 있었다.

    그렇기에 노사정 대혁신 위원회 를 통해 최저 임금법은 대기업들은 노조를 통해 임금 협상을 하고, 노 조도 가입할 수 없는 일용직이나 아르바이트 노동자를 위한 것임을 재확인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당연히 반발은 있었지만, ID 그 룹이라는 반면교사가 있었고, 국민 적 지지를 통해서 큰 무리 없이 정 책을 실행할 수 있었다.

    노조 소속의 노동자들도 여러 가 지 손익 계산을 해보고는 동의했다. 노조의 존재감이 제일 크게 뿜어질 때가 바로 임금 협상 시기다. 그런 데 지금까지는 최저 임금법과 맞물 려 있어서 가입률이 그다지 높지 못했다. 기본급 중심 체계로 전환 된다면 노조의 존재감이 보다 강해 져야 하니 가입자도 크게 늘 것으 로 보았다.

    기업으로서는 살짝 불만이 많을 정책이었다.

    퇴직금 문제가 대두될 것이고, 이전에는 다양한 명분으로 실 수령액을 맞춰주면 그만이었는데, 이제 는 오버타임과 같은 수당도 정확히 계산해야 했으니 말이다.

    이러한 내부 정치는 물론이고, 심지어 외교도 잘하는 전명헌 정부 였다.

    단적으로 지금 현재 한국인들은 아직 변화를 쉽게 체감할 수 없는 종전 선언이었다. 하지만 전생에서 는 종전 선언에 도달하는 것만으로 도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그런데 전명헌 정부는 유재원이 보기에도 큰 무리 없이 이를 달성 했다. 아무리 철저히 대비한 마스터플랜이 있는 유재원이 있고, 미 리 미국서 사전 정지 작업까지 다 해놓기도 했지만, 실제 이뤄질 확 률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전명헌은 유재원의 예상 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이를 해냈 다. 이것은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성 과였다.

    "개헌도 잘하시겠지."

    유재원은 전명헌에게 개헌에 대 해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하 진 않았다. 아무리 할아버지 하고 부르는 사이였지만, 이제 대통령이 된 마당인데 가이드라인을 주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선을 넘는 일이었다.

    다만 유재원도 사람인지라 욕심 은 났다. 하지만 전명헌이 먼저 전 화를 걸어 개헌에 대한 언급을 하 면 그때 조언을 해주는 정도에서 그쳤다.

    반면교사가 있었기에 욕심을 확 실하게 제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통령을 꼭두각시 처럼 다루면서 국정을 농단한 세력 이었다. 물론 본인들의 이득을 위 해서 움직인 전생의 국정 농단 세 력과 마스터 플랜이라는 거대한 대의가 있는 유재원이 같을 수는 없 겠지만, 이들과 같아질 생각은 추 호도 없었다.

    이미 전명헌과의 공감대는 튼튼 하게 만들었기에, 유재원은 걱정이 없었다.

    "아, 이제 나도 일해야지."

    밀렸던 한국 뉴스를 다 살펴본 유재원은 스트리밍 웹페이지를 닫 고 본업인 ID 그룹 회장의 일로 돌아왔다.

    보통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ID톡 이나 ERP 프로그램을 띄워 놓고 임직원들이 올린 결재 서류를 봤지 만, 오늘은 좀 달랐다.

    평소에는 거의 쓰지 않는, 깨끗 하게 비워진 원목 책상에 앉아서 상자 하나를 놓았다.

    상자는 어른 손바닥보다는 조금 큰 하얀색 박스에 애플사의 마크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고, 아이팟이라 는 제품명도 나왔다.

    바로 어제 발매된 아이팟의 리테 일 버전이었다.

    ID 테크놀로지에서도 한창 리버 스엔지니어링이 진행 중이겠지만, 유재원은 김 비서를 통해 직접 매 장에서 구매한 제품을 뜯어볼 생각 이었다.

    심지어 언박싱용 하나만 산 게 아니라, 소장용으로 포장 그대로 보관하려고 두 개를 샀다. 경쟁 회 사 제품이지만 언박싱은 언제나 설 레는 일이었다. 유재원은 과감하게 커터칼을 들고 포장을 해체했다.

    "응? 달라진 게 아예 없네."

    애플에서 아이팟의 스펙이 공개 되었을 때 설마 하긴 했다.

    그런데 직접 리테일 판을 구매해 뜯어보니, 예전에 봤던 그 제품이 그대로 튀어 나왔다. 뒷면은 반짝 거리는 금속 질감이고, 전면에는 흑백의 LCD와 함께 커다란 탐색용 스크롤 휠이 돋보인다.

    심지어 휠은 물리적인 형태로 직 접 돌아가는 형식이다. 휠을 시계 방향, 혹은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 서 아이팟 안에 든 곡들을 탐색하 는 것이다. 그리고 스크롤 휠을 둘 러싸고 네 개의 버튼이 있는데, 전 체적인 디자인의 완성도는 괜찮았 다.

    "후후, 우리 라이브팟에는 많이 모자라지만."

    물론 그 디자인도 라이브팟에는 비견할 수는 없다. 게다가 생각보 다 묵직하고, 두께감도 있었다. 좀 과장해서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의 두께라고 할까?

    언박싱을 끝낸 유재원은 아이팟 과 전용 케이블을 들고 컴퓨터들이 있는 자리로 이동해 파워맥 앞에 앉았다.

    아이팟라서 뉴에그나 i웍스가 아 닌 맥을 선택한 게 아니라, 선택지 가 맥뿐이어서 그렇다. 아이팟과 컴퓨터를 연결하는 케이블도 파이 어와이어라는 특이한 규격이었고, 아이팟에 음원을 담을 수 있는 프 로그램도 아이튠즈뿐이 었다.

    문제는 지금 나온 아이튠즈는 맥 용뿐이라서 PC에서는 구동 자체가 되지 않는다. 파이어와이어 포트가 있어도 아이튠즈가 없으면 아이팟 에 접근조차 할 수 없으니, 음원을 옮길 수도 없다.

    "무슨 배짱이지?"

    파워맥을 켠 유재원은 도통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안드로이드의 편의성은 증명이 끝났다. 컴퓨터의 각종 커넥 터 기술도 ID 그룹이 주도해서 대 부분 공개했다. USB 포트도 로열티 가 없고, 이번에 트루 시네마 디스 플레이를 발표하면서 함께 발표된 디스플레이포트 역시나 마찬가지였 다.

    다양한 형태의 수많은 케이블이 컴퓨터에 주렁주렁 달리는 걸 지극 히 싫어하는 유재원은 작은 이익을 포기하고 과감하게 개방했던 것이 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개발 환 경도 마찬가지다. 돈을 받고 팔아 도 될 라이브러리들이나 리소스도 대부분 무료로 풀었다.

    학생이나 비영리 단체에만 한정 한 게 아니라, 일반 기업들을 상대 로도 무료였다. 덕분에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소프트웨어 생태계는 아마추어부터 전문 업체까지 폭넓 은 포트폴리오를 자랑하는 건강한 환경이었다.

    아이튠즈도 얼마든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낼 수 있었을 텐데도, 맥에서만 구동되는 것을 낸 거 보 면, 애플은 앞으로도 그 특유의 폐 쇄성을 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유재원이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파워맥의 부팅이 끝났다.

    CD를 넣고 아이튠즈를 설치한 다음, 아이팟을 파이어와이어 케이 블로 연결해 음원을 구매하고 옮겨 봤다.

    "너무 불편하네."

    이동식 디스크로 간단하게 파일 을 옮길 수 있는 라이브팟과 달리 아이팟은 아이튠즈를 통해서만 가 능했다. 동기화가 익숙해지면 편하 다고 하는데, 유재원은 아직도 너 무 낯선 방법이었다.

    아이튠즈에 올라온 음원도 예전 부터 준비한 넥스트 뮤직에 비하면 그 숫자가 많이 부족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넥스트 뮤직과 손을 잡 지 않은 음반사들이 아이튠즈를 선 택했지만, 아직은 넥스트 뮤직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유재원은 음악 청취 도 했다.

    선택한 곡은 IDDC 98에서 라이 브팟과 함께 가장 많은 이목을 받 았던 메탈리카의 엔터 샌드맨이다. 메탈리카는 넥스트 뮤직에서 일찌 감치 모셔간 아티스트라서 아이튠 즈에 등록된 가수는 아니었다.

    대신 아이튠즈는 CD를 립핑해 아이팟에 전송해주는 기능이 있었다. 유재원 메탈리카 CD를 넣고 디지털 음원으로 변환해서 아이팟 에 옮기는 작업을 한 다음에 청취 했다.

    CD의 정보를 찾아서 음원에 제 목이나 각종 앨범 정보를 자동으로 입력해주는 기능은 괜찮았다. 다만 가장 중요한 음질은 무난했다.

    "실망이다."

    곡을 끝까지 듣고서 아이팟을 내 려놓았던 유재원은 절로 실망감이 표출되었다. ID 그룹으로 컴퓨터 업계에 전반적인 기술력 향상을 일 으켰다. 그러면 애플사도 뭔가 좀달라질 줄 알았는데, 아이팟을 보 니 아니었다.

    스티브 잡스라는 인물의 존재감 이 어마어마하다는 건 잘 알고 있 었기에, 방심은 금물이라는 인식은 늘 있었다. 그런데 아이팟을 보니 방심하지 않는 게 힘들 지경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유재원은 정밀 분해해서 분석하는 리버스 엔 지니어링에서 만큼은 뭔가 나오길 기대하면서 다음 업무로 넘어갔다.

    백호 펀드, 신일본 투자은행의 업무 보고와 황재홍이 추진 중인 ID 마이크로크래딧의 준비 상황 체크였다.

    쓸 만한 건 미리 다 찜해놓자는 유재원의 기조에 따라 백호 펀드와 신일본 투자은행은 한국과 미국에 서 맹활약 중이었다, 오죽하면 포 식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고, 동 아시아 외환 위기에서 한몫을 챙겨 보려던 론스타 같은 사모펀드들이 유재원을 고깝게 보는 게 더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월스트리 트에서는 ID 인베스트먼트의 대책 없는 인수 작전으로 인해 시장이 교란된다는 이야기나, ID 인베스트 먼트가 철저한 기업 검증 없이 이름값만 보고 매수를 한다고, 투자 자들에게 이번 투자의 위험성을 적 극 알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ID 인베스트먼 트의 투자자 모금은 순조로웠다.

    투자은행의 미덕은 결국 수익률 이었다.

    투자자들에게 아무리 ID 인베스 트먼트가 고위험 상품에 투자한다 고 목소릴 높여도, 투자자들의 귀 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험한 월 스트리트에서 ID 인베스트먼트는 근 1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살아 남는 것은 물론이고, 놀라운 수익률도 찍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놈들도 손 봐줘야지!"

    빈센트 그린힐의 리포트를 보다 가 갑자기 월 스트리트의 말 많은 애널리스트 그리고 기득권을 좀 가 졌다고 으스대는 대형 투자은행들 에게 이를 가는 유재원이다. 개소 리는 무시하는 게 상책이지만, 그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당하고만 있으면 호구로 본다는 게 유재원이 전생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ID 그룹의 98년 계획 중에 가장 큰 행사였던 IDDC 98을 성공리에 마친 유재원은 슬슬 시작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유재원이 이들을 족칠 방법으로 무엇이 좋을지 생각하려 할 때, ID 톡 알람이 울렸다. 발신인은 최강 욱 부회장이었다.

    최강욱 부회장의 메시지는 어떤 내용이든 최우선적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유재원은 바로 쪽지를 열었다.

    -직원들의 건강 검진 결과가 나 왔는데, 충격적입니다.

    직원들의 건강 검진?

    뭔가 싶었던 메시지였는데, 기억 을 더듬어 보니 생각이 났다. 일성 전자를 인수하고서 직원들 전체의 건강 검진을 실시하라고 했던 지시 가 있었다. IDDC 98을 치르고 나 서도 까맣게 있고 있었는데, 드디 어 결과가 나온 모양이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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