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권 7화
"내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선택 지는 두 개다. 채산성이 확인된 1,200만 배럴을 현 시세로 즉각 인 수해주지. 다른 하나는 채굴한 만 큼 그날의 시세로 매입해주는 것이 다."
하나는 밭떼기, 다른 하나는 매 일매일 주식 거래인가?
밭떼기의 장점은 한 방에 목돈이 들어온다는 점이다. 원유 가격의 변동성은 매입한 사람이 책임지는 것인데, 유가가 폭등하면 이익, 폭 락하면 손해다. 그래서 보통은 매 입자가 시세보다는 적은 가격을 제 시하는데, 역시 프레더릭은 티파니의 외할아버지인지라 시세와 같은 가격을 제시했다.
티파니는 유재원을 돌아봤다 유 재원의 몫도 있으니 의견을 구하는 것이다.
"나는 전자가 마음에 드네. 대신 계약 물량인 1,200만 배럴이 다 뽑 히면 기준가도 다시 설정하는 걸로 확실히 해야겠지."
유재원은 조금 퉁명해진 말투로 대답했다.
미국 땅에서 손에 꼽을만한 유전 을 찾아줬음에도, 시큰둥한 프레더 릭의 태도에 살짝 마음이 상했던 탓이다.
"그리고 그 돈으로 지질 데이터 분석 전문 벤처기업을 차리자. 그 러면 자기가 원하는 전 세계의 싱 싱한 탐사 데이터가 쏟아져 들어올 거야."
이어진 유재원의 말에 티파니는 물론 프레더릭까지 다 유재원을 돌 아봤다.
데이터가 중요한 게 아니라, 데 이터 분석 기법과 처리 능력이 중 요하다는 것이 오늘 증명이 된 것 이다. 프레더릭은 단 한 번으로는 그걸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였지만, 유재원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스닥 붕괴로 인해 벤처기업 열 풍이 많이 식긴 했지만, 실리콘밸 리의 야경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었다.
"아,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티파니도 자기만의 사업에 대해 로망이 있었기에, 바로 호응했다.
약혼자인 유재원이 벤처기업으로 시작해 거대한 제국을 일구는 걸 옆에서 봤던 티파니였기에, 당연히 창업에 관한 관심도 컸다. 더욱이 지금 본인이 가진 능력에 대해서도 유재원의 말에 바로 재평가를 할 수 있었다.
"흐음?"
석유 회사들은 티파니와 유재원 이 보유한 막강한 처리 능력에 관 심을 보일 게 분명하다. 설사 7대 메이저 업체들이 관심이 없다고 하 더라도 상관없다. 석유는 인류 문 명을 지탱하는 핵심 에너지였고, 석유 개발을 위해 뛰어드는 나라와 기업들은 엄청나게 많았다.
"너희들에게 무슨 말을 못 하겠 구나."
프레더릭도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들었다.
유재원에겐 좀 툴툴거리긴 했지만, 프레더릭도 티파니의 성과가 보통 이상이라는 건 확실히 알았다. 그렇기에 바쁜 스케줄이 있었지만, 취소하고 날아온 것 아니겠는가.
"티파니에게 제대로 된 데이터를 주마. 그리고 자네에게도 조만간 정식으로 클라우드 컴퓨팅 시스템 에 대한 견적을 요청하기로 하지."
프레더릭은 항복 선언과 함께 숨 겨놓고 있던 보따리도 하나 더 풀 었다.
티파니에게는 이번처럼 시험을 위한 데이터가 아닌 생생한 데이터 를 내주기로 했고, 유재원에게는 클라우드 컴퓨팅 시스템이란 일거리 하나가 나왔다.
"외할아버지, 재원이한테 줘야 할 거 하나 더 있잖아요."
기억력이 좋은 티파니는 끝까지 유재원을 챙겼다.
"어휴, 내 주머니가 오늘 다 털 리는구나. 그 소원도 잊지 않고 있 다. 내가 전능한 신은 아니니 불가 능한 건 빼고 적당한 거로 말해 보 게."
"음, 그건 저녁에 따로 말씀드릴 게요."
역시 티파니뿐이다. 유재원에겐 원유 대금이라든가, 클라우드 컴퓨팅 시스템 판매보다 더 중요한 것 이 바로 저 소원이었다. 티파니가 그걸 잊지 않고 챙겨준 덕분에 보 다 부드럽게 용건을 꺼낼 수 있었 다.
그날 저녁.
숙소로 잡은 호텔의 스카이라운 지에서 유재원은 프레더릭과 단둘 이 만났다.
프레더릭 테일러 2세의 하얀 얼 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매장량에 비하면 채산성은 매우 떨어지 는 유전이었지만, 석유 회사가 새 로운 유정을 찾았다는 건 호재 중 호재였다. 그 무거운 셰브롱의 주 가도 유전이 터졌다는 소리에 4, 5%가 펄쩍 뛰어오를 정도였다.
몇 년 간 IT 주식들에 밀려 찬밥 이었던 석유 업계에서 이만큼 주가 가 뛴 건 오랜만이었다. 더욱이 유 전의 발견은 운이 아니라 최첨단 IT 기술과의 결합이었고, 심지어 남의 기술이 아닌 손녀와 손녀사위 가 만든 것이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텍사스의 방송국들은 물론, 미국의 공중파나 주요 매체의 기자들이 나와 취재 경쟁을 하기도 했고, 덕 분에 프레더릭 테일러 2세도 오랜 만에 텔레비전 앞에 설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렇게 취재가 끝난 다음 이어진 만찬에서 프레더릭은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 딱 좋은 타이밍이라는 걸 포착한 유재원이 소원을 빌었다.
"응? 감리를 확실하게 해달라고? 이봐, 알프레드.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소원을 들은 프레더릭은 그게 무 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예, 셰브롱이 고베 조선소에 제 작 의뢰한 LNG 운반선들에 대한 감리 감독을 '빡세게' 해달라는 것 이 티파니의 약혼자인 유재원 회장 이 소원이었습니다."
프레더릭의 그림자처럼 함께 다 니는 알프레드 집사님이 유재원의 소원을 다시 한번 읊어주셨다.
프레더릭보다 나이가 있어 보이 는 알프레드 집사님였지만,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심지어 빡세 게라는 단어에는 유재원이 힘을 주 어 말했던 악센트까지도 완벽히 따 라했다.
미쓰비시 중공업의 고베 조선소 에는 현재 셰브롱이 발주한 LNG 운반선 3척이 동시 건조되는 중이 었다. 진척도도 상당해서 올해 말 에 시험 운항을 해볼 수 있는 정도 의 수준에 이르렀다.
셰브롱은 단순히 원유를 탐사하 고 뽑아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정류와 유통까지의 과정을 혼자서 다하는 종합 에너지 기업이었다.
비단 원유뿐만이 아니라 가스까 지도 다루는데, 고베 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LNG는 중동에서 뽑은 천연가스를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 가져오기 위해 의뢰한 배였다. 참고로 미국에서 생산된 원유나 천연 가스는 오로지 미국에서 소비해야 한다는 법이 있었기에, 수출은 전 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천연가스는 극저온을 통해 액화 해서 저장한다. 끓는점이 무려 -162도이니 그 이하로 온도를 유지 해야 하기에 보통 배와는 다른 고 도의 건조 기술이 필요하다. 무섭 게 성장하고 있는 한국이었지만, 아직 기술력이 부족해서 LNG 운 반선을 수주한 역사는 없었다.
일반 정크선과는 가격부터 차원 이 다른 그야말로 고부가가치 상품 인지라 열심히 연구 중이긴 한데, 아직은 일본이나 유럽 조선소들의 독점 상품이었다.
"배가 잘 지어지는지 보는 건 당 연한 일이지. 그런데 이게 자네가 귀중한 소원을 소모해서 빌 정도의 일인가?"
"물론이죠. 만약 하자가 발견되 면 강경 대응해주세요. 그리고 중 점으로 보실 때 후판이나 알루미늄 합금의 특성을 검사해보는 것도 추 천해 드려요. 인도받고 나서 하자 를 찾는 것보다 짓는 중에 찾는 게 훨씬 좋은 일이잖아요. 만에 하나 인수가 좀 늦어졌다고 해도, 23번 유전에서 가스도 많이 나오니 에너지 수급에는 별 탈도 없을 거고요."
유재원은 그렇다 아니다를 떠나 감리 때 살펴봐야 할 사항에 대해 꼼꼼하게 짚어주기까지 했다. 경험 많은 프레더릭은 유재원의 말이 진 심이라는 것을 바로 인지했다. 다 만 유재원이 일본에서 하려는 뭔가 거대한 일과 고베 조선소의 LNG 운반선을 꼼꼼히 점검하는 게 무슨 연관인지는 쉽게 유추할 수 없었다. 게다가 유재원의 말투를 보면 LNG 운반선에서 심각한 하자가 나올 거라고 단언하는 듯 들렸다. 사업하는 사람이 금해야 하는 게 장담이고, 유재원도 성공한 사업가로서 그걸 잘 아는 듯 했는데, 이 번엔 유별난 느낌이었다.
"알겠네. 소원은 소원이니 해주 지. 게다가 오늘은 특별한 날이기 도 하고."
프레더릭이 무슨 말을 할지 긴장 했던 유재원은 대수롭지 않게 소원 을 들어준다는 말에 안도했다.
"하지만, 나중에 이걸로 무슨 일 을 한 것인지는 확실히 알려주게. 궁금한 건 절대 못 참는 선격이니 말일세."
"물론이죠! 그런데, 제가 딱히 말 씀을 드리지 않아도, 텔레비전을 잘 보고 계시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물론, 끝나고 나서는 제대로 말씀드릴게요."
유재원이 하려는 일은 간단했다.
바로 일본 공략이다.
일본 경제가 여러 방면에서 타격 을 받을수록 유재원에겐 유리했다. LNG 운반선 3척의 납기 지연 정 도가 일본 전체에는 큰 타격은 아 니겠지만, 탄탄한 장벽에서 벽돌 몇 장 빼는 정도의 데미지는 기대 할 수 있었다.
그러한 데미지가 누적되고, 일본 의 신뢰도가 의심받기 시작하면 아무리 탄탄한 경제 대국이라도 흔들 릴 수밖에 없다. 그때가 바로 유재 원이 들어갈 절호의 타이밍 아니겠 는가.
"뭔가 재미있는 일을 꾸미는 것 같군. 하지만 너무 크게 벌이진 말 게. 사람 일은 어디로 튈 지 아무 도 모르는 것이니 말일세."
프레더릭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도 해줬다. 유재원도 공감되는 말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유재원에게 일본의 일은 할 수 있 으면 최대한 키우는 게 좋았기에, 간단히 넘어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 다.
이후 텍사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유재원은 다음 날 복귀를 시작했다.
코스는 사람들의 예상과 달랐다. 티파니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돌 아온 게 아니라, 유재원 일행만 따 로 떨어져서 워싱턴 DC행 비행기 를 탄 것이다.
워싱턴 DC에 도착한 유재원이 제일 먼저 찾은 건 백익관이나 정 치인들의 사무소가 아니었다. 저 멀리 하얀색 거대한 돔으로 상징되 는 미국 국회의사당이 보이는 애너 코스티아 강변의 작은 건물로, 간 판도 딱히 달려 있지 않은 그런 사무실이 었다.
정면에서 보면 작은 규모의 건물 이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또 넓 은 구조이기도 했다. 세로로 긴 형 태였기 때문이다.
"회장님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 합니다."
유재원이 그 건물에 도착하자마 자 기다렸다는 듯 일단의 사람들이 나와 그를 환영했다.
"안녕하십니까? 연구소장 에드 로이스입니다."
에드 로이스는 유재원이 직접 점 찍은 동아시아 전략 연구소의 핵심인물이었다. 로스앤젤레스 출신으로 한인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는 백 인이었고, 동시에 미국의 엘리트 코스를 한 방에 뚫어낸 인재이기도 했다.
에드 로이스 역시 정치에 야망도 있어서 강력한 서포터가 필요했는 데, 유재원이 딱 나타났고, 좋은 협 력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에드 소장님, 반가워요. 유재원 입니다."
번잡한 환영 행사는 아니었다. 그래도 규모는 조금 있어서 길거리 의 사람들이 무슨 행사를 하나 하 고 호기심을 가질 정도였다.
타인의 관심을 즐기는 수준에 이 른 유재원이었지만, 이런 식의 행 사까지 그런 건 아니라서 인사를 받고는 바로 건물로 입장했다.
이곳이 바로 ID 그룹이 거느리고 있는 싱크탱크 중 하나인 동아시아 전략 연구소였다.
크게 보자면 로비 단체라고 해도 틀린 소리는 아니지만, 로비 전문 으로는 덕진 재단이 있다. 동아시 아 전략 연구소의 중요한 임무는 바로 미국에 한국의 중요성을 알리 고, 그 중요성을 바탕으로 동아시 아의 미래를 예견하는 일을 하기도 한다.
쉽게 말하자면 동아시아 전략 연 구소라는 조직의 이름에 몇 가지 단어를 추가하면 된다. '한국과 미 국, 공동의 이익을 위한'이라는 단 어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 지만, 미국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이 2차 대전 이후로 세운 동아시아 전략의 핵심은 일본이었 다. 애치슨 라인부터 해서 일본은 동아시아의 최우선 동맹이었다.
한국은 대륙 세력의 핵심인 소련 과 중국의 교두보와 대리전 파트너 정도의 역할이었다. 밀고 올라가면 좋고, 밀리면 언제든 발을 뺄 수 있는 단계였다.
이러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바꿔 보자고 만든 게 바로 이 연구 소였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