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권 11화
"본인들이 CD의 무단 복제를 막 는 신기술을 개발했다고 합니다. 안드로이드에 표준으로 제안하고 싶다는군요?"
풉!
귀를 기울이며 커피를 마시던 유 재원이 순감 뿜었다. 그나마 다행 히 레밍턴을 향하진 않았는데, 섀 넌이 열심히 가꾸었던 나무들이 자 메이카 블루마운틴 넘베 맛을 보 게 생겼다. 한 방울도 놓치고 싶지 않은 고급 커피였는데도, 소니의 어처구니없는 제안에 뿜어지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이게 그렇게 웃긴 이야기였습니 까? 괜찮아요?"
"아, 네네! 저는 괜찮아요."
소니의 CD 불법 복제 방지 기술 이라는 건 엉터리였다. 지금 소니 에서 제일 중요한 플레이스테이션 의 게임 CD 복제도 막지 못하는 판에, 음악 CD 복제를 막는다니.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었다.
"일단 보내달라고 해봐요. 어떻 게 생겼나 궁금하네요."
"아, 그건 여기도 있습니다. 소니 뮤직이 진심으로 기술을 팔고 싶은 모양인지, 여기저기 샘플을 많이 보냈거든요."
레밍턴의 말에 유재원은 소니의 태도에서 뭔가 거만함이 느껴졌다.
일단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에 표 준으로 택해 달라는 것부터가 좀 그랬다. 복제 방지 기술을 만들었 다면, 자기들끼리만 사용하고, 관심 이 있는 사람에게 팔면 그만이다. 그런데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의 표 준으로 택해달라고 하는 건, PC를 불법 복제의 온상으로 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컴퓨터가 불법 복제가 쉽다는 건 사실이긴 한데, 만악의 근원은 아니었다. 디지털 콘텐츠를 생산하는 데 있어 컴퓨터는 필수였다. 어떤 아이템이든 이처럼 양면성이 있는 데, 소니 경영진은 딱 나쁜 것만 보니 이런 식의 판단이 나오는 것 이다.
레밍턴과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시간이 어느새 훌쩍 흘렀다.
석양이 지던 센트럴파크에는 어 둠이 짙게 깔렸고, 뉴욕의 화려한 야경이 떠올랐다.
"오빠! 엄마랑 저녁밥 먹자!"
마침 배가 출출해지던 참이었는 데, 엠마가 도깨비방망이를 들고서 테라스로 나와 밥을 먹으라고 했다.
" 아빠는?"
그런데 엠마의 말에 레밍턴이 빠 져 있었다. 매우 섭섭해 하는 표정 이라 유재원이 얼른 레밍턴을 챙겼 다.
"아빠도 밥 먹자!"
그제야 엠마는 레밍턴에게도 밥 을 먹자고 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집안에서는 몰랐다가 테라스로 나오자 도깨비방망이가 야광으로 빛이 나는 걸 본 것이다.
"아? 와와! 워니 오빠! 이거 봐!"
엠마는 도깨비방망이를 신기하다 는 듯 붕붕 휘두르는데, 그 모습이 깜찍하게 귀여웠다. 유재원은 본능 적으로 티파니폰을 들고서 그 모습 을 사진과 동영상으로도 남겼다. 티파니폰 1이었다면 사진만 가능했 지만, 2로 크게 버전업을 하면서 동영상 촬영도 가능해졌다. 덕분에 평생을 간직할 귀한 영상을 담을 수 있었다.
며칠 후.
-일본 엔화의 비정상적 고평가. 수상하다.
일본 넥스트컴 뉴스 페이지에 기 사 하나가 올라왔다. 파인낸셜 타 임즈라는 경제 전문지의 심층 기사 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현재 일본 의 화폐인 엔화는 가치가 높아지고 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1달러에 124엔 정도였던 것이 지금은 110 엔으로 크게 올랐다.
동아시아가 외환위기에 휩쓸려 화폐들이 폭락하고 있는 와중에 일 본만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본 사람들은 마치 동아 시아와는 다르게 일본의 경제가 워 낙 탄탄하고, 일본의 제품들이 세 계에 인정을 받아서 엔화의 가치가 상승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 었다.
이번 기사는 그러한 일본인의 생 각을 완벽하게 뒤집는 기사였다.
일본 상업은행이 위험하다.
그것이 이 기사의 핵심이었다.
메커니즘은 간단했다. 일본의 제 로 금리를 이용해 전 세계로 무분 별하게 돈을 빌려줬다. 물론 일본 이 달러화를 찍어낼 수 없으니, 엔화로 빌려줬고 돈을 빌려간 쪽에선 엔화를 매도하고 달러화를 사서 사 용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동아시아 외환위기로 인 해 일본의 상업은행들이 돈을 빌려 준 곳이 와장창 망하기 시작했다. 태국은 아직도 그로기 상태였고, 한국도 IMF에 긴급 자금 수혈을 받으면서 IMF 체제로 전환되었다.
동아시아의 비중이 절대적인 건 아니었기에, 치명타는 아니었다. 하 지만 그동안 꿀을 빨던 상업은행들 은 쉽게 벌어들였던 수익 대부분을 전부 토해내야 할 만큼 큰 손실을 봤다. 심지어 동아시아에 주력으로 투자했던 일부 소형 은행은 이 때 문에 망하기도 했다.
문제는 미국 나스닥 폭락 그리고 이와 연계된 선물 옵션 시장의 초 토화였다.
동아시아가 탈이 나자 일본의 투 자자들은 미국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일본의 큰돈이 들어오자 나 스닥은 다시금 치솟아 올랐고, 그 것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그런데 나스닥이 폭락하면서 그 상승분을 모두 반납했다.
상장 폐지되거나 회사가 망하는 게 아니라면 그래도 주식은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선물 옵션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어마어마한 손실이 났다. 이를 감지한 수많은 은행이 동시다발적 으로 마진콜을 시작했고, 그로 인 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투자금 이 일본으로 돌아오면서, 엔화의 가치가 순간 높아진 것이다.
한국이나 동아시아 국가들이 외 환위기로 인해 어려워진 것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해선 안 되고, 일 본도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경고였 다.
그렇지만 기사를 읽은 일반인들 그리고 경제 전문가들은 그다지 크 게 걱정하진 않았다. 여러 은행이 나 증권사들이 투자에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일본 경제의 펀더맨털은 변함이 없을 거라는 자부심이 있었 기 때문이다.
일본의 제품들은 유럽이나 미국 에서 사랑받고 있었고, 한국과 같 은 후발 주자들은 절대 따라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오만이었다.
파이낸셜 타임즈의 기사가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상상도 못할 일이 터졌다. 일본 철강 업계 3위에 빛났던 고베 강철의 대규모 품 질 조작 스캔들이었다.
날짜마다 색이 있다면, 1998년 6 월 4일은 일본에겐 검은색일 것이 다.
-신뢰의 상징, 메이드 인 저팬. 허상이었나?
-충격! 고베 강철 수십 년간 품 질 조작-고객이 요구하는 품질에 맞춰 인증서 데이터만 조작-알루미늄과 구리뿐만이 아니라 강철까지도 광범위한 조작고베 강철의 품질 조작과 데이터 날조 사건이 터진 날이었으니 말이 다. 전조는 있었다. 10여일 전 고베 조선소에서 셰브롱의 감리가 작업 을 중단한 것이다. LNG 운반선에 들어간 각종 강철, 알루미늄 합금 의 실제 샘플과 품질 보증서 간의 데이터 값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 서였다.
거기서 뭔가 냄새를 맡은 기자들 이 하이에나처럼 움직였고, 고베 강철의 품질 날조가 발각되었다.
이렇게만 보면 뭔가 대단한 취재 전쟁이 벌어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고베 조선소가 납품받 는 강철이나 특수 합금은 당연히 일본 안에서 생산된 제품이었다. 그러면 후보는 딱 3곳인데, 신일본 제철과 JFE 스틸, 그리고 고베 강 철이었다.
그중에서도 가까운 데 있는 고베 강철을 제일 먼저 보는 건 자연스 러운 흐름이었다.
대신 고베 강철이 품질 데이터를 조작한다는 걸 밝혀내는 건 좀 어 려웠을 텐데, 이번엔 어렵지도 않 았다. 애초에 고베 강철의 구식 생 산 라인에서는 만들기 힘든 특수강 도 품질 데이터 조작으로 팔아치웠으니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딱 걸린 경우가 바로 고베 조선소에서 셰브롱의 의 뢰로 만들어지고 있던 LNG운반선 에 들어가는 특수 알루미늄 합금이 었다.
더욱이 이러한 브레이킹 뉴스는 보통 장이 마감되고 나서 터지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번 스캔 들은 일본 주식시장이 시작되기 직 전에 터져버렸다. 들리는 말에는 매우 구체적인 제보까지도 있었다 는 풍문이다.
"A섹터 주식들, 모두 파세요."
빈센트 그린힐의 말이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 좋은 풍채를 가진 빈센트 그린힐이었지 만, 최근 그를 부르는 말은 닥터 둠이었다. 마블 코믹스의 많고 많 은 빌런 중에서도 아주 매력적으로 그려지는 대표 캐릭터였는데, 존재 자체가 암울함이었다.
빈센트 그린힐에게 닥터 둠이란 별명이 붙게 된 것도, 언제부턴가 인터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스닥 이 붕괴할 거라고 말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이후, IT 버블 붕괴가 실 제로 이뤄지면서 빈센트 그린힐의 발언들이 다시 조명되었고 닥터 둠 이라는 별명이 고착화되었다.
닥터 둠 빈센트 그린힐은 최근에 도 마찬가지였다.
그 대상은 일본, 일본의 증권시 장에 거품이 많이 껴 있다는 말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했다. 이뿐만 이 아니라 일본이 엔화 약세를 위 해 의도적으로 환율을 조작하고 있 다는 주장도 계속 했었다.
그런 빈센트 그린힐이 신일본 투 자은행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전량 매도를 지시한 것이다.
"넵!"
지시를 받은 직원들은 미국과 달 리 일체의 반문도 없이 이를 행동 으로 옮겼다.
주식시장이 시작되자마자 신일본 투자은행을 시작으로 매도 주문이 쏟아졌다. 다른 투자자들 역시 마 찬가지였다. 고베 강철 품질 날조 사건이란 소나기는 일단 피해보고 가자는 심리였다. 그러한 심리들이 하나둘 모였고, 거대한 세력이 되 어 일본 중시를 내리 눌렀다.
그날 일본 증시는 역대 2번째의 낙폭을 보이며 마감했다.
낙폭은 무려 900포인트.
장이 마감되었을 때의 닛케이 225 지수는 18,700포인트였다.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지 못한 건, 이보다 더 큰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1987년 10월 20일 블랙먼데이 폭락이었다. 지수 하락 률이 -14.90%였다. 이 수치를 겨 우 고베 철강 스캔들로 넘기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효과는 그에 못지않았 다. 1998년이 되고서, 닛케이 225 지수의 2만 포인트를 살짝 넘긴 상황이었다. 잃어버린 10년을 뚫고 제2의 활황이 찾아오는 건 아닐까 기대했던 투자자들에게 고베 강철 스캔들은 차디찬 찬물 세례가 쏟아 진 거나 다름이 없었다.
잃어버린 10년을 끊기 위해 살짝 피어오르던 희망의 불씨도 단번에 사라져버렸다.
그날 저녁.
유재원은 오랜만에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쌓여 있던 데이터를 정 리 중이었다. 의외로 회사 일은 그 다지 많이 밀려 있지 않았다. 두 명의 부회장, 그리고 사장들이 이 제 본인들의 위치와 권한에 대해 분명히 자각하면서 유재원에게 올 라오는 결재 요청이 현저하게 줄어 들었다.
대신 유재원이 북한부터 제주도 를 거쳐, 텍사스와 워싱턴 DC, 마 지막으로 뉴욕에 들르면서 생산된 데이터를 정리하는 게 일이었다.
티파니폰으로 찍은 사진과 동영 상도 한가득하고, 따로 들고 다니 는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도 많았다.
바꿔 낀 메모리칩이 10개가 넘었 을 정도였다. 그나마 시간이 날 때 마다 클라우드 서버로 업로드를 했 다. 덕분에 가장 번거로운 데이터 백업은 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이미지 파일에 태그를 일일 이 달면서 분류는 직접 수동으로 해야 했다.
"앨범 어플에 자동 분류 기능이 있으면 딱인데."
21세기 중반 스마트폰의 기술은 인공지능과 결합되어 한 차원 더 도약했다. 지금처럼 단순 반복적인 작업은 인공지능에게 맡기면 가뿐 하게 해결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 진의 내용을 인식하고 그와 연관된 태그를 자동으로 붙여주는 일은 인 공지능이 할 수 있는 기본의 기본 이었으니 말이다.
유재원도 클라우드 서버에 이미 지 분석 모듈을 만들어놓긴 했는데, 아직 학습이 끝나지 않아서 성능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앞으로도 몇 년 동안은 학습해야 유재원이 그나 마 쓸 만한 수준에 이를 것이다.
대신 이런 건 좋았다.
일일이 사진과 동영상을 직접 보고 태그를 붙여줘야 했기에, 사진 을 볼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상기 되면서 반추해볼 수 있었다.
제주도의 휴식도 좋았고, 북한에 서 찍은 사진들도 다들 의미가 있 었다. 이를 정리하면서 떠오른 아 이디어는 파워블로그닷컴에 올릴 게시물 서너 개 분량은 되었다.
띵.
한참 작업에 열중하는데, ID톡 알람이 울렸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