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권 1화
그야말로 전생을 갈아 넣어서 만 든 마스터플랜이었다. 그걸 차근차 근 실행하면서 이뤄낸 성과였기에, 유재원 본인도 스스로의 위치에 대 해 뭔가 대견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좋은 게 있다니.
전명헌의 말에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유재원이었다.
"사람 보는 눈. 나는 아버지가 소를 판 돈을 가지고 내려와 일을 시작했다. 결국 미래 그룹이라는 대기업을 세웠고 이 자리까지 왔다. 그러면서 실패도 많았지. 그중에서 도 제일 큰 실패가 바로 인사 실패 다."
아
가만히 듣고 있던 유재원은 비로 소 전명헌의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믿었던 놈이 내 돈 빼돌린 걸 뒤늦게 알면 뼈아프지."
"이명박 전 미래 건설 사장이 요?"
"후후, 그래 그놈도 있다. 재원이 네 덕에 빼돌려진 땅도 찾았더랬지. 그런데 이명박과 같은 놈들이 한둘 이 아니었어. 어쩜 그리 기회가 있 을 때마다 해먹는 놈들이 많은 건 지. 뭐, 사실 그것도 다 나를 보고 배웠던 거겠지."
자기반성인지, 아니면 한탄인지 모를 이야기를 늘어놓는 전명헌이 었다.
"네 ID 그룹은 아주 다르더구 나."
유재원은 전명헌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자부심을 뿜었다.
ID 그룹에서도 횡령 같은 일이 없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명박 처럼 회사의 큼지막한 자산을 빼돌 리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건 유재원이 사람을 잘 뽑아서가 아니라, 3중으로 확인되는 회계 시스템 덕이 컸다. 유재원 직속의 감 사팀도 저승사자처럼 종횡무진하며 비리를 잡아냈다.
마치 안드로이드 시스템이 컴퓨 터 사용자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 는 것처럼, 유재원도 검증 절차를 많이 만들었다. 최근 시범적으로 사용 중인 ERP 시스템에는 아예 인공지능 기반의 회계 검증 모듈을 붙일 작정이었다.
그렇지만 사장단이나 임원들에 대해서는 전명헌의 말도 틀린 이야 기는 아니었다.
최강욱이나 레밍턴, 엘런 등등은 기대 이상으로 능력도 좋았고, 신뢰도 최고였다. 덕분에 최강욱에겐 수십조 원 규모의 백호 펀드를 맡 길 수 있고, 레밍턴에겐 수백억 달 러짜리 타임워너 넥스트컴의 총회 장직을 부탁할 수 있었다.
"재원이, 너의 능력 중 가장 높 이 사는 것이 사람 보는 눈이다. 그러니 그 좋은 눈으로 김정일이라 는 녀석 좀 봐주거라."
전명헌의 부탁에 유재원은 고개 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 는 일이었다. 전생에 얻은 지식 덕 에 유재원은 전 세계에서 김정일을 가장 잘 안다고 해도 무방했다. 어쩌면 김정일 본인보다 유재원이 더 잘 알 수도 있었다. 더욱이 전명헌 이 북한에 같이 가자고 했을 때, 흔쾌히 동의한 것도 김정일을 직접 보고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약 제가 긍정적이라고 하면 요?"
"그러면 미국과의 종전 협정을 주선해야지. 조만간 미국 방문이 있지 않느냐? 그때 살짝 말해보련 다. 원래 클린턴 대통령하고 김일 성이 만나려고 했던 일이 있지? 그 걸 이어서 하면 되니까."
전명헌의 말에 유재원은 잠깐 잊 고 있었던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상기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을 만난 김일성은 의 부탁 중 하나가 북미 대화의 주 선이었으니 말이다. 미국도 긍정적 으로 생각했는데 김일성의 급사로 성사되진 못했다. 그걸 김정일이 이어서 하면서 본인의 존재감 확인 과 함께 유훈 통치를 강화하려는 의도인 것 같다.
"그런데요. 할아버지."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던 유재원 에게 브레이크가 살짝 걸렸다.
"응? 뭐냐?"
"그렇게 주선을 해주면 우리도 좀 얻어야 하는 게 있지 않겠어 요?"
한국이 북한과 미국의 메신저 역 할을 해서 종선 선언을 한다는 건 좋았다. 그런데 한국도 뭔가 좀 얻 는 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 다.
북한이 종전 선언을 얻은 다음의 행보는 유재원에겐 뻔한 일이었다. 3대 세습 독재자인 김정은의 연대 기만 봐도 각이 딱 보였다. 어쩌면 본래의 역사 흐름대로 느닷없이 핵 개발이라는 뒤통수를 칠 수도 있었 다.
그렇지만 구더기 무섭다고 장을 담그지 못할 이유는 또 없었다. 종 전 선언 후 평화 체제 유지만으로 한국에는 많은 것이 바뀔 테니 말 이다.
"홈, 개성 공단이랑 금강산 관광 이 있지 않으냐?"
"그거야 할아버지가 보내주신 소 값이고요."
"한반도 비핵화는?"
"경수로 만들어주고 있잖아요."
유재원의 말에 전명헌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듣고 보니 유재원의 말이 또 정 론이었다. 만약 종전 선언이 이뤄진다면, 북한의 가장 원대한 목표 인 미국과의 수교도 가능해질지 모 른다. 그러면 반대로 한미동맹의 약화나 주한미군에 대한 논란이 촉 발될 가능성도 있다.
물론 한미동맹이나 주한미군에 대한 이야기는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지만, 종전 선언으로 북한이 얻 는 건 한국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 니 똑같은 가치는 아니어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계 산이다.
"뭐, 꼭 북한으로부터 받지 않아 도 되죠. 우리가 알아서 챙기면 되 니까요."
"우리가 알아서 챙긴다고? 어떻 게 말이냐?"
"일단 개헌이 있죠."
개헌이라는 소리에 눈을 껌벅이 는 전명헌이었다. 완전 뜬금없이 들리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하지 만 종전 선언을 이유로 개헌을 추 진하는 건 아주 뜬금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종전 선언이란 곧 북한 을 독립된 국가로 인정한다는 이야 기고, 그러면 북한을 인정하지 않 는 현재의 헌법은 문제가 될 소지 가 있었다.
"그러면 통일은 영영 못하는 거아니냐?"
"아니죠, 오히려 북한의 경제 수 준이 우리와 비슷해질수록 통일의 가능성은 더 높아져요. 게다가 통 일비용도 상당히 줄일 수 있고요."
최악은 독일 식의 흡수 통일이 다.
서독이야 전 세계 최고의 공업 국가로 어마어마한 경제력을 바탕 으로 천문학적인 통일 비용을 감당 할 수 있었다. 반면에 한국은 서독 에 비해 경제력의 수준이 훨씬 떨 어진다. 심지어 북한의 경우엔 동 독보다 더 경제 상황이 나쁘다.
만약 유재원이 한국이 망하는 가 장 현실적인 시나리오를 쓴다면 IMF나 제2의 한국전쟁이 아니라 북한의 붕괴로 인한 갑작스런 통일 을 꼽을 것이다.
"북한은 북한대로 있으면서, 서 로 부족한 걸 채우는 것이 제일 좋 죠. 북한에 넘쳐나는 건 노동력과 자원이고, 우리는 기술과 자본이 있으니까요."
어떤 사람들은 통일이 되면 저렴 한 노동력도 쓰고, 자원도 개발할 줄 아는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 나라에 지역별로 최저임금을 따 로 지정할 수 없고, 거주의 자유도 침해할 수 없는 법이니 말이다.
그러니 차라리 헌법으로 북한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물론 언젠간 통일을 이뤄야 할 한민족이라고는 하는 것도 빼놓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 5년 단임인 대통령제를 4년 중임으로 바꾸고, 헌법에 남아 있는 유신의 찌꺼기도 완전히 빼서 21세기를 준비하면 딱 맞죠. 그러 면 위헌 논란이 있는 공수처법도 문제가 될 것이 없어지는 거고요."
"호오!"
유재원의 말에 전명헌이 본인의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종전 선언을 명분으로 헌법 개정 을 추진하면 여러 가지 이득을 챙 길 수 있다는 유재원의 말이 귀에 쏙 박힌 것이다.
"4년 중임제? 그럼 나도 한 번 더 할 수 있는 거냐?"
역시 전명헌도 정치인이 다됐다.
4년 중임제 소리에 본인이 한 번 더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바로 나 왔다.
"에이, 그건 좀 그렇죠. 차기 대 선부터 4년 중임제로 하는 게 국민 설득하기가 좋을걸요. 독재 경험이 생생한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
유재원의 말에 전명헌은 바로 수 긍했다.
"이야, 눈앞에서 봤으면서도 믿 지 못하겠구나. 이걸 순간적으로 떠올리다니 말이다."
그러면서 전명헌은 유재원을 칭 찬했다.
이에 유재원은 본인의 머리를 긁 으면서 민망해했다. 그도 그럴 것 이 개헌이란 21세기에 주요 정치 사안이었다. 여러 대통령이 개헌을 언급했고 실체 추진도 했지만, 좌 절도 잇따랐다. 그걸 이뤄낸 건 한 참의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였다.
덕분에 유재원이 종전선언이란 소리를 들었을 때 개헌을 떠올리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밀고 나사건 안 돼요. 개헌안을 만드는 것부터 일이고, 국회도 넘어야 하고, 국민 투표까지도 해야 하니까요. 근데 최대 고비는 국회일 거예요."
유재원이 봤을 때 가장 큰 난관 은 바로 국회였다.
현재는 통일국민당, 민주당 연정 을 통해 겨우 과반수를 유지하는 상태인데, 개헌안 통과는 국회의석2/3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21 세기에 있었던 수많은 개헌 시도들 이 번번이 좌절된 것도 국회 의석 2/3을 모을만한 정치 세력이 없었 던 탓이다.
"그건 걱정마라. 2/3 모으는 건 간단하니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명헌은 국회 의석 2/3을 모으는 것을 식은 죽 먹는 것처럼 쉽게 장담했다. 반면 개헌을 이제 막 생각한 유재원의 경우엔 아직 의석을 모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전명헌 할아버지가 대체 무슨 방 법을 떠올린 것인지 너무도 궁금했다.
"두 번 정도는 가능하다. 그러니 공수처에 한 번, 개헌에 한 번 정 도는 사용할 수 있다."
전명헌의 장담이 이어졌고, 유재 원은 입이 떡 벌어졌다.
공수처법에 대한 야당들의 반발 은 어마어마했다. 신경질적인 반응 을 넘어서 통과가 되면 마치 본인 들의 인생이 끝장나는 사람들 같았 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공수처법이 겨냥하는 1순위는 검찰이었고, 2순 위는 법원이었다. 두 기관이 이전까지 암묵적으로 봐주었던 관행이 라는 건 모두 기득권들을 위한 것 이었다. 당연히 그 기득권 안에는 국회의원들도 있었다.
공수처법은 그런 기득권을 뿌리 부터 뽑겠다는 이야기였으니, 무조 건 반대하는 게 요즘의 국회였다.
그나마 전명헌과 김대중 두 당수 의 카리스마로 국회의원들을 휘어 잡아 억지로라도 통과시킬 가능성 이 있었다.
개헌은 당연히 공수처법보다 더 힘든 사안이었다. 그렇기에 유재원 은 민심을 최대한 이용할 생각이었 다.
개헌안에 대해 찬성하지 않고, 통과시키지 않은 국회의원의 지역 구 사무실에 시민들이 쳐들어가 난 장판이 될 정도로 민심이 활활 끓 어오르게 만드는 것이다. 쉽지 않 은 일이지만, 개헌이 아무런 장애 없이 통과되는 일보다는 현실적이 다.
그런데 전명헌은 아무렇지도 않 게 문제없다는 듯 말했다.
"응? 너도 잘 아는 일인데?"
오히려 전명헌은 유재원이 놀라 워하니 그게 더 이상하다는 듯 고 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아는 일이라고요?"
유재원은 빠르게 머릴 굴렸다.
그렇지만 아무리 깊은 생각을 해 봐도 딱히 걸리는 게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한국에 큼지막한 목돈을 투자한 유재원은 한국의 정 치 상황도 보고 받고 있었다. 국회 의원들의 성향을 구분하는 건 예전 에 끝났고, 지역 현안부터 시시콜 콜한 스캔들까지도 정보팀을 통해 듣고 있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가상으로 표 대결을 해볼 수 있었고, 실제 결과 와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알려주세요."
"흠, 들으면 실망할 텐데?"
유재원의 말에 전명헌은 살짝 곤 란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자랑스 럽게 말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닌 모 양이다.
"괜찮아요.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게요."
"흠, 그렇다면 뭐 말해주마. 노태 우하고 김영삼을 이용하는 거지"
노태우? 김영삼?
두 전 대통령 이름에 유재원은 아직도 머릿속의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뭔가 감이 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 사면이요? 노 전 대통령의 사면을 가지고 민정계 사람들이랑 딜을 하려는 거죠?"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