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457화 (457/1,007)

23권 16화

주식 시장 공략은 단순했다.

일본 기업들의 신뢰도를 파탄 내 폭락을 유도한다는 것이었다. 셰브 롱을 지렛대로 이용해 고베 강철의 품질 조작 스캔들을 터트린 건 최 고의 판단이었다. 그날 닛케이 지 수의 폭락으로 얻은 수익은 단순히 매도 차익만 있는 게 아니라, 선물 매도와 풋옵션도 있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유재원에겐 일본의 거대 기업들이 품고 있는 뇌관을 많이 알고 있었다. 고베 정도는 수류탄 정도였고, 그보다 더 큰 폭탄도 있 었다. 이것들을 연쇄적으로 터트리 면서 일본의 신용도를 폭락시켜 닛케이 지수의 대폭락을 유도하는 게 유재원의 설계였다.

"아베가 아직 그렇게 거물은 아 닌 건가? 아님 일본인들이 좀 부패 에 무감각한 건가?"

손수 만든 검색 로봇으로 빅데이 터 검색을 해본 유재원이지만, 그 결과를 선뜻 받아들이기가 힘들었 다.

"왜 끓어오르지 않지?"

일본의 여론이 끓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을 오래 끌면 끌수록 유재원에겐 손해였다. 일본 말고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비즈니스 를 해야 할 때인데, 일본에만 능력 을 집중하고 있는 건 개인은 물론 그룹에도 손해였다. 게다가 전명헌 할아버지의 방미가 얼마 남지 않았 으니 앞으로 3주 안에 승부를 보는 게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럼 이번엔 다이너마이트 정도 로 터트려 볼까."

마음을 정한 유재원은 컴퓨터에 서 IDW 파일 하나를 열었다. 파일 의 이름은 일본 공적 연금의 대규 모 손실 정밀 분석이었다.

나스닥의 IT 버블 붕괴에 피해를 본 투자 회사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미국에서도 조그만 투자 회사 들은 피해액을 감당하지 못하고 파 산하는 등의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 었다. 이러한 피해 액수를 나라별 로 따져 본다면 미국 다음으로 큰 곳이 바로 일본이었다.

일본이 큰 손해를 봤다는 건 이 미 몇 달 전에 큰 뉴스가 될 정도 였다. 일본에서도 소규모 투자 회 사들은 역시 파산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뉴스는 단신으로 소개만 되 고 끝났고, 후속 보도나 심층 보도 는 없었다.

그에 대한 답이 지금 유재원이 열어 보는 IDW 파일에 담겼다.

나스닥 IT 섹터에 투자했다가 봉 변을 본 일본의 자본중 가장 덩치 가 큰것이 바로 공적 연금이었다. 조 단위의 손실을 봤는데, 이는 일 본 공적 연금의 투자 실패 사례 중 에 최고였다. 물론 21세기로 넘어 가면 더 큰 손실을 보는 일도 있지 만, 그건 미래의 일이고 지금까지 역대 최대의 투자 손실이다.

"자기들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이 줄어들어도 가만히 앉아만 있으려 나?"

고베 강철이나 아베 이야기는 일 본의 평범한 국민들에게 좀 먼 이 야기였을 것이다. 셰브롱이 고베조선소의 LNG 운반선에 대한 전 수 조사를 하고, 납품 거부와 손해 배상을 진행한다고 해도 피해는 고 베 조선소가 좀 보는 것이고, 일본 전체적으로도 닛케이 지수가 좀 내 려가는 것 말고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연금 수령 나이가 뒤로 늦춰지고, 받을 수 있는 연금의 액 수가 줄어든다는 걸 알면 어떨까? 심지어 일본 공적 연금의 방만한 운영은 늘 있어왔고, 손실이 발생 했을 때마다 이번처럼 은폐하기 바 빴다는 것도 이 문서 안에 다 들어 있다.

"결정적으로 연금 수령자에게 약속한 돈을 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 제일 크지."

월 몇 백 엔 정도의 누락이다.

어려우신 분에겐 그 몇 백 엔도 소중한 금액이지만, 좀 넉넉한 사 람에겐 안 받아도 크게 상관없는 액수였다. 그런데 연금 수령자 전 체를 보면 미지급액은 기하급수적 으로 커진다.

선진국인 일본이 이렇게 국민들 을 속이고 있다는 건 믿지 못할 일 이지만,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일본의 자 민당 집권은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었고, 그러면서 관료와 정계가 하나의 기득권을 형성했다. 감시의 기능은 당연히 소홀해졌고, 실수가 있더라도 서로 눈감아주는 행태가 계속되면서 급기야 공적 연금의 부 패라는 최악의 단계까지 치달은 것 이다.

이러한 행위를 하고 있는 당사자 들은 이게 심각한 일인지도 모를 것이다.

고베 강철처럼 말이다. 고베 강 철도 품질 조작은 아예 관행처럼 고착화 되었다. 시작은 70년대 말 부터 했으니 그야말로 역사와 전통 이 있는 조작이었다. 유재원도 21세기에 대대적인 보도를 통해 알게 된 것인데, 조작 담당 임원까지 있 을 정도였다고 한다.

공적 연금도 마찬가지다.

이번 나스닥에서 대규모 손실을 보면, 이를 제대로 공고하지 않고 일단 숨기는 게 기본 프로세스였다.

유재원이 보는 이 문서는 정보팀 이 수집한 일본 공적연금 운영 실 태가 담겨 있었고, 누적 손해액도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액수는 무려 3조 6,600억 엔.

원이 아니라 엔이다. 그러니 현 재 환율로 따지면 거의 40조 원에 달하는 손실액이었다. 누적액수라고 해도, 유재원이 봤을 때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도대체 어 떤 식으로 포트폴리오를 쨌기에 이 렇게 큰 손실이 날 수 있나 싶었 다. 원숭이 지능으로 대충 막 고른 다고 해도 이정도로 손실이 날 수 는 없는데 말이다.

아예 작정하고 돈을 버리겠다고 고른 거면 모르겠다. 남의 돈이라 고 해도 이렇게 큰돈을 날려먹을 수 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 다.

유재원은 간단한 매크로를 짰다.

해당 IDW 파일을 일본의 대규

모 커뮤니티에 자동으로 올려주는 매크로였다. 어제 검색 로봇으로 인덱싱이 끝난 일본의 공개 커뮤니 티 사이트 전체에 올릴 작정이었다. 당연히 언론 제보도 빼놓지 않았다.

"이거에도 반응이 없으면 일본은 답 없는 나라지."

작업을 마친 유재원은 망설임 없 이 엔터 키를 눌렀다. 그러자 화면 이 바뀌었고, 일본의 지도가 나타 났다. 전문적인 디지털 지도는 아 니었고, 그냥 윤곽선과 연두색으로 칠해진 단순 지도였다.

그런 단순화된 지도 위에는 하얀 색 점들이 알알이 박혀 있다. 하얀점들은 주로 일본의 주요 대도시에 몰려 있는데, 도쿄가 제일 많은 숫 자를 자랑했고, 홋카이도가 제일 적었다.

하얀 점의 의미는 바로 자체적으 로 운영 중인 인터넷 서버였다. 유 재원이 엔터를 누르자 그 점들이 점차 빨갛게 물들었다. 이는 일본 공적연금의 비밀이 담긴 IDW 파일 의 업로드가 끝났음을 의미하는 색 이었다.

"세상 좋아졌네!"

빨갛게 물드는 일본 지도를 보며 유재원은 태평한 목소리로 감탄했 다.

90년대 초만 하더라도 태평양이 라는 지구의 반을 차지하는 드넓은 바다는 거대한 공간적 방해물이었 다. 작은 크기의 정보라도 이를 넘 어가는 건 쉽지 않았는데, 이제는 샌프란시스코의 방구석에 앉아서 일본의 인터넷 전체를 빠르게 접속 할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일성 전자, 부실 규모 상상 이 상-외화벌이 효자였던 메모리 반도 체도 이젠 옛말. 1년 전부터 손해 보고 팔아-일성 전자 자산, 조직적으로 빼 돌려진 정황 파악!

-채권단 회생 가능성 매우 낮아-채권단 부실 초래한 사장과 임 원들 직접 고소 방침-기술만이 답이다. 플래시 메모 리로 새로운 성장 동력 갖춘 미래 전자!

한국은 일성 전자 부도 사태로 온통 난리였다.

제보를 받은 최강욱은 빠르게 움 직였지만, 이미 늦었다. 가치가 높 은 서울의 부동산은 물론이고, 지 방의 조그만 땅까지도 다 팔렸다. 그렇게 조성된 자금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외부로 빼돌려졌다. 가치 도 없는 미술품을 법인 이름으로 구매한다든가, 채산성 없는 채굴권 을 사는 건 기본이고, 페이퍼컴패 니로 보내진 정황도 있었다.

최종적으로 전달된 곳은 최현희 일가일 텐데, 그 작업이 너무도 정 교하고 복잡해서 찾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가장 단순한 해답은 해당 업무를 담당했던 실무진을 찾는 것이다. 돈이 제 발이 있어서 움직인 건 아 니고, 누군가 그런 일을 도맡아 해 줘야 하니 말이다. 다행히 최강욱 에게 붙은 임원 중에 그 이름을 아 는 사람이 있었고, 순순히 이름도 말도 해줬다.

너무도 평범한 이현우라는 이름 의 비서실 직원이라고 한다. 하지 만 최강욱이 이현우의 존재를 겨우 파악했을 때는 이미 출국 후라고 했다.

-행선지는 필리핀입니다. 필리핀 에 사람을 풀어서 이현우를 꼭 찾겠습니다.

일성 전자 건을 비롯해 한국의 ID 그룹 운영에 대해 보고를 위해 화상 미팅으로 연결된 최강욱이 이 를 가는 게 확실히 보였다.

이번 일은 최강욱의 상상력을 벗 어난 일이었다. 국가가 외환위기로 힘들고, 나라 전체가 허리띠를 졸 라매고 있는데, 대놓고 회사의 알 짜 자산을 팔아치워 해외로 빼돌렸 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니 당장 이현우라는 사람을 잡 아다가 다 뱉어내게 만들겠다는 투 지가 가득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틀렸다.

"필리핀에 사람 보내봤자 찾을 수도 없을 거예요."

-예, 회장님께서 먼저 찾아보셨 습니까?

"그게 아니라, 제 생각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거든요."

유재원의 말에 최강욱이 입을 떡 벌렸다.

오랜만에 보는 크게 놀란 최강욱 의 얼굴이었다. 죽었을 거라는 말 에 충격이 제법 컸던 모양이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면, 죽었다는 말 아니겠는가. 게다가 사람이 그냥제 발로 죽을 일은 없으니 살해됐 다는 뜻과 같았다.

유재원은 일성 전자의 설계를 보 고 단언할 수 있다.

수천억 원이 움직였음에도 실무 는 단 한 명이 보았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해외로 나갔다. 그 사람만 사라지면 일성 전자의 비자금과 최 씨 일가와의 고리도 사라지는 것이 었다. 아주 대놓고 한 사람 묻어버 리겠다는 뜻이다.

-어떻게 백주대낮에 그게 가능합 니까?"

"한국이야 살인이라는 게 무겁게 다뤄지는 범죄지만, 필리핀처럼 치 안이 떨어지는 나라에서는 왕왕 발 생하는 일이잖아요."

이런 일은 최현희에게 보고되지 도 않았을 것이다. 일성에서 머슴 하나 치우는 정도는 회장 보고 사 안도 아닐테니 말이다.

-세상에.

"아마 며칠 후에 그 사라진 사람 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는 식의 기사가 나올 거 같네요."

최강욱은 아직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살인멸구라니. 이런 식의 발상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 칠 뒤에 그런 식의 기사들이 나올 예정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그럴듯 하게 들린다는 게 소름이었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최강욱이지 만 문뜩 의문도 들었다. 이제 성인 이 되었다고는 해도, 아직 젊디젊 은 유재원이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다 알고 있나 싶었다.

그렇게 최강욱이 의문을 품는 동 안 유재원은 이현우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진짜로 살해되었다면, 본인 처럼 멋지게 회귀해 복수하길 빌어 주었다.

"하여튼, 결론은 일성 전자의 가치는 더 떨어졌고, 다시 살리는 건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거죠?"

-예, 회장님. 조사한 지 며칠 되 지도 않았는데, 감춰 놓은 부실은 제보 받았던 것 그 이상입니다.

"그걸 최현희 일가에게서 받아낼 수는 없나요?"

-그러면 저도 참 좋겠습니다 만…….

개인 회사였다면 끝까지 다 받아 낼 수도 있겠지만, 주식 회사는 보 유한 지분만큼만 책임을 지면 된다. 게다가 회사에 법인이라는 무형의 인격을 부여하고 책임을 지우는 것 이라 법인이 망하면 무한 책임을 질 존재 자체가 없다.

"그러면 답은 나왔네요. 전에 말 한대로 진행 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유재원이나 최강욱이나 많은 말 은 필요치 않았다.

이대로 일성 전자를 인수해봐야 부실 덩어리뿐이었다. 그러면 해체 하고 반도체 부분과 가전 부문처럼 그나마 괜찮은 자산만 인수해 ID 테크놀로지로 편입하는 게 제일 낫 다. 그리고 이러한 부실을 초래한 사람들 모두 고소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일본 공략에 집중하셔야 하는 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뭘요, 부회장님과 같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안심하고 일본에 매진 할 수 있는 건데요. 게다가 부회장 님은 기대 이상으로 아주 잘 해주 시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예, 그러면 변동이 생기면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

최강욱과의 화상 미팅이 끝났다.

유재원은 곧이어 ID톡을 열었다. 일본 공략 현황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이보다 더 편한 ERP 시스템이 있긴 했지만, 일본 공략은 최대한 보안을 유지하는 게 좋았다. 그렇 기에 모든 데이터가 암호화되는 ID 톡으로 일본 공략을 수행 중이었다.

최강욱에게 말했던 것처럼 일본 공략은 술술 풀리는 중이었다. 다 만 그 양상은 유재원의 예상과는 아주 달랐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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