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권 9화
북한에 다녀왔던 이야기, 그리고 예정에도 없이 하루 연장된 일정을 통해 성사된 종전 요청 등등. 유재 원은 최대한 객관적인 톤으로 설명 했다.
"종전이라, 흥미롭군. 그러면 자 네는 북한이 진짜로 핵 개발 의사 를 포기했다 생각하나?"
"글세요?"
"응? 직접 만나 봤으니 잘 알거 아닌가?"
진지한 표정으로 유재원의 이야 기를 경청한 클린턴이 날카로운 눈 빛으로 물었다.
"제가 북한에 다녀오긴 했지만, 그건 모르죠. 사람 속마음을 어떻 게 알아요? 대신 미국에는 그걸 기 정사실로 만들 힘이 있잖아요."
김정일의 속마음이 어떻든 지금 은 핵을 포기하는 단계를 밟고 있 었다.
북한 핵개발의 상징과도 같은 영 변의 원자로는 가동이 멈춰졌고, IAEA의 사찰도 잘 받고 있는 중이 다. 예전이라면 성실하게 받지도 않고, 숨겨놓고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썼을 것이다. 반면 지금은 IAEA 에서 비협조적이라는 보고는 올라 온 적이 없다.
더욱이 지금 북한에는 핵탄두도 없고 ICBM도 없다. 이것들이 다 완성된 상태에서 비핵화를 협상을 진행해야 했던 21세기 때와는 난이 도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유재원은 곧이어 가방에서 서류 를 꺼내 클린턴에게 직접 전했다.
백악관에 오기 전 유재원이 직접 확인했던 '중화인민공화국의 부상과 주북미군에 대한 심층 연구'였다. 단순한 A4용지 출력물이 아닌, 하 드커버에 제본까지 완벽하게 된 책 의 형태였다.
클린턴은 표지의 제목을 읽더니 눈빛을 반짝이며 책을 받았다.
클린턴이 손에서 전해지는 묵직 한 무게감에 살짝 당황했을 때.
"그리고, 이건 요약본이에요."
유재원은 제본된 리포트뿐만이 아니라 A4 용지에 몇 줄 안 되는 내용을 담은 요약본도 센스 있게 내밀었다.
미국 대통령이 그렇게 한가한 자 리도 아니고, 대학교 조교처럼 꼼 꼼하게 리포트 전체를 다 읽어 보 겠는가. 유재원과의 돈독한 사이이 니 성의는 보여주겠지만, 그래도 끝까지 다 볼 기대는 크지 않았다.
"호오!"
클린턴도 리포트를 넘겨보다가 요약본을 보고 저도 모르게 반색했 다. 그리곤 리포트를 보던 것보다 훨씬 집중해서 요약을 읽었다.
"흐음? 주북미군이라 무슨 소리 인지 몰랐는데, 진짜 자네는 해병 대가 북한에 주둔할 수 있다 생각 하나? 러시아나 중국이 가만히 보 고 있지 않을 텐데? 음! 어쩌면 일 본도 좀 싫어하겠군."
역시 클린턴은 감각이 있는 사람 이었다.
요약본을 다 보자마자 유재원이 추진하는 동아시아 전략에 태클을 걸 나라들을 빠르게 골라냈다. 러 시아나 중국을 꼽은 건 당연한 일 이었지만, 일본까지 언급한 건 역 시 클린턴의 정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래요. 엄청 싫어할 거예요. 근 데 그 나라들이 싫어한다고 그 이 상으로 뭔가 할 처지도 아니죠. 미 국이 한다는 데 말이에요."
"그런가?"
"러시아는 이미 경제 엔진이 터 져버렸고, 중국은 세계 경제에 편 입되고 싶어서 정상국가인척 하고 있잖아요."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클린턴은 짐짓 놀란 듯 되물었고, 유재원은 더욱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흐음, 정상 국가인 척 한다니. 중국의 본심을 이보다 적절할 수가 없군."
클린턴도 유재원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본인 입으로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럼요. 중국이 갖은 혜택으로 자본을 유치하는 건, 그저 부적절 한 관계를 맺고 싶어서 아무 소리 나 막 하는 것 같다고 할 수 있 죠."
"응? 부적절한 관계?"
맞장구를 치며 말을 이어가던 유 재원은 아차 싶었다.
부적절한 관계라는 말은 클린턴 이 올해 8월에 열린 청문회에서 처 음 한 말이었다. 이후로 너무나 유 명해져서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쓰는 말이 되었는데, 유재원도 이 후로 귀에 쏙 박혀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당사자 앞에서 부적절한 관계라고 해버렸으니, 클린턴의 심 기가 조금 불편할 수도 있었다.
"부적절한 관계라."
"하여튼, 천안문이 터진 지 몇십 년 지났나요? 그 정권이 지금도 그대로죠? 지금은 정상인 것처럼 외국 자본을 받고 있지만, 수틀리 면 그 외국 자본은 물론 기술까지 도 꿀꺽하려고 들 거예요. 지금도 기술 유출이 심각하잖아요."
유재원은 얼른 말을 이어나갔다.
본인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보다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만약 이 자 리에 중국 측 사람이 나와 있었다 면 부들부들 떨었을 말까지도 거침 없이 쏟아냈다.
즉흥적인 설명이었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미세먼지부터 시작 해, 무역 압박, 북한 문제 등등. 전생에 중국으로부터 당한 게 너무 많았던 탓이다. 사업을 하다가 충 돌할 때도 많았고, 사업이 망한 다 음 힘없는 노인이 되었을 때도 마 찬가지 였다.
"아, 그렇지. 이 자리에서 자네에 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군."
고맙다고 하는 건 바로, 중국에 유출될 뻔한 F117과 B2 전략 폭격 기에 적용된 스텔스 기술 유출을 말하는 것이었다.
보안 의식은 아직 제대로 수립되 지 않은 상태에서, 다들 전산화하 기에 바쁜 게 요즘 미국의 군수 업 체들이었다. 온라인 환경을 만들어작업 효율을 높이는 건 좋은데, 보 안 의식은 옅어서 제대로 만들지도 못했다.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라면 로그온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만드는 것으 로 보안 단계가 확 올라가는데, 이 들은 안정성이 검증된 고전 운영체 제인 유닉스를 써서 오히려 보안 수준이 더 떨어졌다.
덕분에 중국 해커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군수 업체들의 기밀 자료 들이 빼돌려지기 시작했다. 그걸 막아준 게 유재원이었다.
미국의 정보 고속도로를 건설한 장본인이 유재원이었고, 정보 고속도로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커다란 모니터링 센터도 세워 놓았다.
그렇다고 패킷 안에 드는 내용을 살펴보는 건 아니었다. 암호화되지 않아 패킷 내부의 데이터가 다 드 러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일부 러 들여다본다거나, 따로 저장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유재원이 하지 않아도 미국의 정보 조직에서 암암 리에 다 하고 있을 것이 아니겠는 가.
대신 전 세계 인터넷의 흐름을 보면서 대충의 흐름은 알 수 있었 다. 그러다가 미국의 록히드마틴 연구소에서 중국으로 가는 데이터들이 잡히는 게 아니겠는가.
이리저리 가상의 망을 만들어 꼬 아 놓긴 했는데, ID 테크놀로지의 모니터링 프로그램엔 딱 걸렸다.
이를 확인하자마자 CIA를 비롯 한 미국 정보 조직에 통보했고, 귀 한 데이터의 유출을 막을 수 있었 다. 하지만 이 사건을 대중에게 공 개할 수는 없었다. 정보 조직의 체 면이 무너지는 거고, 그게 더 나아 가면 클린턴 행정부를 곤욕스럽게 만드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르윈스 키 스캔들로 어려운 클린턴인데, 사이버 안보 태세에 구멍이 났다고 알려지면 더더욱 곤란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클린턴 다음으로 앨 고 어를 생각하고 있는 유재원에게도 나쁜 일이었다.
"중국이라면 언젠간 했을 일이었 죠. 단지 그뿐이겠어요? 지적재산 권 무시하기도 일상인데요."
유재원은 이 대목에서 지적재산 권 이야기도 슬쩍 끼워 넣었다.
단순 불법 복제를 넘어서 원본과 똑같은 짝퉁 패키지를 만들어서 파 는 나라가 중국이었다. 소비자는 정품인 줄 알고 구매했는데, 짝퉁 인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짝퉁에 시달린 유재원은 안드로 이드 98부터는 패키지에 정품을 확 인할 수 있는 홀로그램 스티커를 붙였고, CD에도 홀로그램 테두리 를 붙여 아무나 따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안드로이드 98 의 짝퉁은 여전히 생산되고 있는 게 확인되었다. 그나마 홀로그램 스티커는 따라하지 못했는데, 판매 량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하하, 자네가 중국에 맺힌 게 많았군."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맺힌 게 많았고, 앞으로는 더 많 이 생길 테니 말이다.
"알겠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 각하지."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이 한국에 있어요. 타이밍이 잡혔을 때 치고 나가자는 거죠!"
유재원은 속담까지 인용하면서 첫발을 떼는 중요성을 설파했다.
"혹시 저녁 약속 있나? 없으면 저녁 먹고 가지 그러나."
클린턴도 요약본을 손에서 놓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는 걸 보면 유 재원의 동아시아 전략이 제법 마음 에 든 게 분명했다. 정치인 커리어 로 끝판이라 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까지 오른 사람이니, 종전 선언 을 가지고 얼마나 화려한 행사를 꾸며낼 수 있을지 견적이 딱 나온 것 같았다. 게다가 예정에도 없는 저녁까지 먹고 가라고 했으니 유재 원의 백악관 스케줄은 성공이었다.
다음날.
워싱턴 DC에서의 일을 모두 마 친 유재원이지만,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동쪽 에 있는 뉴욕을 향해 출발했다.
다만 뉴욕에 도착한 유재원이 제 일 먼저 찾은 곳은 맨해튼의 ID 인 베스트먼트나 콜롬버스서클의 타임 워너 본사도 아니었다. 바로 타임 워너 넥스트컴의 총회장이자 ID 그 룹 부회장인 레밍턴의 집이었다.
"워니 오빠!"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고, 도도도 발소리를 내며 달 려오는 꼬마 소녀가 있었다. 레밍 턴과 섀넌 사이에서 태어난 엠마 스팅이 었다.
레밍턴과 섀넌도 각별하게 아끼 는 아이였지만, 유재원은 그들보다더 엠마의 존재가 소중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유재원은 엠마를 각별히 챙겼고, 덕분에 엠 마는 레밍턴 부부 다음으로 유재원 을 잘 따랐다.
아직 어려서 '재'라는 발음이 어 려웠고, '원'이란 단어 역시 자기가 편하게 워니로 부르는 것이다.
"우리 엠마, 못 본 사이에 몇 인 치나 큰 거야? 이젠 번쩍 들어주지 도 못하겠네."
유재원은 안겨오는 엠마를 번쩍 들어주면서 반가워했다.
"이만큼!"
꼬마에겐 키 컸다는 칭찬이 제일 잘 먹혔다. 엠마는 엄지와 검지로 이만큼 자랐다는 걸 자랑했다. 실 제 빈말이 아니라 레밍턴의 피지컬 을 그대로 물려받았는지, 엠마는 만날 때마다 자란 것 같았다.
다행히 엄마인 섀넌의 핏줄도 많 이 타고나서 우락부락한 느낌은 전 혀 없었다. 이대로만 자라준다면 모태 아이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 니었다.
"보스, 텍사스에서 또 대박이라 면서요?"
"어서 오세요, 회장님."
엠마 뒤로 레밍턴과 섀넌이 따라 나와 유재원을 맞이했다.
곧 이들을 따라 집안으로 안내되 었다. 서울의 ID 글로벌해드쿼터 빌딩 최상층에 만든 팬트하우스 만 큼은 아니어도, 레밍턴 부부의 집 도 충분히 넓고 화려했다. 일단 거 실 전면으로는 센트럴파크가 내려 다 보였다. 게다가 3층의 구조에 옥상과 가든형 발코니까지 있으니 거의 저택이나 다름이 없었다.
본래 소박했던 레밍턴 부부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갑자기 이런 집에서 살게 된 건 당연히 세금 문제가 컸다.
레밍턴이 ID 그룹의 2인자 그룹 이었고, 이제는 타임워너 넥스트컴 의 총회장이기도 했다. 말만 높은 직급을 준 게 아니라, 타임워너의 회장, 부회장들의 보수와도 형평성 을 맞춰 놓았다. 그렇기에 높은 직 급에 있는 만큼 수입도 어마어마했 는데, 세금으로 나가는 돈도 많았 다. 차라리 그냥 좋은 집에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말이 다.
뉴욕에는 그런 고소득자를 위한 최고급 아파트가 많이 있었고, 레 밍턴은 그런 아파트 중에서도 제일 좋은 것을 골랐다.
"자, 이건 엠마 이건 선물이야."
집안에 들어온 유재원은 엠마에 게 예쁜 리본으로 포장한 선물을 줬다.
"와아! 워니 오빠 최고!"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