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453화 (453/1,007)
  • 23권 12화

    -회장님, 아쉽게도 전량 매도에 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발신인은 빈센트 그린힐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오후엔가 고베 강철의 품질 날조 스캔들이 터진 뉴스를 슬쩍 봤던 게 떠오르는 유 재원이다.

    고베 강철 스캔들은 일본 공략의 조그만 퍼즐에 지나지 않았고, 전 생에도 자세히 밝혀진 내용인지라 기사 몇 개만 보고 넘어갔다. 대신 유재원은 계획에 다른 전량 매도가 실패했다는 말에 일본 넥스트컴의 증권 페이지를 열어봤다.

    접속하자마자 딱 보이는 숫자가 있었다.

    "와, 935포인트나 빠졌네요."

    이 정도면 팔고 싶어도 매수세가 없어서 팔 수 없는 상황이나 마찬 가지였다.

    -1천 포인트를 넘기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오늘만 날인가요? 첫날에 이 정 도면 대성공이죠. 앞으로도 기대할 게요."

    -예, 회장님!

    빈센트 그린힐과의 ID톡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일본 공략에 대해서 빈센트 그린 힐은 유재원의 상담자가 되어 오래 이야기했었다. 이미 단기 계획은 시계 속 톱니바퀴처럼 짜여 있었고, 지금은 이에 맞춰 실행만 하면 되 는 때였다. 이후 상황이 달라지면 그때 가서나 융통성 있는 움직임을 보이면 그만이다.

    더욱이 오늘 신일본 투자은행이 내다 판 것은 A섹터라 명명된 주 식들인데, 주로 고베 철강과 관련 이 있는 중공업 주식들이었다. 나 스닥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ID 인 베스트먼트는 일본의 주식도 제법보유하고 있었고, 이를 내다 파는 것으로 오늘 닛케이 지수 대폭락을 유도했다.

    금융 페이지의 게시판에는 이번 폭락으로 손해를 봤다는 사람들의 한탄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이거 어쩌나.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같은 날.

    한국에서는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있었다.

    제6공화국 출범 이후로 시작된 지방분권도 궤도에 올랐고, 그에 따라 광역 단체장과 지방 의회 의 원들의 존재감도 확실히 달라졌다. 덕분에 제3회 지방선거 운동도 뜨 거웠고, 유권자들의 관심도 올라서 투표율도 60%를 넘겼다.

    유재원이 기억하는 원래 투표율 은 52%였다. 그런데 남북 정상회 담 이슈와 한미 정상회담까지 앞두 고 있었고, 종전 선언이라는 게 중 요한 정치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유 권자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도가 높 아졌다.

    결과는 당연하게도 통일국민당, 민주당 연정의 압승이었다.

    3개로 나뉜 야당, 그러니까 자민 련, 한나라당, 한국당들은 핵심지지 지역에서만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 었고, 나머지는 모두 여당에 가져 다 바쳤다.

    보통 지방선거는 대선 다음에 있 는 선거였고, 새로운 대통령에 대 한 실망감이 투표로 나타나는 게 이제까지의 패턴이었다. 그런데 전 명헌은 그걸 완전히 뒤집었다. 종 전 선언 이슈가 모든 정치적 논란 을 잡아먹었다. 게다가 외환위기로 IMF 사태를 초래한 이전 정권의 부역자들에 대해서도 기억하고 있 었다.

    그 결과가 통일국민당, 민주당 연합의 싹쓸이로 나왔다.

    이에 탄력을 받은 전명헌 대통령 은 한미 정상회담을 공식적으로 발 표했다. 날짜는 7월 8일부터 10일 까지 3일간. 미국의 국빈 초청으로 방문하고, 정상회담을 비롯해 여러 가지 행사가 있음을 밝혔다.

    재미있는 일정이라면 실리콘 밸 리 방문이었다. 이건 누가 보더라 도 ID 그룹과 유재원을 만나러 가 는 행사였다. 이처럼 대통령이 한 기업과 너무 친한 모습을 보이면 논란이 생길 만도 한데, 별 논란도 없었다.

    그만큼 전명헌의 힘이 강력하다 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한국서는 거칠 게 없는 전명헌도 부담이 되 는 존재는 있었다.

    -전명헌 대통령, IMF에 서면 답 변서 제출-금리 정책에 대한 신축성 확보 약속IMF 였다.

    금요일 아침 헤드라인 뉴스는 지 방선거 뉴스가 독점하진 못했다. 여지없이 IMF의 소식이 양분했다.

    IMF로부터 긴급 지원 자금을 수 혈 받으면서 국가부도 상황은 간신 히 넘겼지만, IMF로부터 돈을 빌 린 대가를 지금도 치러야 했다. 금 융시장 개방과 선진화 조치로 포장 된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한 약속을 지키는지 확인해 본다고 대통령에게 직접 서면 질의 서를 보냈다. 전명헌은 그런 IMF 의 태도에 화가 슬쩍 났지만, 꼼꼼 하게 답변서를 작성해 냈다.

    그렇지만 이것도 사실 유재원 덕 에 IMF의 강제력이 상당히 약해진 상태라는 점이다.

    오리지널 IMF였다면 이렇게 부 드럽게 말하지도 않았다. 부도난 회사를 인수하러 들어온 점령군처 럼 모든 것을 자기 맛대로 뜯어고 치고 있었을 것이다.

    알짜 기간 산업들을 민영화하라 고 압박했고, 미국식 고용 유연화 를 한다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법 률도 제정하도록 강제했을 정도다. 이밖에도 IMF식 강력한 처방이 내 려졌고 한국은 이를 모조리 다 수 용해야 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달랐다.

    IMF에 유재원이 개인 출자금을

    100억 달러나 냈고, 200억 달러 규 모의 백호 펀드가 활동하면서 IMF 의 입김은 예전처럼 강하지 못했다. 오히려 한국의 경제계에 말이 서는 곳은 IMF보다 백호 펀드의 오너인 유재원, 그리고 대리인인 최강욱이 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게, 불과 몇 달 전까지 한국의 은행들의 연속 부도 위기설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그 이유가 백호 펀드의 운영자금이 한국에 들어와서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덕분에 전명 헌의 은행 개혁도 속도가 났고, 부 작용도 최소화할 수 있었다.

    -예금자 보호법 신설, 은행별로 개인당 1억 원까지 보호!

    -사회 안전망 확충을 위한 민생 분야 대규모 채용-경찰, 소방관, 사회복지사 정원 대폭 늘린다.

    -전명헌, 기업들에 임금 체계 기 본급 중심으로 바꿔라!

    오히려 IMF의 조치들과 반하는 정책을 과감하게 시행했다. 기본적 으로 작은 정부를 권고하는 IMF였 다. 정부의 규모가 커지는 건 신자 유주의에서는 죄악시 되는 일이었 으니 말이다. 전명헌은 역으로 갔다. 민생 분야라고는 해도 공무원 숫자를 대거 늘리는 정책을 펼쳤다.

    이걸 비판하는 정치인과 언론인 이 많았다.

    웃기는 일은 정치 성향상 진보 쪽에서 특히 반발이 많았다는 점이 다. 전명헌의 정책들은 이미 70년 대 군사정권이 해봤던 계획 경제이 고, 거대 정부라며 거부감을 표시 하는 것이다. 군사정권이라고 그들 이 취했던 정책이 모두 악한 건 아 니었다. 그런데 진보 쪽 사람들은 무조건 경기를 일으키는 모양새였 다.

    그렇지만 국민의 선택은 전명헌이었고, 지지율도 고공행진 중이었 다.

    "음, 아주 좋아."

    유재원은 정보팀의 보고서를 비 롯해 한국의 기사들을 보며 유재원 은 만족감을 표시했다. 여전히 전 명헌은 기대 이상이었다. 이러한 방향으로 쭉 간다면 전생에 겪었던 IMF 이후의 후유증은 크게 걱정하 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더욱이 유재원을 보다 더 기분 좋게 만드는 일은 또 있었다. 유재 원의 모니터 안에 띄워진 일본 넥 스트컴의 증권 페이지였다.

    -셰브롱, 감리 인력 대거 증원.

    -고베 강철이 들어간 모든 배도 전수 조사 착수!

    일본 증권 페이지에 제일 먼저 보이는 게시물이 셰브롱의 이야기 였다. 프레더릭 테일러 2세는 유재 원의 부탁을 확실히 들어주고 있었 다.

    고베 철강의 스캔들이 최대한 빨 리 흐지부지되게 만들고 싶었던 일 본 정부였겠지만, 유재원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후후, 드디어 이걸 꺼낼 때가 되었네."

    흐뭇한 웃음과 함께 유재원이 꺼 낸 것은 1년 전, 일성 전자가 발행 한 20억 달러짜리 채권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일성 그룹은 물 론, 일본까지도 동시에 타격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일타쌍피의 아이 템이었고, 유재원은 일말의 망설임 도 없이 즉각 사용했다.

    며칠 후.

    -일성 전자 1차 부도!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일성 전자 의 부도 소식이 대문짝만하게 실렸 다.

    기사를 접한 국민은 충격이었다.

    일성 전자라면 한국에서 모르는 사 람이 없는 거대 전자 회사였다. 집 집마다 일성 전자 텔레비전이나 세 탁기 정도는 한 대씩 가지고 있을 만큼 큰 회사였다. 한때 미래 그룹 을 넘보면서 한국 1위의 대기업을 꿈꾸었던 기업 집단이 일성 그룹이 었고 일성 그룹의 핵심 계열사가 일성 전자였다.

    일성 그룹의 종업원 숫자만 거의 10만 명에 달하고, 협력 업체들까 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몇 배로 늘 어난다. 그런 일성 전자가 부도가 났다는 소식에 충격이 없으면 그것 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청와대에선 곧바로 경제 분야 고 위 관료들을 모아 비상 대책 회의 를 시작했다는 말이 나왔을 만큼 큰 사건이었다.

    -일성 전자 부도는 20억 달러에 달하는 외화 채권 만기 막아내지 못해 발생-채권자는 놀랍게도 ID 그룹, 채 권 만기 연장은 생각이 없었나?

    시간이 지나자 구체적인 뉴스들 이 하나둘 나왔다.

    "호오? 우리 회사 이름도 실렸 네'?"

    그중에서 한국 경제 신문이라는 곳에서는 채권자의 이름인 ID 그룹 을 대놓고 언급했다. 특이한 일이 었다. 부도가 났을 때, 그냥 부도가 났다고 그러지, 누가 집행한 어음 이나 채권 때문에 부도가 났다는 소리는 않는다.

    부도의 책임은 그렇게 쌓인 빚을 감당하지 못한 해당 기업에게 있는 것이지 돈을 빌려준 쪽에 있는 건 아니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일성 전자 1차 부도에서는 ID 그룹의 이름이 딱 떴다.

    "차라리 제대로 기사를 쓰던가."

    유재원은 샌프란시스코 만이 내 려다보이는 집의 서재에서 그 기사를 접하고는 툴툴거렸다. 일성 전 자에서 발행한 20억 달러짜리 채권 은 유재원 개인 이름으로 나온 것 이니 말이다.

    걸프전 석유 투자에서 대박을 터 트린 다음, 유재원은 개인 배당을 받았고, 여기저기 쓰고 남은 돈을 그냥 일성 그룹 계열사 지분 매입 에 썼다. 확보된 지분만큼 영향력 도 행사했고, 거기에 불편함을 느 낀 최현희 회장은 취미로 만든 일 성 자동차를 중심으로 순환출자 구 조를 변경했다.

    일성 자동차는 아직 비상장이라 서 유재원이 단 한 주의 주식도 매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반도체 특수로 인해 자금력에 자신 감이 생긴 최현희 회장은 유재원의 보유 지분을 남김없이 매입했다. 하지만 예전과 달리 훨씬 더 큰 프 리미엄이 생긴 탓에 단번에 그 돈 을 다 주지 못했고, 그중에 일부는 달러화 채권으로 남았다.

    그게 이번에 만기가 돌아온 20억 달러짜리 채권이었다. 당연히 채권 자의 이름을 쓰려면 유재원 이름 석 자가 들어가야 하는데, 그건 신 문사 입장에서도 부담이었는지 ID 그룹으로 대체되었다.

    "의도가 뭘까?"

    유재원은 기사를 쭉 보면서도 이 해할 수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기사의 내용은 한 국 기업끼리 상부상조를 해야 하는 데, 돈도 많은 ID 그룹이 한국의 사정도 봐주지 않고 재계 2위의 일 성 그룹 핵심 계열사를 1차 부도의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식이었던 탓 이다.

    "돌이라도 던지라는 건가?"

    채권을 연장 받고 싶었다면 먼저 일성 쪽에서 찾아와야 했다. 그렇 지만 일성은 최현희나 최재영은커 녕 이혁재 비서실장도 움직이지 않 았다.

    상대가 유재원이라 이미 포기해 버린 것인지, 아니면 아예 다른 계 획이 있는 건지 몰라도 만기일 하 루 전까지도 연락이 없었다. 그리 고서 만기가 되자 지급할 여력이 없다는 것을 실토했다.

    그로인해 부도가 났다.

    그러니 이 기사는 유재원에게 돌 을 좀 던지라고 하는 것밖에는 아 무런 효과도 발휘할 수 없는 글이 었다. 그래서 댓글에 나쁜 말이라 도 좀 달렸나 봤더니 그것도 아니 었다. 넥스트컴 뉴스 페이지는 물 론이고, 해당 신문사의 인터넷 사 이트에 올라온 원본 기사에도 유재원에 대한 악플은 몇 개 되지 않았 다.

    오히려 일성 자동차까지 문어발 확장을 하며 경영 부실을 초래한 오너 일가들에 대한 성토, 앞으로 일성 그룹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지 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이 더 많 았다.

    "그리고 일본도 있지."

    일성 그룹은 일본과도 매우 친밀 한 관계를 유지하는 회사였다.

    유재원이 일성 전자 외화 채권을 두고 일타쌍피, 일석이조의 수라고 생각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메모리 반도체 노하우도 일본에서 얻었고, 자금 지원도 있었다. 오래 전부터 일성 그룹의 지분 구조가 복잡해진 이유도 이 때문이라는 이 야기가 있었을 정도였고, 유재원은 미래 지식을 통해 낭설을 확인한 상태였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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