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권 21화
"좀 됐어요. 음, 처음 시작한 건 재작년부터 였나?"
한국 정부와 한국 사람들이 IMF 의 충격을 벗어나기 위해 정신이 없을 때부터, 유재원은 동해나 독 도 문제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았다. 국제해사기구에 전부터 동해와 독 도 문제에 대한 팩트 체크를 요청 하기도 하고, 자료도 보냈다.
스페셜 팀이 수집하는 자료에는 일본의 제국주의시절 만행뿐만이 아니라, 독도나 동해에 관한 것들 도 있었다.
세상 모든 일이 갑자기 누군가의 호의로 바뀌진 않는다. 이렇게 오 래전부터 노력하고서야 드디어 빛 을 보는 것이다. 이것도 일본이 경 제적 타격으로 어마어마한 손실을 보고서야 한 발 뒤로 물러선 것이 지, 유재원의 일본 공략이 성공하 지 않았더라면 글자가 바뀌는 건 아마도 더 미래의 일이었을 것이다.
"자세히 좀 말해 보거라."
전명헌은 속사정을 제대로 알고 싶었던 모양이다. 유재원에게 상반 신을 기울일 정도로 궁금증이 컸다.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유재원도 전명헌이라면 대강의
흐름은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 다. 그래서 일본 공략에 대한 간략 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이야기가 진행될 때마다 전명헌 의 얼굴은 시시각각 달라졌다. 일 본의 신뢰성에 타격을 주었던 몇 가지 방식에 관해 설명하니 무릎을 탁, 치기도 했다. 그러면서 살짝 동 의할 수 없는 말도 하셨다.
"그냥 보도되었으면 며칠 떠들썩 하고 말 것을 이렇게 엮어 활용했 구나. 참 장하다."
겨우 며칠이라니.
유재원이 봤을 때는 그 충격은
최소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을 끌 일이었다. 단적으로 고베 강철과 셰브롱의 소송전은 둘 사이에 손해 배상에 대한 자체적인 합의가 일어 나지 않는 한은 몇 년은 갈 논란이 었다.
반대로 유재원의 이야기에 전명 헌이 펄쩍 뛰는 일도 있었다.
"응? 뭐라? 겨우 글자 몇 개 바 꾼다고 수백수천억 원을 양보했단 말이냐?"
조금 전까지는 독도라는 이름을 찾아온 것에 대해 그렇게 좋아하던 전명헌이 맞나 싶었다. 그런데 그 거래의 이면에 클린턴의 중재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자 펄쩍 뛰었다.
"수백억 원이라뇨. 그건 누구도 모르는 거예요."
하루하루 폭락하는 일본의 경제 라고는 해도, 언제 반등이 터질지 는 모르는 법이었다. 조지 소로스 나 다른 헤지펀드들이 일제히 이탈 을 시작하면 바로 반등하는 것이니 말이다. 실제로 지금 일본의 닛케 이 지수는 최저점인 12,400포인트 를 찍고 나서 큰 폭으로 반둥 중이 었다.
공매도 청산을 위해서 주식을 매 입해야 했고, 건실한 기업인데도 폭풍에 휘말려 과대 낙폭한 종목들도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 모든 게 돈이 많 다고 살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유재원은 CIA의 지도를 흔들며 말했다.
"수천억 원이 있다고 해서 CIA 의 레퍼런스 지도에 올라갈 지명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잖 아요."
전명헌은 유재원의 반박에 할 말 을 잃었다.
타이밍이 맞아야만 살 수 있다는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던 탓이 다.
"그리고 제가 대가로 받은 건 지 도 한 장이 전부가 아니에요. 그거 말고도 여러 가지가 더 있거든요."
CIA의 레퍼런스 지도에 한 번 올려주고 말기에는 유재원이 받아 야 할 대가로는 너무 부족했다. 이 건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곧이어 유재원은 이번에 청와대 에 들어왔을 때 철저하게 검사를 받았던 서류 가방을 열었다.
"앞으로 북한과의 대화에서 참고 하시면 좋을 거예요."
서류 가방에서 나온 건 한 권의 책이었다.
"라이징 차이나?"
동아시아 전략 연구소의 에드 로 이스 소장은 능력자가 확실하다.
유재원이 책을 내보자고 제안을 한 게 한 달하고도 조금 전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그럴듯한 책을 써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중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기에 바로 대량으로 찍기 시작한 건 아니고, 검수 중이었는데 유재원이 봤을 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청와대 에 오기 전에 한 권을 만들었고, 그것이 지금 유재원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다.
"21세기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그에 맞춰 우리나라의 국익을 극대 화할 수 있는 방법을 예상해 본 거 예요. 제가 운영하는 동아시아 전 략 연구소의 로이스 소장님이 쓴 거고요."
두툼한 두께에 살짝 멈칫했던 전 명헌은 유재원이 거느리고 있는 연 구소에서 나온 책이라고 하니 흔쾌 히 받았다.
"그리고 이건 요약본이고요."
당연히 유재원은 요약본을 따로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라이징 차이나의 핵심 내용을 담았고, 글자 크기도 24포인트로 노 안인 전명헌이 읽기 편하게 편집도 했다.
"고맙구나! 역시 나라 생각하는 건 재원이 너뿐이다!"
클린턴과 마찬가지로 요약본을 크게 반기는 전명헌이다.
"그나저나, 그 돈은 이제 어디에 쓸 거냐?"
그러면서도 돈에 대한 미련은 끝 내 놓지 않았다.
평생을 돈을 따라다니며 사신 분 이니 이렇게 물어보는 건 당연한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전명헌은 대통령이라는 본분도 잊지 않았다. 게다가 돈에 대한 흥미가 있다는 것이지, 돈을 더 벌겠다는 욕심은 없었기에, 국가를 자신의 가업으로 보고, 제 주머니를 채우는 것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음, 생각 중이에요. 일단 소득세 부터 내야죠."
유재원이 회귀 전부터 세웠던 원 칙이 바로, 세금처럼 마땅히 내야 할 돈이 있으면 다 내면서 착실히 돈을 벌겠다는 것이었다.
이번 일본 공략에서 434억 달러 의 수익이 났다. 여기서 소득세로 대략 30%를 뗀다고 치면 대략 130억 달러였다.
이처럼 벌어들인 돈이 많을수록 소득세도 덩달아 늘어나면서, 살짝 마음이 쓰이긴 했다. 하지만 유재 원은 자신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뭐? 소득세만 130억 달러라고?"
"이거면 숨통이 좀 트이겠죠?"
"숨통이 트이는 정도가 아니지. IMF로부터 또다시 돈을 융통할 필 요도 없어지는 거지. 아니다! 아예 빌린 돈을 갚아도 되겠다!"
전명헌의 호들갑에 유재원은 고 개를 끄덕였다.
이런 반응이면 세금을 착실히 낼 맛이 난다. 기껏 생각해서 세금을 냈는데, 엉뚱한 데 쓰이면 참 마음 이 착잡하기 이를 데 없으니 말이 다. 전명헌은 그래도 당장 이 돈이 어디에 쓰여야 가장 효과가 좋을지 알고 있었다.
"결산이 끝나면 바로 낼게요."
"그래도 괜찮겠냐?"
종합소득세는 다음해 5월까지만 내면 된다. 그때까지 은행에 넣어 놓기만 해도 이자가 어마어마하했 다. 하지만 치국도 유재원의 원대 한 목표였기에 나라 사정을 생각해서 일찍 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무엇보다 이번에 벌어들인 돈은 티파니의 말대로 쉽게 번 돈이었다.
일본 공략을 위해 열심히 세팅을 하기도 하고, 판돈 100억 달러도 모두 잃을 각오를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쉽게 번 돈이라는 건 틀림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이번에 번 돈은 모두 일본에서 뜯어온 돈이라 서, 애착이라는 게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물론 돈은 그냥 다 같은 돈이지 만, 유재원도 사람인지라 차별이 생겨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만약 티파니처럼 모래밥 먹으면서 땅을 파 벌어들인 돈이었다면 세금을 내 는 것이 너무도 아깝게 느껴질지 모른다.
이후 전명헌과의 독대는 훈훈함 자체였다.
IMF에서 빌린 돈도 아니고, 순 수한 세금으로 130억 달러가 들어 오면 이야기가 확 달라진다. 국회 의 동의를 받아야겠지만, 국회는 연정을 통해 과반을 확실히 확보했 다. 그러니 정부가 마음대로 처분 할 수 있는 돈이니 숨통이 확 트이 다 못해 그동안 손가락만 빨던 사 업들을 다시 추진할 여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급한 건 대양 해군을 위한 이지스 구축함을 도입 하는 KDX 사업과 노후화된 F4를 대체할 차세대 전투기 도입 사업인 FX 사업이었다.
북한과의 화해 무드가 지속되고 있지만, 언제 상황이 바뀔지 모르 는 법이었다. 게다가 중국이나 일 본, 러시아 등 주변국이 모두 자타 공인 군사 강국이었다. 일본은 군 대가 아닌 자위대이긴 했지만, 객 관적인 전력으로는 한국보다 우위 에 있었다. 특히 해양 전력은 비교 하는 게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렇기에 자주국방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최첨단의 전력을 빠르게 채우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 렇게 해서 나온 결론이 해군에는 이지스 구축함을 중심으로 하는 대 양함대를 구성하는 것이었고, 공군 에서는 4세대 전투기의 대량 도입 이었다.
문제는 IMF였다.
외환위기로 나라의 경제가 파탄 이 났는데, 무슨 첨단 병기란 말인 가. 계획의 축소는 당연했고 도입 자체가 불투명해지기까지 했다. 이 런 상황에서 유재원이 터트린 잭팟 은 KDX와 FX 사업을 부활할 수 있게 해줄 정도였다.
"어서 빨리 다른 기업들도 얼른 정상화되어서 활발하게 활동하면 좋겠네요."
이어진 유재원의 말이었다.
여기에 담긴 속뜻은 다른 기업들 도 유재원 본인처럼 내야 할 세금 을 꼬박꼬박 내었으면 좋겠다는 말 이기도 했다.
"험험, 당연히 그래야지. 잘될 거 다."
전명헌도 유재원의 말에 담긴 속 뜻을 읽지 못할 수가 없었다.
한국 제2의 그룹이었던 일성 그 룹도 일성 전자의 파산으로 난리가 난 상태다. 예전부터 그룹의 중심 을 일성 자동차로 바꿔 놓은 덕에 일성 전자의 파산이 일성 그룹 전 체의 붕괴로 이어지진 않았다. 그 렇지만 일성 전자에 출자를 했던 계열사들은 수많은 손실을 떠안게 되었다. 게다가 자동차라도 잘 팔 리면 다행인데, IMF 체제에서 자 동차가 잘 나갈 리가 없었다.
그나마 한국에서 제대로 굴러가 는 토종 기업은 미래 그룹뿐이다.
그런데 미래 그룹이라고 해서 세 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 니었다. 일성처럼 심한 건 아니었 지만, 전명헌에게서 헛기침이 나올정도로 해먹긴 했으니 말이다.
"아, 그렇다고 벌 받아야 할 사 람들 풀어주는 건 더 안 될 말이고 요."
경제가 힘들어지면 감옥에 겨우 보내놓은 경제인들을 풀어주는 게 한국의 전통(?)이었다. 유재원은 그 게 경제랑 무슨 상관인 것인지 지 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경 제사범을 그렇게 쉽게 풀어준다는 건, 한탕을 꿈꾸는 경제사범 꿈나 무들에게 용기를 심어주는 것과 다 름이 없었다.
"그럼! 그래야지. 그 점에 있어선 걱정 말거라."
다행히 엄벌에 있어서는 전과 달 리 장담할 수 있는 전명헌이다.
다음 날.
유재원은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마지막 남은 스케줄을 소화했다.
ID 글로벌헤드쿼터 빌딩에서 사 장단 회의를 직접 주재하는 일이었 다.
이번 사장단 회의는 그동안 한국 에서 행해진 ID 그룹의 경영에 대 한 점검부터 각종 기획서나 단기 계획 등을 보고 받기 위해 만든 자 리였다.
ID 톡이나 ERP를 통해 원격으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만능은 아니 었다. 이렇게 모여서 유대감을 다 지는 것도 가끔은 해줘야 하는 일 이었다.
여기에 더불어 회의의 방식은 완 벽히 한국식이었다. 미국도 격식이 있긴 한데, 그렇게 꽉 짜여 있는 건 아니었다. 반면 한국은 유재원 의 자리로 상석이 만들어졌고, 배 석할 임원들의 자리는 마치 조선이 벼슬의 품계를 따지는 것처럼 직책 에 따라 차례대로 앉았다.
그렇지만 다른 기업들에 비하면 ID 그룹의 회의 시간은 그렇게 부 담이 큰 자리는 아니었다. 직책이 제일 높은 유재원이지만, 사장들이 나 임원들의 어른 대우는 확실히 해주었다. 높임말이 기본이었고, 인 격적으로 존중해줬다. 재떨이가 날 아다닌다는 회사들과는 차원이 달 랐다.
당연히 첫 번째 발제자는 ID 그 룹 부회장이자 백호 펀드의 최고 관리자인 최강욱이었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