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461화 (461/1,007)

23권 20화

다음 날.

유재원은 한국에 도착했다. 사전 에 공지된 입국도 아니었기에, 공 항은 쾌속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전세기도 기종이 바뀐 지 얼마 되 지 않아서 ID 그룹의 로고나 컬러 가 적용되기 전이었다.

덕분에 유재원은 빠르고 조용하 게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렇게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아산 종 합병원으로 곧장 움직였다.

아산 종합병원은 미래 그룹 산하 아산 사회복지재단 소속의 의료법 인으로 전명헌이 개인 재산을 출연하여 설립한 병원이었다. 지방의 의료 취약 지역에 양질의 의료 시 설을 공급한다는 취지로 시작되었 기에, 서울보다는 지방에 먼저 병 원들이 세워졌을 만큼 공익성이 강 했다.

그렇다고 실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최고의 시설과 의료진을 갖추고 있었고, 일성 의료법인과 질과 양 으로 늘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만큼 우수한 병원이었다.

VIP를 위한 시설도 서울에서 제 일 좋았다. 미래 그룹의 로열패밀 리들이 입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특실을 만든 것인지 몰라도, 몇 몇 비밀스러운 특실은 5성급 호텔 스위트룸이 부럽지 않은 시설을 자 랑했다.

분명한 건 특실의 구성이나 인테 리어는 전명헌 스타일은 확실히 아 니었다. 이미 뼛속까지 아끼는 게 생활화된 전명헌이니 이런 화려한 곳에서 생활하는 것에 오히려 더 불편함을 느끼실 테니 말이다. 그 렇지만 일성 병원과의 라이벌 관계 도 있고, VIP들의 입원을 위해 특 실을 만드는 건 충분히 용인할 수 있었다.

교장 선생님도 전명헌과 같이 검소한 성격이었으니, 분명 특실에 입원하는 건 거부하셨을 것이다.

유재원은 교장 선생님이 괜한 곳 에 데려 왔다고 타박하는 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의식을 잃고 인공호 흡기에 기대어 누워 계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매우 좋지 않았다. 게 다가 예전에 봤던 모습과 달리 병 색이 완연하게 보일 만큼 홀쭉해진 모습이라 더욱 그런 게 있었다.

교장 선생님을 한참이나 지켜보 다가 나오니 유재원의 어머니와 아 버지가 와 계셨다. 그리고 교장 선 생님의 주치의로 보이는 중년의 의 사 선생님도 있었다. 부모님이야 유재원이 올 줄 알고 계셨지만, 의 사 선생님은 매우 놀란 눈치였다.

"선생님의 병명이 뭐예요?"

"췌장암이란다."

어머니가 교장 선생님의 병세에 대해 바로 설명했다.

"췌장암이요?"

상상도 못 한 병명이었다.

유재원이 크게 놀라자 주치의의 설명이 이어졌다.

"예, 회장님, 췌장암이라는 건 췌 장, 그러니까 이자에 생긴 암을 말 합니다. 발생 빈도가 높은 것은 아니지만, 발병하면 치유가 어려운 암이기도 합니다. 일찍 발견할수록 회생 가능성이 높은데, 안타깝게도 이동식 환자계서는 말기에 병원을 찾으셨습니다. 지금은 최선을 다해 보겠다는 말밖에 해드릴 수 없겠습 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주치의의 말이었다.

췌장암은 유재원도 나름 잘 아는 병이었다. 스티븐 잡스가 이 병으 로 세상을 떠났던 탓이다. 말기라 면 몸 전체로 암이 전이되었다는 말이니, 웬만한 암이나 난치병에 대해 미래의 치료법을 다 아는 유재원이도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유재원 회장, 급거 귀국!

-정치, 재계 관계자들 유 회장 행보에 촉각!

-전명헌 대통령의 성공적 방미에 유 회장의 영향력 있었다는 건 모 두 아는 사실-제2의 정계 개편 신호탄?

다음 날 뒤늦게 유재원의 한국 입국 소식이 매스컴을 탔다.

비서실에서 따로 보도자료를 뿌린 게 없었던 탓에, 언론사마다 그 이유를 추측해 본다고 헛다리만 집 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뒤늦게 청와대에서도 전화가 왔 다. 같이 가자고 할 땐 싫다더니 무슨 일로 한국에 급히 들어왔는지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이동식 선생님이라고 계세요. 제가 제일 존경하는 은사님이 위독 하시대요."

전명헌에게는 입국의 경위에 대 해 솔직하게 설명을 하는 유재원이 다.

-아아! 그분이라면 나도 알고 있다. 큰일이구나. 잘 회복되길 기원 하마. 그리고 출국 전에 연락은 꼭 하거라.

"예, 할아버지도 건강 잘 챙기세 요."

교장 선생님이 쓰러진 걸 보니 유재원은 전명헌의 건강도 절로 걱 정이 되었다. 나이로 따지면 전명 헌은 교장 선생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다. 게다가 대통령 직을 수행 하기 위해 동나이대의 사람들보다 활동량도 월등히 많았다.

-흐흐, 나야 건강함 빼면 시체 지. 게다가 청와대 안에 주치의도 상주하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너무 자신만만하면 안 돼요. 나 이만큼 확실한 지표도 없잖아요"

-그래그래, 잘 알겠다.

유재원의 거듭된 당부에 전명헌 도두 손을 들었다.

다만 대답은 쉽게 하고, 실제로 는 바뀌지 않을 확률은 훨씬 높았 기에 유재원도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전명헌이 전생에 유명을 달리했던 날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 으니 말이다. 그나마 기대해 볼 수 있는 것은 청와대 시스템이다. 대통령의 건강은 곧 안보와도 직결되 는 사안이었다. 그러니 24시간 의 사가 지켜보면서 건강을 체크해줄 테니, 교장 선생님처럼 중대한 예 후를 놓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봐 도 될 것 같다.

1998년 7월 12일.

프랑스가 생드니에서 브라질을 3 대 0으로 꺾으며 피파 월드컵 트로 피를 들어 올리던 날, 교장 선생님 은 하늘로 돌아가셨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유재원 은 여러 가지 상실의 느낌을 받았 다.

교장 선생님은 회귀 전에는 연결 고리가 매우 희미했던 분이었다. 어린 학생이 말도 붙여보기 힘들었 던 높으신 선생님이었다. 그때의 선입견이 지금도 남아 있긴 했지만, 지금 유재원의 기억에 남은 교장 선생님은 회귀 전과는 180도 달라 지신 분이었다.

교장 선생님 덕분에 회귀 전에 알고 있던 사람들에 대해 무작정 고정관념을 가지면 위험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사람의 모습은 입체적이었으니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걸 인지하게 되었다.

그런 교장 선생님이 돌아가시니 매우 울적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런데 교장 선생님이 유재원을 위해 남겨주신 건 그것 말고도 또 있었 다.

유재원을 위한 유서였다.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다. 높은 위치에 올라설수록 자만을 경계하 고, 벌어들인 게 커질수록 나눔도 게을리 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당 장은 자기의 몫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여도, 나중에 모두 다 덕이 되어 서 돌아올 거라는 말씀이었다.

평소 하시던 말씀이 그대로 담겨 있었지만, 유재원에겐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심지어 교장 선생님은 가시는 날 까지도 본인의 말을 지키셨다. 교 장 선생님의 유산 목록 중에 가장 가치가 있는 소유의 ID 테크놀로지 우선주를 덕진 국민학교, 여주 중 고등학교 그리고 지역사회의 조그 마한 공동체에 모두 기부하신 것이 다.

교장 선생님의 자식들이 없는 것 도 아니었다.

매년 수백억 원, 사업이 잘되었을 때는 천 단위로 배당이 터지는 우주 최강의 배당 주식인데도 자식 에게 물려준 게 아니라 사회에 환 원을 하신 것이다. 심지어 ID 파운 데이션에도 일부 주식을 주셨을 정 도다.

그렇다고 교장 선생님 본인의 자 식의 몫을 야멸차게 생략한 건 아 니다. ID 테크놀로지로부터 꼬박꼬 박 나온 배당금으로 마련한 집이라 든가, 각종 부동산은 상당 부분 그 대로 상속되었다.

부모 자식 사이에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이 때문에 교장 선생님의 선의가 약해지는 건조금도 없었고, 유재원도 찡하게 오는 뭔가가 분명히 있었다.

일본 공략 성공으로 생겨난 여유 자금은 무려 534억 달러였다. 여기 에 ID 그룹이 벌어들이는 수익금도 상당히 쌓여 있었다. 세금 낼 거 내고, 주주들에게 배당할 만큼 하 고도 유재원이 가져갈 돈은 상당했 다.

그걸 어디에 써야 잘 썼다고 할 지 고심 중이었는데, 나눔에 대해 선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유 재원은 ID 파운데이션 하나로 충분 하다고 생각했었다. ID 그룹 계열 사들이 만든 순수익 중에 일부를 매년 ID 파운데이션에 기부했고, ID 파운데이션은 그렇게 받은 기부 금을 다음 해 모두 사용하는 방식 으로 운영했다.

받은 기부금을 다음 해에 모두 사용하는 식으로 운영되는 재단은 아직 ID 파운데이션 말고는 없었 다. 꾸준하게 일정 액수가 들어올 거라는 확신이 없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방식이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재단의 규모는 작아도 그 존재감은 세계 최고 수준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자신감에서 나 올 수 있었다.

그런데 유재원도 ID 파운데이션이 있으니 나눔은 따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한편에 있었 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살짝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당장 기분 내키는 대로 돈을 뿌리겠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돈 귀하다는 건 누구보다 구구절 절하게 잘 아는 유재원이었다. 기 왕 쓰고자 한다면 최고의 효과를 발휘하는 방식으로 쓰고 싶었다. 더욱이 일본에서 뜯어온 돈이니 일 본과 관련이 있는 일에 쓰면 괜찮 을 것 같다.

그렇게 유재원은 교장 선생님의 장례식은 물론이고, 입관식까지 모두 참석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당 연히 출국 전에 전명헌 할아버지를 만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상심이 크겠구나. 국가적으로도 참교육자를 잃은 게 애석하구나."

전명헌 할아버지도 교장 선생님 을 높이 평가했다. 물론 전명헌이 교장 선생님에 대한 여러 가지 평 가 중에서 가장 높이 사는 건, 역 시나 유재원의 컴퓨터 특기를 살릴 수 있게 힘을 써준 것이었다.

방미를 통해 유재원의 존재감에 대해 확실히 깨달은 바가 있던 전 명헌은 교장 선생님의 선구안에 대 해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교장 선생님의 이야기는 마무 리 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건 도대체 어 떻게 바꿔놓은 것이냐?"

곧이어 전명헌은 도저히 궁금증 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종이 두루 마리 하나를 꺼내면서 물었다.

그것은 지도의 최상단에 CIA 마 크가 선명하게 박힌 동아시아 지역 의 정밀 지도였다.

CIA의 지도라니.

이걸 처음 보는 사람은 CIA에서 기념품이라도 파나 싶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대표 정보기관인CIA는 첩보나 공작뿐만이 아니라, 정보 수집 활동도 활발하게 하는 조직이었다. 그런 CIA가 자체적인 인공위성을 이용해서 정밀한 지도 를 만드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었 다.

이렇게 만든 정밀 지도는 미국의 각종 기관에서 활용하며 정책에도 반영이 된다. 그렇기에 CIA는 지도 의 업데이트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번에 전명헌이 미국서 받아온 지 도는 7월 초에 나온 최신 버전이었 다.

"나는 클린턴이 무슨 생각으로 지도를 줬는지 몰랐다. 그런데 이걸 보고 깜짝 놀랐지 뭐냐?"

전명헌은 손가락으로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뭉툭하고 거친 전명헌의 손가락 이 찍고 있는 곳에는 대한민국의 동쪽 바다에 있는 두 개의 섬인 울 릉도와 독도가 있었다.

지도에도 독도라는 이름이 선명 하게 박혀 있었다.

"비서실장이 보더니 깜짝 놀라더 구나. 독도. 우리야 늘 독도라 불렀 지만, 미국은 아니었다고 하더라."

"맞아요."

CIA에서의 독도에 대한 표기는 독도가 아니고 다케시마도 아닌 리 앙쿠르 바위섬이라는 이상한 단어 였다. 이는 1849년 프랑스의 포경 성 리앙쿠르호가 발견했다고 붙여 진 이름인데, 독도의 소유권을 희 석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였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CIA의 지도 는 독도라는 명칭이 정확히 붙어 있었다.

"여기, 동해도 있단다."

동해도 빠지지 않았다.

안타까운 점은 동해라는 글자는 일본해와 병기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해도 그냥 독도처럼 단독으 로 명기가 되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독도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 게 사용된 터라 단번에 바꾸기는 무리였다.

"재원이 너는 이걸 언제부터 신 경쓴 거냐?"

감탄을 금하지 못한 전명헌은 유 재원을 바라봤다. 전명헌의 눈빛에 는 그야말로 자랑스러움이 듬뿍 담 겨서 넘쳐흐를 정도였다. 이번 지 도도 그렇고, 동아시아 외환위기는 남들 이야기인 것처럼 독야청청했 던 일본도 크게 한 방 먹여주고,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 들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저런 눈빛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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