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권 6화
애플로 복귀한 스티브가 야심차 게 추진한 것이 바로 ARM이라는 팹리스 반도체 전문 회사의 창립이 었다. 시스템 플렛폼이나 SoC(System-on-Chip, 단일칩 시 스템)을 위한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를 만드는 회사다.
애플 혼자서는 이 거대한 프로젝 트를 감당할 수 없어서 VLSI와 Acorn이라는 두 회사를 더 끌어들 여 조인트 벤처 형식으로 세웠다.
놀랍게도 MAP는 ARM에서 만 들고 있는 저전력 CPU의 구조와 매우 흡사했다. 설마 기술이 탈취된 건가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니었다. 대신 MAP는 성능에 좀 더 치중한 설계였고, ARM은 극한 의 전력효율을 달성하기 위한 설계 였다.
스토리지 부분도 애플은 아이팟 을 위해 IBM의 초소형 하드디스크 를 독점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확정 되었다. 구동 방식은 완전히 하드 디스크와 동일한데, 크기가 매우 작은 특수한 하드디스크였다.
용량은 무려 5기가바이트. 주력 모델이 256메가바이트 플래시메모 리를 채용한 라이브팟에 비하면 너 무도 광활한 크기였다. 라이브팟은 AAC코덱 이용시 100곡을 담을 수 있다고 홍보했지만, 아이팟은 mp3 파일 그대로 1천 곡이나 담을 수 있는 용량이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그나마 프로세서와 스토리지는 비벼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다 른 부품들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이팟에 게임 기능을 넣을 생각 은 추호도 없는 스티브였지만 컬러 LCD는 정말 탐이 났다. 앨범 아트 를 비롯한 뛰어난 비주얼을 가진 인터페이스는 정말 매력적인 것이 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전 세계에서 저렇게 작으면서도 고해상도인 컬러 LCD 모듈을 생산하는 업체는 ID 디스플레이가 유일했다.
다른 전자회사들이 LCD분야에 대해 투자를 시작했지만, 이제 겨 우 공장을 짓기 시작하는 것에 불 과했다. 그런데 ID 디스플레이는 벌써 27인치에 달하는 LCD 모니 터까지 생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일성이나 샤프, 금성에선 아직 연락이 없나?"
LCD 모듈에 대해 보고를 들은 스티브가 그제야 뭔가 생각이 났다 는 듯 되물었다. LCD 모듈 생산업체에다 소형 컬러 LCD 모듈을 생산하는지, 납품이 가능한지 알아 보라고 며칠 전 지시를 내렸던 것 이다.
"저기, 일성전자는 망했습니다. 반도체 공장과 LCD공장 모두 ID 그룹에서 인수했다고 합니다. 그리 고 샤프는 ID 디스플레이와 LCD 기술개발 협정이 맺어진 상태입니 다. 금성의 경우에 제품을 생산해 줄 수 있다고 하는데, 스펙은 많이 부족합니다."
회사 일에 바빠 외부 소식이 느 린 스티브였다.
일성전자가 망했다는 것을 이제 야 확인하고서 크게 놀랐다. 뒤이 어 나온 샤프 이야기는 차라리 대 답을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하 는 표정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소형이지만 고해상도를 자랑하는 컬러 LCD모듈은 참 탐나는 부품이 었다. 그런데 그게 또 ID 독점이라 니. 게다가 트루 시네마 디스플레 이는 또 어떤가. 이제껏 나온 디스 플레이 장치 중에 그만큼 혁신적인 물건은 본 적이 없었다.
트루 시네마 디스플레이가 아주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장착할 수 있는 컴퓨터는 i웍스 한정이고, 그 것도 디스플레이포트라는 특수한 디지털 케이블을 써야 했다. 하지 만 화질이나 광활한 해상도는 그 값어치를 톡톡히 했다.
"그 녀석은 항상 이런 식이지."
스티브의 뇌리에 한 청년의 얼굴 이 떠올랐다.
당연히 그 청년은 ID 그룹의 회 장 유재원이었다. ID 그룹의 신기 술 동향을 보고 있으면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다. 마치 전쟁 전에 사 전정지작업을 하는 것처럼 특정 아 이템을 내놓기 전에 관련 기술들을 싹쓸이 해버리는 식이다.
"배터리도 마찬가지인가?"
"아쉽게도 그렇습니다."
고성능 모바일 프로세서에 컬러 LCD를 탑재하고도 8시간은 재생 이 된다. 리튬 배터리의 힘이었다. 기능이 훨씬 단순한 아이팟에 달면 연속 재생시간이 더더욱 늘어난다. 그렇지만 리튬 배터리를 만드는 업 체 중 대량 생산이 가능한 곳은 일 본의 산요 정도인데, 여기도 유재 원의 마수가 닿은 회사였다.
이밖에도 유재원이 거느린 회사 들은 수없이 많았다. 예전엔 무의 미한 투자인것처럼 보였는데, 지금 와서 보니 이것들이 결합해 내는 시너지 효과가 어마어마했다.
당연히 라이브팟은 초도 물량은 전량 매진일 만큼 인기였다. 예약 물량도 상당했다는 소문이다. 이 기세라면 겨우겨우 카세트테이프를 밀어냈던 CD의 시대는 잠깐의 영 광 일뿐, 21세기는 디지털 음원의 세상이 될 것만 같았다.
"언제까지 뒤따라 갈 수만은 없 어."
스티브 잡스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스티브는 며칠 전 발표 한 IDDC 98을 넋 놓고 보았다. 타 임플릭스부터 넥스트뮤직과 라이브 팟까지 입이 떡 벌어지는 것들의 향연이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고 난 지금 되돌아보니 살짝 틈이 보 였다.
"아이튠즈는 어떻게 되고 있나?"
"순조롭습니다. 0.9.365 버전까지 올라왔고, 버그 리포트도 거의 없 습니다. 아이팟과 함께 발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나마 긍정적인 보고에 스티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티브가 본 틈이란 바로 음원 관리 프로그램의 부재였다. 다운받 은 음원이 좀 적으면 그나마 관리 할 수 있지만, 수천수만 곡 단위가 되면 이걸 일일이 관리한다는 건 불가능이라고 보았다.
아이튠즈는 그걸 가능하게 해준 다.
더욱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CD도 컴퓨터에 넣으면 자동으로 리핑해서 디지털 음원 라이브러리 에 추가해준다. 심지어 곡의 정보 들, 이를테면 가수의 이름과 앨범이름, 트랙 제목 등을 따로 입력할 필요 없이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자 동으로 매칭해서 입력해주는 기능 도 담고 있었다.
특히 스티브의 아이디어에서 시 작해 야심차게 만든 동기화 기능은 기기와 컴퓨터 사이의 파일관리를 보다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기능이 었다.
당연히 아이튠즈를 통해 정식 음 원 공급 사업도 할 생각이기에 유 니버셜 뮤직이나 폴리그램, 소니 뮤직 등과도 접촉해서 음원 공급 사업도 시작할 계획이었다.
이거라면 고급형은 무리더라도 보급형 시장은…….
머릿속에서 생각이 빠르게 진행 되던 스티브는 순간 생각을 멈췄다. 고급형은 무리라니.
애플의 명성에 누가 되는 이야기 였다. 원래 애플사는 오직 최고의 성능, 최고의 사용자 환경을 제공 하고 그에 걸맞은 대가를 받는 기 업이었다. 가성비 높은 보급형이라 는 건 애플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 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라이브팟을 상대로는 어쩔 수 없이 보급형이란 멍에를 짊어쩔 수밖에 없었다. 포장의 달인인 스티브라고 해도 라이팟과 아이팟 두 개를 딱 놓고 보면 무엇이 고급형인지는 한 눈에 차이가 나버리니 말이다.
"다음엔, 기필코."
스티브는 진정한 승부는 다음이 라고 생각했다. 아이팟보다 몇 십 배는 더 거대하고, 세상에 크나큰 영향을 주는 아이템이 있다.
아직은 스티브의 머릿속에서만 구상된 아이템이지만, 이것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스티 브의 눈빛이 무섭게 타올랐다.
IDDC 98을 성황리에 마친지 며 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9월이 되었다.
그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유재원의 경우엔 2차 일본 침공이 라는 말이 나올 만큼 일본의 회사 들을 사들이는 작업이 제일 컸다.
IMF구제 금융 신청까지 가진 않 았지만, 경제적 타격이 큰 일본에 는 떨이로 나오는 좋은 매물들이 많았다. 게다가 적대적 M&A에도 취약해서 리스트에 오른 기업들 중 상당수는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신일본투자은행이 유재 원을 대리했는데, 예전과 다른 점 이 있다면 만화나 캐릭터 같은 문 화 콘텐츠를 적극 매입한다는 것이 었다. 적어도 일본의 3대 출판사 중 하나는 신일본투자은행으로 가 져 오겠다는 계획이다.
이걸 가지고 일부 미디어에서는 일본만화를 보고 자란 슈퍼리치가 본인의 취미생활을 보다 알차게 즐 기기 위해 돈 낭비, 심하게는 돈지 X을 한다는 식으로 쓰기도 했다.
특히나 한국에서 이런 식의 보도가 많았다. 콘텐츠의 중요성도 모르고 미래도 볼 줄 모르는 자들의 사소 한 태클은 깔끔하게 무시하는 게 정답이다. 게다가 한국의 대한일보 같은 일부 언론사는 언제 한번 봐 줄 타이밍을 재고 있으니, 그때 몰 아치면 된다.
미국에서 가장 큰 화제가 된 이 슈는 클린턴 청문회였다. IDDC 98 에서 발표한 신제품들이 잘 팔려나 가곤 있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확 잡아끈 것은 클린턴의 성추문이었 다.
청문회 때 당연하게도 '부적절한관계'라는 말이 나왔고, 크게 화제 가 되었다.
다행히 탄핵까지는 치닫지 않았 다.
스캔들을 인정하면서 대통령으로 서의 체면이 확 깎이긴 했지만, 거 짓말 논란에서 벗어나면서 대통령 직은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잃어버린 권위를 되찾기 위해서 클린턴은 외교에 힘을 쏟았다. 외 국 정상들과 만날 때에는 대통령으 로서의 권위가 확실히 살아났으니 말이다.
당연하게도 클린턴 대통령의 외교 행보 중에 가장 집중된 곳은 한 국이었다. 북한과의 종전선언 논의 가 급물살을 타면서 북미 정상회담 이 성사되었고, 일사천리로 종전선 언까지 이어졌다.
장소는 남북 분단의 상징인 판문 점이었다.
그곳에서 전명헌 대통령, 클린턴 미국 대통령, 그리고 북한의 김정 일 국방위원장이 휴전 협정이 종전 으로 마무리되었음을 선언했다.
종전선언의 다음 순서는 평화협 정이겠지만, 그것은 북한의 전향적 인 태도에 따라 진행 속도를 조절하기로 했다.
곧이어 다음 날, 전명헌은 청와 대 춘추관에서 남북 분단의 현실을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통일을 지향하며, 독재의 잔재를 떨쳐내고 21세기 한국을 대비할 새로운 헌법 의 필요성을 발표했다.
여의도에서 설로만 흐르던 개헌 이 공식적으로 언급됐고 그 후폭풍 은 어마어마했다.
세기말 롤러코스터의 시작이었 다.
#375. 노스트라다무스
-한반도의 새로운 평화 체제와 이제 곧 다가올 새천년을 대비하기 위해 국회는 개헌 논의를 시작해 주시길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저 또한, 국회를 방문하여 국민의 대 표인 국회의원들을 만나 직접 말씀 을 드리겠습니다.
텔레비전 속 전명헌 할아버지는 비장한 표정으로 개헌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청와대 춘추관에서 말하 고 있었다.
"와, 할아버지. 대통령 다됐네."
서재에서 인터넷 스트리밍으로 한국 방송을 지켜보던 유재원은 감 탄이 절로 나왔다.
92년 총선 때, 갑자기 국회의원 에 출마해 아무것도 몰라 생초보 티를 팍팍 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 모니터 속에 있는 전명헌은 누가 봐도 대통령이었다.
그것도 70%가 훌쩍 넘는 강력한 국민의 지지를 받는 대통령.
작년만 해도 IMF 구제 금융 신 청으로 나라가 망할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 여파를 빠르게 회복 중이었다. 물론 망하는 회사도 많고, 인수 합병되는 회사도 많았지만, 살아남은 회사들은 구조조정을 통 해 체력을 보충했고, 세계 경제 호 황에 따라 수익도 서서히 회복 중 이었다.
무너진 기업들이라고 해도 완벽 히 공중분해가 되는 경우는 잘 없 었다.
대호 그룹만 봐도 부실이 심한 몇 개의 계열사만 제외하면 대부분 은 새로운 주인을 찾게 되었다. 그 렇게 한국에서 제일 활발하게 기업 들의 인수나 합병을 추진하는 세력 중 가장 눈에 띄게 활동하는 곳은 당연히 백호 펀드였다.
대호와 같은 거대한 재벌이 해체 되었음에도 여파가 그나마 작았던 것은 백호 펀드의 힘이었다. 더욱 이 대호 전자와 같이 어느 정도 기 반이 갖춰진 기업의 경우엔 빠르게 정상화가 되었다.
IDDC 98에서 발표된 두 개의 신제품 라이브팟과 트루 시네마 디 스플레이의 예약 물량 제조를 위해 서 대호 전자의 생산 라인이 24시 간 불야성이 된 것이다.
백호 펀드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 해외에서 들어온 자본들도 이삭 줍기를 빠르게 진행 중이었다. 예전 같으면 인수 가격을 후려쳤을 테지 만, 백호 펀드라는 경쟁자가 있었 기에 인수 가격을 그렇게까지 깎지 도 못했다.
재벌들이나 사주에겐 자신들의 기업이 무너지는 건 악몽일 테지만, 정부로서는 백호 펀드가 뭔가 거대 한 사회적 안전망처럼 느껴지는 터 라 과감한 개혁과 구조조정을 실행 할 수 있었다.
덕분에 IMF를 신청한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조기 졸업 이야기가 솔솔 나올 정도였다.
물론 전명헌이나 유재원은 IMF 를 조기에 졸업할 생각은 없었다.
IMF 체제는 국민과 기업에게는 조금 가혹한 체제지만, 이 시기에 는 정부의 영향력이 기업을 능가하 는 확실한 시절이기도 했다. 그렇 기에 경제 개혁을 위해서는 IMF의 영향력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