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454화 (454/1,007)

23권 13화

다음 날.

사안이 사안인지라 청와대에서 바로 발표가 나왔다.

-청와대, 일성도 예외 아니다.

-법과 원칙에 따라 순리대로 처 리.

-부도 유예로 7일 후, 일성 전자 법정 관리 절차 돌입시장의 기대와는 반대로 정석 중 의 정석인 방식이었다. 긴급 자금 지원과 같은 특혜는 없다는 소리였 기에, 주식 시장은 시작부터 파란 세상이었다. 하지만 특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부도 유예 기간으로 7일을 준 것이다.

7일의 시간을 임의로 주었고, 이 사이에 20억 달러를 갚으면 부도 위기는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빚이 탕감된 건 아니라 돈을 마련 할 시간을 더 주는 것이다. 마치 채권의 만기를 며칠 뒤로 미루는 효과와 같다. 다만 부도 유예 기간 을 최대 한 달로 줄 수 있었음에도 7일로 줄인 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 는 사람들도 조금 있었다.

-채권단 일성 전자 회생 방안 논 의 시작동시에 일성 전자에 돈을 빌려준 채권단들은 부도의 상황에 대해 대비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입김이 센 건 당연하게도 유재원의 대리인 인 최강욱 부회장이었다. 부도 처 리를 위해 모인 채권단의 존재감은 보유한 채권의 액수에 비례한다.

일성 전자의 경우엔 특히 부채 비율이 높은 회사였다.

빚을 많이 져서 풍부한 유동성을 확보한 후에 사업을 크게 벌이고, 돈도 크게 버는 게 한국 대기업들 의 특징이었는데, 반도체 생산 설 비의 경우 라인 하나가 조 단위 자 금이 투입되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유재원의 20억 달러도 큰 비중이 긴 했다. 하지만 원화로 환산했을 때는 유재원보다 돈을 많이 빌려준 은행들이 있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은행의 입김이 세야 했지만, 현 실은 최강욱이 최고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은행에 큰 소리 를 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큰돈을 예금해 놓은 사람뿐이라는 소리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최강욱은 정부 다음 으로 큰손이었다.

백호 펀드는 운영 자금을 시중 대형 은행에 거의 비슷한 액수로 분산 예치한 상태였다. 귀하디 귀 한 달러화 예금으로 많으면 50억 달러에서, 적어도 30억 달러 수준으로 예치해 놓았다. 필요하면 바 로 환전해서 사용 중이었는데, 현 재 한국에서 이 정도 예금을 굴리 는 존재는 백호 펀드가 유일했다.

만에 하나 일성 전자가 매물로 나올 경우 이를 인수할 수 있는 업 체는 백호 펀드가 제일 유력했다. 해외 매각 방식도 있긴 하지만, 한 국의 몇 없는 첨단 기술 보유 기업 인지라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반면 백호 펀드는 100% 한국 자본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특혜 없이 순리대로 처리하기로 방향을 잡은 것도 백호 펀드를 믿고 내린 결정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한국의 경제계는 물론 사회 전체 가 일주일 안에 일성 전자가 20억 달러를 갚을 수 있을지 숨을 죽이 며 지켜봐야 했다.

그건 유재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다리는 건 지루했다. 특히 답이 뻔하게 보이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 랬다. 일성 전자에게 한 달을 줘도 20억 달러를 구하는 건 불가능했 다. 일성 그룹 전체가 일성 전자 살리기를 위해 1센트 동전까지 탈 탈 탄다고 해도 불가능했다.

부도 유예 기간은 최대 한 달임 에도 7일로 줄인 건 당연히 유재원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였다.

"일본 일은 잘 굴러가고 있나 모 르겠네?"

일성 전자보다 더 일찍 시작한 게 일본 공략이었다.

첫 타가 고베 철강 품질 조작 스 캔들이었는데, 거의 10일이 지난 지금도 고베 철강 이슈는 현재 진 행형이었다.

이런 날에 괜히 일에 집중한다고 억지로 작업을 하면 효율도 떨어지 고, 저도 모르게 버그를 만들 수도 있다. 퇴근 시간까지 1시간 정도가 남았지만, 차라리 일본의 여론 흐름을 제대로 살피는 것에 더 마음 이 쏠렸다.

무엇보다 일을 안 한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는데, 이런 게 오너의 특권 아니겠는가.

생각을 정한 유재원은 바탕화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던 개발툴이나 구석에 띄워진 ID톡 모두의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XX 프로젝 트를 저장하겠느냐는 메시지 박스 가 떴다.

"아, 내 정신 좀 봐. 저장을 깜빡 하고 있었네."

저장 버튼을 틈틈이 누르는 게

유재원에겐 습관화가 되었던 일이 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어디에 정신이 팔려 있었는지, 저 장 버튼을 누르는 걸 깜빡했던 모 양이다. 유재원은 바로 Y키를 눌렀 고, XX 프로젝트가 잘 저장된 것 을 확인하고는 곧장 웹 브라우저를 열었다.

거기엔 아주 재미있는 기사들이 가득했다.

고베 철강 이야기부터, 셰브롱의 고소 방침까지 몇 번을 읽어도 재 미있는 기사였다. 그렇지만 마냥 좋은 기사들만 가득한 건 아니었다.

-북핵 완전 포기 없는 종선 선언받아들일 수 없어.

-미국 정가에 도는 주북미군설, 현실성 전혀 없다.

-핵 개발 의혹 철저한 분석이 먼 저!

고베 철강 품질 조작 스캔들로 정신이 없는 일본이었지만, 미국 정치계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었 다. 개방을 시작한 중국의 경계를 위해 북한을 활용한다는 게 유재원 의 생각이었고, 이것이 요즘 미국 정치계에 조금 화제가 되었다.

동아시아 전략 연구소의 리포트 가 정치 저널과 미국 국희의원들에게도 배포되었고, 클린턴 대통령도 관심 있게 본다는 소문이 있자마자 일본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과 일본은 미 수교 상태였고, 사이는 매우 나빴 다.

6.25 이후 북한과 일본 사이 쌓 인 해묵은 감정은 이루 말할 수 없 을 만큼 높았다. 특히 일본은 북한 이 일본의 민간인들 납치해간다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었고, 북한은 항상 부인했다. 게다가 북 한의 핵 개발이나 미사일 개발에 한국보다 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 여주는 나라이기도 했다.

일본은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전향 적인 모습을 보일 때마다 외교력을 총동원해 저지하려고 했고, 북한으 로 여론을 환기시키려고 했다.

이번 고베 철강 품질 조작 사건 도 마찬가지였다. 재빨리 북한 이 슈를 크게 터트리면서 미디어에서 관련 기사들을 빠르게 내리는 중이 었다.

그렇게 일본의 인터넷 여론을 살 펴보는데, ID톡이 울렸다.

-회장님, 방금 후속 기사가 나왔 습니다.

일본에 있는 빈센트 그린힐의 톡 이었다.

"네, 바로 확인할게요."

유재원은 다시 일본 넥스트컴 뉴 스 페이지에 접속했다.

그러자 유재원의 눈에 new라는 마크가 달린 기사 중에 아베라는 이름이 들어간 제목이 있었다. 빈 센트 그린힐이 말한 후속 기사였다. 제목이 몹시도 자극적인지라 클릭 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베 강철 품질 조작, 아베 관 방장관도 관여일본에 아베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바로 그 아베의 이야기였다.

아베는 현재 자민당의 떠오르는 신예로서 현재 모리 요시로 내각의 관방장관을 역임 중이었다.

관방장관은 총리 비서이자 내각 의 대변인의 역할인데, 대변인으로 서 언론에도 매일 나오기 때문에 유권자들에게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

1993년 정계에 입문한 사람인지 라 변변찮은 경력뿐인데도 그 자리 에 갈 수 있었던 것은 고이즈미 준 이치로라는 정계 거물의 서포터도 있긴 했지만, 기시 노부스케라는 외조부의 힘이 컸다.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 흑막정치 의 거두로서, 죽는 순간까지도 일 본 정계를 주물럭거렸던 사람이었 다. 아들이 있었다면 본인의 자리 를 그대로 물려줬을 텐데, 딸만 있 었던지라, 아베 신타로라는 유망주 를 사위로 들여 후계자로 삼았다. 그리고 그 자리를 아베 신조가 1993년 물려 받은 것이 지금의 상 황이다.

기사는 아베 관방장관이 장관으 로서 고베 강철의 품질 조작에 관 여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베 가 정치에 입문하기 전 다녔던 회사가 고베 강철이었고, 그때에 아 베가 품질 담당을 맡고 있었으니, 조작에 관여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랬기에 이를 숨기고자 고베 강 철의 품질 조작 조사가 쉽지 않을 거라는 예측을 하며 기사는 마침표 를 찍혔다.

"오, 누가 썼는지 몰라도, 글 한 번 잘 썼네요!"

-일본인 친구들의 장인 정신이야 유명하지 않습니까? 단서 몇 개만 전해주니 금방이더군요.

빈센트 그린힐 사장이 농담도 다했다.

그놈의 장인 정신이 없어서 고베 강철의 스캔들이 터진 거 아닌가. 일본은 가업이라고 대를 이어 전수 되는 초밥집이나 조그만 공방 등을 가지고 장인 정신이란 이미지를 선 점했다. 그리고는 고베 강철처럼 뒤로는 호박씨나 깠던 것이 일본이 기도 했다.

하여튼, 기사처럼 고베 강철 품 질 조작 스캔들은 아직 진전이 없 었다. 사건이 터진 지 거의 일주일 은 지났는데, 일본의 경찰은 움직 이지 않고 있었다. 셰브롱에서 엄 중 조사를 요구했지만, 고베 강철은 자체 조사 중이라는 이야기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기사들은 점점 줄어드 는 데, 유재원에게는 어떻게 해서 든 묻고 가겠다는 의지가 딱 보였 다.

이제는 이렇게 관방장관 아베가 스캔들에 연루되었다는 기사가 터 졌으니 묻기는 쉽진 않을 것이다.

내각의 핵심 중 핵심인 아베가 고베철강 스캔들에 연류되었다는 걸 알게 된 일본의 정부나 국민들 이 무슨 반응을 보여 줄지 유재원 은 너무도 궁금해졌다.

"아참! 혹시나 일본의 내각 정보 조사실이 조사해 올지도 모르겠네 요?"

-내각 정보 조사실이요?

"일본판 CIA 같은 곳이죠. 아베 가 언급되었으니 분명 조사실이 움 직일 거예요."

유재원은 전생의 기억까지 종합 해 일본 내각이 취할 행동 중에 가 장 유력한 것을 도출했다. 그것은 내각 정보 조사실이 움직여서 폭로 중인 기자들의 뒤를 조사할 거라는 예상이었다. 당연히 그런 기자들에 게 정보를 제공한 자에 대해서도 조사가 들어올 것이다.

-음, 회장님 말씀이라면 분명 일 본이 그렇게 나오겠군요. 그런데 회장님께선 우리의 제보 사실이 밝 혀지지 않기를 바라시는 건가요?

"밝혀져도 상관은 없죠. 아베가 연관되어 있다는 건 사실이니. 다 만 빈센트 사장님이 곤란해지실까 봐 그러는 거죠."

뒷조사 같은 게 들어오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긴장이 된다. 특 히 국가 단위의 정규 정보조직처럼 대규모 조직이 조사한다는 걸 알게 되면 받게 되는 압박감이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이제 사장님이 일본에 계속 있 어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이제 미 국으로 돌아오시죠?"

유재원의 경우엔 전생에 탈탈 털 려 봐서 그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빈센트 그 린힐이 그런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도록 미리 배려하는 것이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회장님의 배려가 고맙습니다. 하지 만 거시적으로 봤을 때, 제 꼬리를 잡겠다고 내각 정보 조사실이 날뛰 면 오히려 그게 일본 내각이 제 발 목을 잡는 일 아니겠습니까?

빈센트 그린힐은 유재원의 배려 에 허허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심지어 본인의 뒤가 밟히는 것까지 도 목적을 위해 활용하겠다는 말이 었다.

-게다가 저는 미국인입니다. 뒤 에는 ID 그룹과 회장님이 있고, ID 그룹에 우호적인 정치인들도 많습 니다. 제보자가 저라고 밝혀져도 일본 내각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아베 관방장관의 개입이 사 실이라는 쪽으로 여론을 쏠리게 할 겁니다. 그만큼 우리의 일본 공략 성공률은 더 높아지겠지요.

유재원은 그것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렇지만 괜히 자 기 사람이 힘들어질까 우려의 말도 하고 출국도 권유했던 것이다. 그 런데 빈센트는 그런 압박까지도 일 본 공략을 위해서 쓰겠다고 하니 뭔가 뭉클한 게 있었다.

게다가 빈센트 그린힐이 틀린 소 리를 한 것도 아니었다. 한국을 비 롯한 아시아 국가엔 큰소리를 치는 일본이지만, 미국에는 설설 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ID 인베스 트먼트처럼 미국의 클린턴 정권과 직통으로 이어져 있으면 일본이라 도 어찌할 수가 없다.

다만 제대로 말해야 하는 건 클린턴 정권이 아닌 클린턴 대통령 가족과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 러니까 바로 클린턴 대통령의 개인 재산 중 일부를 ID 인베스트먼트가 대신 운영 중이었다는 이야기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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