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460화 (460/1,007)
  • 23권 19화

    "응? 그러면 도박이나 다름이 없 다는 이야기잖아. 세상에! 판돈 100억 달러라는 건 우리 외할아버 지라도 상상할 수 없는 숫자야!"

    "도박이라니, 그건 오로지 확률 로만 하는 게임이지만, 이건 다르 지. 나나 ID 인베스트먼트의 투자 매니저들이나 닛케이 지수가 하락 할 거라는 건 예측했거든. 게다가 일본이 안고 있던 불확실성도 미리 알고 있었고."

    미리 알고 있다는 것. 그러면 외 부에서 아무리 도박같이 보이는 것 이라도 합리적인 투자가 될 수 있 다.

    " 진짜?"

    "응! 외할아버지께 물어봐."

    "외할아버지? 설마!"

    유재원이 프레더릭 테일러 2세를 언급하자 티파니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더니 금세 토끼처럼 눈이 크게 떠졌다. 그 모습이 어찌 나 귀여운지 꼭 안아주고 싶을 정 도다. 하지만 유재원은 티파니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시간을 줬다.

    "고베 강철 스캔들이 자기 작품 이었어?"

    역시 티파니는 바로 맥을 짚었 다.

    후지산 붕괴의 시작은 고베 강철 의 품질 조작 스캔들이었다. 이후 로 워낙 큰 사건들이 뻥뻥 터져서 이젠 묻혀 있는 상태였지만, 일본 이란 금자탑의 단단했던 기초가 무 너진 첫 사건은 셰브롱의 고베 강 철 품질에 대한 이의제기부터였다. 보통 사람들은 이 사건과 유재원과 연관하는 사람은 없지만, 티파니는 연결고리를 찾았다.

    "품질 조작은 어떻게 알게 된거 야?"

    역시 티파니는 한 발 더 깊이 들 어왔다.

    "ID 테크놀로지에서 i웍스를 비 롯해 여러 컴퓨터 제품을 만들잖아. 그리고 다른 PC 제조 업체들과 달 리 통짜 알루미늄 합금을 절삭 가 공해서 케이스를 사용하고, 거기에 들어가는 합금은 모두 일본에서 조 달했어. 주문량이 적었을 땐 신일 본 투자은행이 거느린 소형 특수강 업체로도 충분했는데, 주문이 폭주 하면서 거래선을 늘렸거든. 그런데 이상하게 어느 한 곳에서 납품하는 게 품질이 떨어지는 거야."

    "그게 고베 강철?"

    "응! 그걸 보고 딱 알아차렸지."

    그렇지만 티파니가 그렇게 들어 을 줄 알았던 유재원은 훌륭한 대 비책을 가지고 있었다.

    TG 컴퓨터에는 납품받은 특수강 에 대한 품질 측정 데이터가 산더 미처럼 쌓여 있었고, 그걸 분석해 보면 고베 강철이 딱 드러난다.

    "다른 회사들은 왜 몰랐을까?"

    "메이드 인 저팬을 믿었겠지. 나 한텐 어림도 없었지만."

    티파니는 의문이 해소되자 얼굴 도 풀렸다.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도박 한 판에 100억 달러씩 거는 미친 녀석은 아니라는 게 확실해졌으니 한결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이 돈은 어디에 쓸 거 야'?"

    티파니의 물음에 유재원은 당장 뭐라고 대답할 게 없었다.

    일단 일본에서 대박을 터트리는 게 우선이었던지라, 돈을 따겠다는 생각만 있었지, 어디에 써야 할지 는 아직 미정이었다.

    심지어 마스터플랜에서도 마찬가 지였다. 1998년의 일본 공략에 대 해선 마스터플랜에서도 불과 몇 줄 의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을 뿐이다.

    티파니에겐 철저한 데이터를 바 탕으로 배팅했다고는 했다. 그런데 그렇게 완벽한 세팅이 이뤄진 투자 도 종종 실패하는 게 현실이었다. 시장에 참가하는 주체도 많고, 저 마다 목적도 다 다르다. 이들이 실 시간으로 온갖 변수를 다 만들어내 는 탓에 미리 세팅해 놨다고 해서 그대로 흘러가는 법은 없었다.

    그나마 이번에도 조지 소로스를 비롯해 여러 헤지 펀드들과 유재원 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덕분 에 유재원 연합이 일본에서 가장 큰 손이 되었고, 연합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환율과 닛케이 지수를 움직이게 하면서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에도 이럴 거라는 보장은 없다.

    어제까지도 친구였던 조지 소로 스가 나중엔 적이 될 수도 있는 게 현실이다.

    "흠, 이제 생각해봐야지. 일단 밥 먹으러 갈까?"

    티파니와 함께 모니터에 얼굴을 파묻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니 시 간이 금방 지났다. 투자 경과 그래 프라던가 은행 잔고를 보면 밥 안 먹어도 살 것 같은데, 법 먹을 때 가 되니 여지없이 배가 고파졌다.

    오늘만큼은 기름지고 자극적인 걸 먹고 싶은 유재원이다.

    며칠 후.

    실리콘밸리의 ID 테크놀로지 본 사가 분주해졌다. 샌프란시스코 경 찰은 물론이고, 양복을 입은 건장 한 사람들이 깔렸다.

    전명헌 대통령은 이틀 전 미국에 국빈 방문했다. 의외로 뉴욕에 제 일 먼저 들렸고, 이후 워싱턴 DC에서 공식 일정을 소화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전명헌 대통령 을 극진하게 대우했다. 일단 나이 부터가 전명헌이 훨씬 많았다. 영 어에는 높임말이 없다고 해서, 어 른에 대한 예의가 없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게다가 유 재원과의 약속한 것도 있었으니 이 전 한국 대통령들의 방미와는 확연 히 달라진 대우가 눈에 보일 정도 다.

    클린턴도 유재원과의 약속 말고 도 전명헌의 국빈 방문을 떠들썩한 행사로 만들 이유가 있었다. 다음 달 예정된 르윈스키 청문회에 앞서 대통령으로서의 존재감을 미국에 퍼트려야 한다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미국인 중에 한 명의 시선이라도 성추문에서 정치적인 이슈로 돌리 는 게 클린턴 대통령에겐 이득이었 다.

    덕분에 전명헌 대통령이 대신 전 하는 북한의 제안도 예전과 달리 진지하게 경청했다. 심지어 종전 선언에 대해서도 몇 가지 원칙에만 합의해준다면 얼마든지 해주겠다는 말이 나왔다.

    클린턴이 주장하는 원칙도 지금 북한이 잘 지키고 있는 것들이었다.

    핵개발 프로그램 폐기와 대량 학 살 무기인 생화학무기 동결과 같은 도발 중단이 골자를 이뤘다. 게다 가 예전과 달리 북한의 인권에 대 한 이야기는 뒤로 미뤄졌다.

    사실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개선 되지 않는 상황에서 인권에 대해 이리저리 이야기를 해봐야 실제 진 전이 일어나진 않는다. 오히려 가 장 중요한 인권을 그저 북한을 자 극하는 수사로밖에 쓰이지 않는다.

    클린턴 대통령은 김정일이 직접 말도 하고, 서명도 하면, 종전 선언 은 물론 연락 사무소 개설까지 일 사천리로 진행한다고 했다. 심지어이를 위해서 북한 방문도 할 수 있 다고 해서 전 세계의 주목을 한 몸 에 받았다.

    성추문 스캔들로 주목을 받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관심이었기에, 클린턴의 어깨가 한층 올랐다. 당 연히 클린턴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 는 미국 정치인이나 미국 국민들도 제법 있었다. 북한을 나라로 인정 하지 않는 보수 세력들이었다.

    그런데도 클린턴은 그들의 반응 까지도 기꺼이 즐겼다. 성추문을 가지고 공격받는 것보다는 100배 나은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전명헌이야 한미회담 내내 웃는 얼굴이었다.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 오만가 지 일을 하며 미래 그룹을 일궜고, 기어코 대통령까지 되어 미국에 국 빈으로 초대된 것만 해도 대단했다. 그런데 여기서 남북관계에 거대한 진전을 가져올 종전 협정도 한 발 자국 크게 내딛었다.

    아직 미국과 북한이 대화하기 전 이지만,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것 이었다. 제대로 된 선언이 나오기 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건 분명 했다. 하지만 남북 사이에 대결 국 면은 끝냈고, 남북경협은 본궤도에 올랐다.

    개성공단은 이미 공사 중이었고, 북한의 철광석과 석탄도 러시아를 경유해 한국에 조만간 들어오게 되 어 있다.

    북한에서 한국으로 다이렉트로 들여오는 게 좋지만, 한국과 북한 의 사이가 예전처럼 나빠지면 북한 산 석탄과 철광석에 의지하던 기업 들에 타격이 될 수도 있었다. 또한, 북한이 자원을 무기로 협상의 지렛 대로 삼을 수 있으니, 중간에 러시 아를 추가했다.

    북한이 채굴한 석탄과 철광석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한국으로 들어오는 루트였다. 러시아라는 중간 다리 하나가 생겼지만, 가격 경 쟁력은 충분하다.

    세계 원자재 시장은 상승 중이었 고, 한국은 외환위기로 외화가 부 족했다. 북한의 경우 식량이나 각 종 전자제품 등과 직접 교환할 수 도 있고, 설사 달러화를 준다고 해 도 그 가격은 국제 시세보다는 훨 씬 저렴했다.

    남북경협도 잘 되고 있고, 가장 큰 고비였던 미국과의 이야기도 잘 풀렸기에, 귀국 전 샌프란시스코에 들려 ID 테크놀로지의 본사를 둘러 보는 전명헌의 얼굴은 너무도 밝았 다.

    ID 그룹의 위상에 대해 그냥 귀 로만 들었던 것과 실리콘밸리 본사 에 와서 직접 보는 건 체감의 감도 는 천지 차이였다.

    더욱이 ID 테크놀로지의 신축 본 사가 완성된 지 1년이 채 되지 않 았으니 그야말로 으리으리하고 번 쩍 거렸다.

    겉만 그럴듯한 것도 아니다. 오 늘 행사를 위해서 하이테크연구소 에서 가져온 첨단 IT기기들의 프로 토 타입의 모습에 둘러보는 전명헌 은 물론 수행원까지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존재 자체가 극비인 진짜는 아이 템들은 하이테크연구소에 그대로 있고, 공개할 수 있는 것만 가지고 나왔는데도 반응이 좋았다.

    이어 전명헌 대통령과 유재원, 그리고 ID 테크놀로지의 임직원들 모두와 점심도 함께하면서 훈훈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다. 가장 돋 보였던 건 인종 구성이었다. 금발 백인부터 흑인, 동양인은 물론 인 도인와 러시아인까지도 다채로운 인종 구성을 자랑했기에, 낯설고도 이국적인 모습이었다.

    그렇게 전명헌 대통령의 미국 방 문은 성공으로 마무리했다.

    한국으로 떠나는 전명헌 대통령 은 유재원과 함께 한국에 가고 싶 은 게 내심 느껴지기도 했다. 유재 원도 아쉽지만, 할 일이 산더미처 럼 있었기에 나중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세상일이라는 건 정말 예측할 수 없다는 게 실감하 는 일이 일어났다.

    -재원아, 큰일났다. 선생님이 위 독하시단다.

    전명헌 대통령이 다녀간 다음 날, 어머니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교장 선생님이 위독하다는 연락 이었다.

    교장 선생님이라 하면 당연히 덕 진 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다.

    유재원이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물심양면으로 가장 큰 도움 을 주신 은인이었다. 그리고 몇 안 되는 ID 테크놀로지의 주주 중 한 분이셨다. 유재원의 안정적인 경영 권 확보를 위해 우선주로 변환된 상태이지만, ID 테크놀로지가 이익 을 배당할 때 우선주 몫으로 배당 금의 10%를 항상 떼어놓고 있을 정도로 존재감은 컸다.

    그런 교장 선생님이 위독하시다 니.

    유재원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한국에 들어갈 때 종종 찾아뵀뵈었 는데, 항상 정정하신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당장 갈게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넵,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유재원은 곧장 김대석에게 한국 으로 돌아갈 수 있는 비행기를 알 아봐달라고 했다. 김대석은 곧장 인터넷과 전화기를 동원해서 비행 기를 찾았다.

    "오늘 당일 항공편은 모두 만석 입니다."

    가는 날이 장날인가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수요는 항상 있었다. 그런 데 휴가철이라 그런지 남는 비행기 표가 없다는 것이다.

    "그룹 전세기는 지금 휴스턴에 있습니다. 기존 일정을 취소하고 호출한다면 4시간 안에 출발할 수 있습니다."

    "전세기? 737로 태평양 횡단이 가능해요?"

    "가능합니다. 게다가 최근 전세 계약을 갱신하면서 최신 기종인 737 NG기종으로 업그레이드를 했기에 논스톱으로 갈 수 있습니다."

    전세기 임대 계약은 실무진 선에 서 알아서 할 정도로 그다지 중요 한 결정은 아니었다. 실무진은 당 연히 그룹 임원들 그리고 유재원이 따로 움직이는 스페셜 팀을 의미하 는 것이었다. 특히 스페셜 팀은 이 번 일본 공략에서 보이지 않는 손 으로 활동하며 큰 공을 세웠다.

    아베를 골로 보낸 결재 서류를 찾아내 언론에 제보할 수 있었던 것도 스페셜 팀의 공이었고, 다른 증거들도 이들이 많이 발굴해냈다. 또한, 아직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 낼 단계는 아니긴 한데, 일본이 대동아공영이니 뭐니 하며 제국주의 를 표방하며 전쟁을 일으켰을 때, 저지른 전쟁 범죄나 비인간적인 만 행에 대해서도 다양한 증거들을 상 당히 수집한 상태였다.

    이들의 활약은 워낙 대단했다. 스페셜 팀을 위해서라면 뭐든 지원 해주라고 지시를 내렸을 정도다. 덕분에 임대한 비행기의 기종 업그 레이드 정도는 따지지도 않고 승인 을 해줬을 만큼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는데, 오늘 유재원이 그 덕을 보게 되었다.

    "알겠어요. 그러면 그렇게 해요."

    "예, 스페셜 팀에 양해를 구하고 전세기를 샌프란시스코로 부르겠습 니다."

    김대식은 곧장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유재원도 한국에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캐리어는 늘 준비가 된 상태였기에,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 리는 게 먼저였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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