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권 6화
최근 ID 소프트웨어는 휴식기였 다.
정신없이 달려오면서 임직원 모 두가 피곤에 쩔은 상태가 장시간 지속된 탓이다. 버그나 밸런스 패 치, 확장팩 정도만 소소하게 내고 있긴 한데, 차기작 개발은 아직 정 해진 게 없었다. 하지만 게임 개발 사는 새로운 게임을 내야만 꾸준히 유지되는 조직이었다.
특히 ID 소프트웨어의 게임들은 멀티플레이가 모두 무료인지라, 판 매량이 떨어지면 다음부터는 손해 가 발생하는 구조였다. 그나마 지 금까지 벌어둔 돈이 수억 달러는 됐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능력 좋은 사 람들이 작품 활동은 하지 않고 쉬 고 있는 건 좀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움! 차기작이요?"
"회장님! 회장님처럼 능력이 넘 치시는 분은 쉬지 않고 아이디어가 나오겠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사 람들은 쉴 땐 쉬어줘야 합니다."
로메로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정작 능력자들은 본인이면서 일반인이라 말하는 것에 어이가 없어지는 유재원이다. 지금 유재원이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전생을 바꿔서 얻어진 능력이었다. 그러니 시간 대비 효 율을 따지면 존이나 로메로가 한참 위였다.
"걱정 마세요. 세기말이나 신세 기에 맞춰서 놀라운 신기술로 무장 한 게임을 낼 테니까요."
역시 존은 좀 더 진중했다.
ID 소프트웨어의 신작 게임은 단 순히 ID 엔터테인먼트의 매출에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니었다. 3D 가속 카드부터 새로운 CPU, 메모리 속 도와 용량 등등 컴퓨터 산업 전체 영향을 주는 업체였다.
매년 컴퓨터의 성능은 2배씩 향 상이 되는데, 사실 사무용으로만 컴퓨터를 쓴다면 1,2년 전의 모델 을 써도 별 탈은 없다. 물론 수백 만 수천만 건의 고객 데이터를 다 뤄야 할 엔터프라이즈급 업무를 하 는 데 있어선 최신의 시스템이 필 수지만, 간단한 문서 작성이나 엑 셀 정도만 한다면 저가형 모델로도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성능 제품 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건, 게임에 있어서 성능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았기 때문이다. 고성능 시스템의 퍼포먼스를 120%씩 활용하는 게 ID 소프트웨어의 특징이었 고, 그만큼 컴퓨터 그래픽의 수준 도 다른 업체들과 차원이 달랐다.
유재원은 이러한 인식을 21세기 에도 꾸준히 이어가고 싶었다. 그 러자면 혁신적인 신작이 꾸준히 나 와 줘야 했다.
"혹시 소재가 필요하다면, 조만 간 개봉되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 는 영화 한 번 보세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
"네, 톰행크스 주연에 스필버그 감독이 제작한 영화인데, 제작자들 사이에서 이미 호평이 자자해요."
그런 존 카멕에게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 는 영화를 권하는 유재원이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영화 전체 가 재미있었다. 그래서 명작 반열 에 기꺼이 올려주는 그런 작품이다.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백미는 초반 30분 동안 펼쳐진 노르망디 상륙작 전이었다. 입체적인 사운드에, 바로 코앞에서 상륙전을 보여주는 카메 라 앵글은 관객들에게 전쟁터 한복 판에 있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수많은 게임 개발자에게도 커다 란 영감을 심어준 장면이기도 했다. 존과 로메로를 비롯한 ID 소프트웨어의 개발자들도 영화를 보면 얻는 게 분명히 있을 것이다.
"회장님께서 투자한 영화죠?"
"아? 네. 투자했죠."
당연히 이런 대작 영화를 놓칠 ID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이제는 타임워너 넥스트컴을 통해 워너 브 라더스라는 영화사도 거느리게 되 었지만, ID 엔터테인먼트의 투자 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좋은 영화 라면 어느 제작사든 상관없이 무조 건 투자한다는 것이었다.
"역시! 알겠습니다. 흥행 걱정은 마세요! 직원들을 데리고 단체 관람이라도 할 테니까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유재원은 굳이 말리진 않았다.
영화는 분명 재미가 보장되는 명 작이었고, 보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만큼 얻는 게 더더욱 많을 거라 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ID 소프트웨어의 사장들 과 즐거운 식사를 마친 유재원은 다시 유전을 향해 이동했다. 텍사 스도 워낙 큰 땅이라서 자동차 대 신 헬리콥터를 선택했다.
"재원아!"
헬리콥터에서 내린 유재원에게 티파니가 달려와 바로 안겼다. 진 한 키스도 이어졌다. 유재원의 헬 기가 착륙한 헬리포트 쪽으로 티파 니의 부모님도 와 계셨고, 김대석 이나 경호원들도 가까이 있어서 유 재원은 살짝 민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티파니의 애정 공세는 한동안 이어졌다. 떨어져 있은 지 한 달은 훌쩍 넘었고, 게 다가 유전이 터졌다는 역사적 사건 에 애정이 폭발한 모양이다.
그렇게 한참이나 잡혀 있다가 풀 려난 유재원은 곧이어 예비 장인, 장모에게도 인사를 했다. 다들 유 재원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는 눈빛 이었다.
"저기야. 저기 23번 채굴기."
곧이어 석유가 쏟아진다는 23번 유전으로 차를 타고 이동했다.
유전이 가까워질수록 뭔가 메케 한 냄새가 짙어졌다. 짙은 기름 냄 새였다. 주유소에서 나는 냄새와는 또 다른 느낌, 정제되지 않은 원유 특유의 냄새였다.
"와."
곧이어 유재원의 눈에 활활 타오 르는 불꽃이 들어왔다. 가설해 놓 은 유정 시설에서 나는 불꽃이었다. 마치 이곳이 미국의 텍사스가 아닌 사우디아라비아에 온 듯한 느낌이 었다.
거기엔 현장을 물끄러미 보고 있 는 프레더릭 테일러 2세도 있었다. 그냥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하긴 셰브롱의 오너가 예측하지 못 한 곳에서 유전 하나가 터졌다고 허둥거리면서 현장 지시를 하는 것 도 좀 이상한 모습일 것이다.
" 왔나?"
그런 프레더릭 테일러 2세는 유 재원과 티파니가 다가오자 몸을 돌 렸다. 눈빛이 제법 날카로웠다. 사 랑스러운 손녀나 본인의 딸이 아닌, 유재원을 콕 찍어서 보는데, 마치 유재원의 속을 꿰뚫어 보려고 하는 듯싶었다.
"책임지게."
갑자기 나온 말도 앞뒤가 없었 다.
"네?"
"이 땅은 20년 전에 조사가 끝난 땅이었지. 물론 그 결과는 맨땅이 라는 것으로 말이야. 그런데 티파니에게 준 첫 과제에서 이 땅을 고 르더란 말이야. 지질 데이터 분석 이라는 것이 영 믿을 게 못 된다고 하는 교훈을 주려고 시범 채굴을 시켰는데, 이렇게 잭팟을 터트렸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프레더릭의 푸념이었다.
유재원은 그런 프레더릭을 보며 미소 지었다. 유전 개발이 어려운 사업인 건 맞다. 그래서 그 교훈을 티파니에게 주려고 어려운 과제를 내주었던 모양인데, 이젠 반대가 되었다. 영 아니라는 결과가 나온 데이터도 이제는 다시 검토하게 생 겼으니 말이다. 그러자면 초대형분석 시스템이 필요할 테고, 슈퍼 컴퓨터 혹은 클라우드 컴퓨팅 시스 템이 필요하다. 그런데 가성비를 따지면 클라우드 컴퓨터 시스템이 월등하다.
예전엔 ID 테크놀로지의 독점이 었지만, 리눅스 2.0이 나온 지금은 수많은 업체가 자신들도 클라우드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고 난리들이 었다. 하지만 기업에서 쓸 만한 신 뢰성 높은 시스템은 여전히 ID 테 크놀로지의 앞마당이다.
"그래도 좋아하긴 이르다네. 먼 저, 이 유전의 매장량부터 설명하 지."
프레더릭은 그런 유재원의 속마 음을 읽은 듯 말을 이었다. 유재원 도 미소를 지우고 바로 집중 모드 로 전환되었다. 유전의 가치가 곧 일본 공격의 밑바탕이 될 것이기에, 귀가 쫑긋 세워질 수밖에 없었다.
프레더릭 테일러 2세의 근엄한 표정이 깨질 뻔했다. 본인을 향해 집중하는 유재원의 진지한 표정은 이제까지 본 적 없는 모습이었던 탓이다. 예전엔 애늙은이 같은 느 낌이었다면, 지금은 액면가 그대로 의 반응이었으니 말이다.
"현재까지 파악된 매장량은 대략 12억 배럴이다. 중동에 있는 유전들에 비하면 소형이라 할 수 있지."
12억 배럴?
귀를 기울이던 유재원은 12억이 라는 소리에 그럴 리가 없는데 라 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이유 는 간단했다. 티파니에게 점찍어준 곳은 미국의 유전 역사상 손에 꼽 힐 만큼 커다란 곳이었다. 그러니 까 12억이 겨우라는 소리가 나올 만큼 거대한 유전이란 말이다.
이렇게 큰 유전을 티파니에게 내 줄 수 있었던 건, 전생에도 이곳의 유전을 개발하는 회사는 셰브롱이 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셰브롱에서 개발할 유전인데 20년 일찍 뽑아낸다고 탈 날 일은 없을 거라고 봤 다.
"12 억이요?"
유재원은 유전이 발견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유정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동시 에 12억 배럴이라는 매장량을 바탕 으로 오늘의 텍사스 중질류 시세에 맞춰 자연스럽게 돈으로 환산되었 다.
ID 소프트웨어 식구들과 점심식 사를 하면서 확인했던 텍사스 중질 류 1 배럴의 가격은 14달러. 그러 니 12억 배럴은 168억 달러라는 액수였다. 그리고 아직 프레더릭테일러 2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문제는 채산성이 있는 매장량으 로 환산하면 1/100인 1,200만 배럴 이라는 거지. 넓고 얕게 퍼진 셰일 지형이라 채굴에 문제가 많다."
그나마 있던 12억 배럴도 순식간 에 100분의 1이 되었다. 그러니 현 재 시세도 1억 6,800만 달러 정도 되는 정도로 줄었다.
"외할아버지! 그렇게 말하니깐 규모가 너무 조그마해졌잖아요."
티파니의 항변이었다. 그렇지만 작은 건 작은 거였다. 하루에 1만 배럴씩만 뽑아도 4년이면 바닥이 날 양이었으니 말이다.
"재원아, 실망할 것 없어. 가스가 풍부한 셰일지층 구조거든. 석유보 다 더 가스의 양이 훨씬 더 많을거 야"
"그래 봐야 최대 10년이다."
티파니는 유정의 가치를 높이는 데 열심이었고, 프레더릭은 낮추는 데 열심이었다.
현실에서는 사이좋은 외할아버지 와 손녀였지만, 역시 비즈니스의 영역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 공통의 인식이 유재원에게 딱 보였다. 프레더릭테일러나 티파니 모두 셰일은 문제 덩어리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점 이었다.
"넓고 얕게 묻혀 있다면 가로로 파고 들어가면 되잖아요?"
티격태격하는 둘에게 유재원은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 가로로?"
"훗, 손녀사위가 모르는 것도 있 군. 채굴기의 구조를 보면 딱 보이 지 않나? 어떤 채굴기라도 지층을 파고들 힘은 수직으로밖에 가할 수 밖에."
유재원은 프레더릭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셰일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 는 건 유가가에 투기 자본이 몰리 며 100달러를 넘는 미친 가격을 찍 을 때부터였다. 더욱이 프레더릭의 말대로 유정을 수평으로 뚫는 방법 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 했지만, 물과 모레 그리고 화학물 질 혼합제를 강제적으로 주입하는 파쇄공법이 나오면서 가능해졌다.
당연히 유재원은 그 기술도 기억 의 궁전에 담아왔지만, 아직 꺼낼 때는 아니었다. 유가가 14달러 대 인 지금 꺼내봐야 호응은 하나도 없을 테고, 어쩌면 석유 생산국들의 견제만 받아서 일찍 사장될 수 도 있었다.
셰브롱처럼 생산과 유통을 동시 에 하는 업체는 원유 가격이 얼마 가 되었든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석유만 팔아 먹고사는 나라들은 산 유국들은 유가는 곧 수익이니 말이 다.
"결과적으로 잠재력은 높지만 있 지만, 채산성은 떨어지는 유전이다. 그래도 유전 개발 성공이라는 건 틀림없다. 차라리 터질 거라면 처 음부터 크게 터트렸으면 좋았을 텐 데, 아쉽군."
프레더릭의 결론이었다.
유재원은 아쉬웠다. 채굴 기술의 수준이 낮으니 대박을 뚫고도 쪽박 대접이다. 더욱이 프레더릭은 티파 니에게 교훈을 주지 못한 게 더 아 쉽다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처음에 대박을 터트리면 나중에는 개털이 된다는 식의 이야기가 미국에도 있 는 게 확실하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