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444화 (444/1,007)

23권 3화

"갑자기 80년대로 되돌아간 느낌 이네."

배정받은 숙소에 짐을 푼 유재원 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대리석 바닥에 화려한 샹들리에, 실크 벽지와 고풍스러운 가구들. 북한 최고 수준의 영빈관다운 모습 이었다. 그런데 전자기기는 전화기 와 배불뚝이 텔레비전, 오디오 정 도가 최선이었다.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여 있긴 했는데, 너무 구식 이었다.

마치 프레더릭 테일러 2세의 저 택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전화기도 내부에서만 통하는 것 이었고, 텔레비전도 조선중앙 방송 만 나온다. 컴퓨터도 없고, 인터넷 도 없었다.

그랬던 프레더릭도 요즘은 유재 원과 티파니가 자주 찾아오니 집에 전자기기들이 많아졌다. 북한도 빈 번하게 찾아오면 달라질 것 같긴 한데, 북한이라 예측할 수가 없다.

똑똑!

"네? 누구세요?"

"김 행정관입니다."

"아, 행정관님! 들어오세요."

"괜찮습니다. 1시간 후에 북한측 김용남 내각부총리와 면담이 있다 는 말을 전해드리는 게 전부라서 요."

"네, 준비할게요."

김 행정관이라면 청와대 식구로 의전을 담당하는 실무진이었다. 발 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는 사 람이었고, 용무도 다음 일정을 전 해주는 것이라 말만 전하고는 바로 사라졌다. 전명헌과 동행한 경제인 들이 유재원뿐만이 아니었기에, 일 일이 챙겨야 하는 모양이다.

당연히 미리 공지된 사안이었지만, 그걸 또 일일이 챙겨서 착오 없이 진행시키는 게 김 행정관의 임무였다.

유재원과 재벌 회장님들이 내각 부총리와 만나는 시간, 전명헌 대 통령은 1시간 후인 오후 3시부터 북한 노동당 본부 청사에서 1차 정 상회담을 치른다.

3일 일정이라 북한에서 지내는 시간은 많고, 그사이 정상회담이 적어도 2번, 많으면 3,4번 정도 치 러질 텐데, 엄청나게 파격적인 합 의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모든 정상회담은 사실 실무 회담 에서 합의된 사안을 정상이 재확인하는 작업이니 말이다. 이번 정상 회담도 비슷했다.

정상회담의 의제로 언론에 보도 된 건 금강산 개발과 개성공단이었 다. 그리고 이야기가 잘된다면 북 한산 석탄과 철광석을 수입하는 정 도까지 합의가 될 거였다. 기업들 이 가장 기대하는 건 개성공단과 석탄, 철광석이었다.

외환위기로 인해 수입 물가의 폭 등으로 생산자 물가도 같이 폭등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숨통이 트일 수 있는 곳이 그나마 북한이 었다. 거리도 가깝고 가격도 엄청 나게 저렴하니 들여 올 수만 있으면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숨겨진 의제가 하나 더 있었으 니, 바로 종전 선언이었다.

이야기만 잘되면 개헌까지도 순 식간인데, 과연 잘될지 모르겠다.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으로 1시간 이란 대기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고, 유재원도 공식 일정을 시작했다.

북한에서의 이틀이라는 시간은

쏜살처럼 빠르게 흘렀다.

정해진 일정들은 빡빡했고, 그에 맞춰 여기저기를 다니다 보니 시간 이 어떻게 가는 줄 몰랐다.

오늘 일정도 내각부총리와 함께 북한이 자랑하는 공장들을 둘러보 고, 관광지에 다녀오니 순식간에 끝났다.

이제 남은 공식 일정은 내일 오 전의 환송식이 전부였다.

"뭐지?"

어제부터 저녁마다 이어진 만찬 을 끝내고, 본인의 숙소에 돌아온 유재원은 아리송해졌다. 북한의 태도가 뭔가 좀 이상했다.

대접이 부족하다는 건 아니었다.

남북 간 체제 경쟁은 88올림픽으 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IMF 가 터진 한국이라도 북한의 사정보 다는 훨씬 나았다.

유재원이 말하는 적극성이라는 건 바로 종전에 대한 북한의 태도 였다.

북한이 바라는 건 체제 보장이었 다. 공산당 체제가 아니라 김씨 일 가들의 독재 체제를 보장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이를 위한 전제조건은 북한과 미국의 수교인데, 그러기 위한 사전 조치가 종전 선언이었다.

미국은 북한을 계속 무시하는 태 도였고, 아예 나라로 취급하지 않 았다. 그러니 미국의 눈에 들기 위 해 북한은 온갖 사고를 다 쳤고 급 기야 핵 개발을 시작한답시고 영변 에 핵 시설을 만들었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북한의 입 장에서의 서사였고, 한국이나 미국 이 보는 관점은 완전 반대이긴 하 다.

하여튼, 종전 선언은 북한의 정 상 국가로의 전환에 중대한 문제였 다.

"종전에 대한 적극성이 너무 부 족한데?"

그러면 최소 언급이라도 있어야 했다. 적어도 어제의 1차 상봉이라 든가, 오늘 만찬 전에 있었던 2차 상봉에서 말이다. 하지만 김정일은 물론 북쪽 고위 인사들은 종전 선 언에 대해 한마디도 떼지 않았다.

오히려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사업에 집중했다.

한국의 대기업들이 많이 들어와 줬으면 한다는 바람도 숨기지 않을 정도였다. 회장님들은 다들 긍정적 으로 검토해보겠다고 했을 뿐, 개성공단이 조성되면 들어가겠다고 확실하게 답을 하는 사람은 유재원 이 유일했다.

1초의 고민도 없이 바로 대답했 기에 김정일의 표정도 살짝 흔들렸 을 정도였다.

사실, 경제적인 면만 따지면 개 성공단은 남는 장사였다. 중국보다 저렴한 인건비에 말이 통하는 노동 자였고, 성실함도 좋았다. 일도 빨 리 배워서 믿고 생산을 맡길 수 있 었다.

위험 요소는 딱 하나, 정치 지형 의 급변이었다.

잘 유지되던 개성공단이 갑자기 닫힌 건 북한의 핵 개발로 인한 남 북 정세의 변화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개성공단이 닫히면서 입주한 기업들의 피해가 컸다.

이 때문에 일부 왜곡을 일삼은 언론들은 이걸 거꾸로 북한에 돈을 퍼주는 대표적인 사업이라고 서슴 없이 말했다.

하지만 남북 관계가 다시 정상화 되고 개성공단도 재개되었을 때, 피해를 봤던 기업들은 다시 돌아갔 다.

이유는 딱 하나.

경제적인 이점 때문이었다.

북한이 노동력과 부지를 제공해 얻는 이익보다 훨씬 더 큰 이익을 입주한 기업들이 가져갔고, 그것은 남북한의 정치 리스크보다 컸다.

다만 유재원이 바로 들어가겠다 고 말한 건, 그러한 경제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전명헌의 위신을 세워주기 위함이었다.

북한에서 이번에 초청된 경제인 들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대접도 융숭했다. 심지어 김정일이 후한 조건으로 입주를 제안했는데, 아무 도 응하지 않으면 전명헌의 체면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LCD 텔레비전, 보급형 컴퓨터의 최종 조립을 하는 공장을 세우는 건 유재원에겐 일도 아니었기에 흔 쾌히 대답했다.

유재원 말고도 미래 그룹에서도 개성공단에 자동차 부품 공장을 세 우기로 약속했다.

북한은 ID 그룹과 미래 자동차만 으로도 만족하는 눈치였다. ID 그 룹의 위상은 북한에도 잘 알려진 상태였다. 미래 그룹 역시 한국 최 고의 대기업이었고, 그중에서도 자 동차 부품 회사는 알짜 중 알짜였 다.

두 회사만으로도 개성공단의 PR 도 자연스럽게 이뤄질 거라는 예측 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노동 집약형 중소기업들은 이미 계 산기를 다 두드리고 입주 신청서를 받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으니 개성 공단의 성공은 이미 예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덕분에 조금 전 끝난 만찬장에서 전명헌 대통령 다음으로 유재원이 김정일의 말을 많이 받았다. 자연 스럽게 다른 재벌 회장님들은 찬밥 이 되었다.

재미있는 건 재벌들의 반응이었 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개성 공단 때문에 덤터기 쓰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분도 있었고, 소외되는 경험이 처음인 사람은 어색한 표정 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사람 중에 일성 그룹의 황태자인 최재영이 있 었다.

최재영은 유재원보다 10살 정도 많은, 30대 초반으로 공식적으로는 일성 자동차 부회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다. 그러니 회장님들만 즐비한 전명헌의 경제인 수행단에 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최재영이 경제인 수행 단에 낄 수 있었던 건, 최현희 회장의 대리라는 명분 덕이었다. 언 론에 두문불출했던 게, 단순히 회 사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지병이 다 시 도진 것 때문임이 이번에 밝?혀 졌다.

회사가 잘 돌았으면 지병도 잘 관리되었을 텐데, 외환위기로 일성 그룹의 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던지 라 건강 관리까지도 실패한 모양이 다.

때문에 최재영이 최연희 회장을 대신해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나온 것인데, 그 행사가 무려 남북 정상 회담이었다.

당연히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

다. 동행한 방북단 취재진의 최우 선 취재 대상은 전명헌과 김정일이 었지만, 처음 공식 행사에 모습을 보인 최재영도 취재의 대상이었다. 덕분에 매우 경직된 자세로 쉴 때 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그런 최재영의 모습을 유재원도 집중해서 봤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속마음 에는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탓이다. 유재원의 분신과도 같았던 기계심리학 기술을 강탈한 놈이 바로 최재영의 아들이었기 때 문이다.

당장 달려가서 자식 교육 좀 똑바로 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 런데 최재영은 유재원의 속마음도 모르면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 를 지었다.

어색한 미소였다.

억지로 짓는 것인지, 아니면 호 의가 있어서 그러는 것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을 정도였다. 다행히 유 재원과 최재영이 말을 섞을 일은 그다지 없었다. 유재원이 일부러 거리를 두었고, 최해영도 굳이 가 까이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여튼, 그건 그거고. 종전 선언 은 왜 언급이 없냐는 말이지."

삼천포로 빠지던 유재원은 브레 이크를 잡고 본래의 생각으로 돌아 왔다. 경제적 이슈는 그런대로 괜 찮게 진행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종전 선언의 종 자도 언급이 없었 던 것이다.

이로 인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전 명헌의 얼굴에 조바심이 오르는 게 뻔히 보일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 문제에 대해선 유재원이라도 특별 한 답은 없었다. 그저 북한이 예전 많이 하던 대로 살라미 전술, 그러 니까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나 싶 었다.

똑똑.

"네!"

갑자기 벼랑 끝 전술을 왜 들고 나왔나 한참 고민 중일 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문을 열어보니 북한에 들어온 다음부터 항상 바쁜 김 행정관이 있었다.

김 행정관은 긴말하지 않았다.

"대통령님께서 찾으십니다."

유재원도 다른 대답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방문을 나섰 다.

"도대체 저쪽 애들은 무슨 생각 인 거 같냐?"

역시 전명헌도 유재원과 같은 고 민이었던 모양이다.

유재원이 도착해 마련된 자리에 앉자마자 전명헌 할아버지는 한탄 부터 시작했다. 금강산 관광도 좋 고, 개성공단도 좋았다. 그런데 정 작 기대했던 종전 선언에 대해선 아직 한마디도 없으니 답답하셨던 모양이다.

전명헌의 반응을 보아하니 까딱 했으면 먼저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친구 사이였다면 그래도 상관없지만, 국가 간에는 누가 먼저 의제를 꺼냈느냐에 따라 명분이 달라졌다. 북한에서 종선을 요청해야만 미국에도 그 제안을 자 연스럽게 전해줄 수 있었다.

만약 한국이 먼저 종전을 하자고 했으면, 북한을 달래고 미국과 조 율하는 것까지 모두 한국 측 책임 이 되니 말이다.

종전 선언을 가지고 개헌까지 로 드맵을 짜놨던 전명헌으로서는 난 감 그 자체였다.

이럴 때 지혜를 모으라고 청와대 에 비싼 임금을 줘가며 보좌관을 세우는 것이다. 전명헌도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북한 전문가들을 모 아두고 머릴 맞대기도 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딱히 답이 나오지 않으니, 결국 유재원까지 찾게 되 었다.

유재원은 전명헌의 물음에 짧게 생각에 잠겼다.

살라미 전술에는 트럼프식 미친 전술로 받아치는 게 최고지만, 지 금은 여건이 따라주지 못하니 사용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주변을 쓱 둘러본 유재원 은 살짝 숨죽인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동시에 가방에서 i웍스 노트북을 열고 정보팀과 최강욱 등 이 만들어준 북한의 자료도 띄웠다.

"음, 아무래도 이거 우리가 들러 리를 서게 된 거 같아요."

"들러리라니?"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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