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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440화 (440/1,007)
  • 22권 24화

    -자네니 말해주는 것이네만, 우 리는 신문에 난 것에 최소 10배는 된다고 보고 있네.

    어디서 깨 볶는 고소한 맛이 확 느껴졌다.

    한국을 마지막에 IMF라는 벼랑 끝으로 밀어 넣은 나라가 바로 일 본이었다. 한국에 들어왔던 일본의 자금을 한 방에 거둬가는 마진 콜 은 기본이었다. 심지어 미국과 같 은 나라에 채권 연장을 해주지 말 라고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실제로 외채 연장이 되지 않아서 가뜩이나 바닥난 외환보유고는 완 전 박살이 났다.

    이제는 상황이 서서히 반전되는 그림이었다. 한국은 바닥을 찍고 서서히 반등 중이라면, 일본은 빠 르게 추락 중이었다.

    브레이크를 잘 잡아서 연착륙에 성공할지도 모르지만, 유재원은 일 본이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돌려줄 작정이었다.

    -유 회장의 생각은 어떤가?

    "저희도 비슷해요. 근데 이런 손 실액보다 심각한 건 모럴 헤저드 죠."

    -후후, 그렇군. 그러면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일본에서 일을 시작할 때 손을 맞춰 보는 건 어떻겠 나?

    조지 소로스는 마치 본인이 호의 를 베풀어주는 것처럼 말했다.

    실상은 일본의 본격적인 위기가 시작되는 시점과 최적의 진입 타이 밍을 알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천 하의 조지 소로스도 이쯤 되면 유 재원이라는 존재가 규격 외의 사람 이라는 걸 인정했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그럼요. 혼자보단 같이 하는 게 편하겠네요."

    유재원도 나쁠 건 없었다.

    일본의 외환위기라는 사건은 전 에는 없었던 일이었다. 한국과 달 리 수천억 달러의 외환보유고를 자 랑하는 일본이니 말이다. 어쩌면 유재원의 공격이 실패로 끝날 가능 성도 있었다. 아니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높았다. 그렇기에 최대한 많은 우군을 만드는 건 바람직한 선택이었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군.

    그건 유재원도 마찬가지다.

    띵동?!

    조지 소로스와의 통화를 마칠 무 렵, 인터폰이 울렸다. 부모님이 도착하신 것이다. 오랜만에 어머니가 마법과 같은 솜씨로 차린 저녁을 먹은 유재원은 배부른 고양이처럼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유재원은 부모님의 배웅을 받으 며 스케줄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스케줄은 역시 전명헌 과 만남이 첫 번째고, 다음이 방북 이었다. 메인이벤트를 치르기 전에 간단히 처리해야 할 일이 몇 가지가 있었다.

    대호 건설과 대호 전자 등, 백호 펀드가 최근 경영권을 확보한 회사 에 가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말 해주고, 격려해주는 일정이었다.

    좀 낯부끄러운 일이긴 했다.

    유재원 스스로 생각하는 본인의 존재감과 대중이나 관계자들이 생 각하는 존재감의 간극이 상당했으 니 말이다. 본인은 사업가이지 엔 터테이너는 아니었다. 그런데 한국 에서는 웬만한 연예인보다 유재원 의 인기가 높았다.

    아무래도 ID 그룹 초기에 스타처럼 열심히 방송 활동을 했던 게, 이런 식으로 여파가 이어지는 것 같았다. 물론 얼마든지 그런 기대 에 부응할 수 있고, 그런 각오가 되어 있는 유재원이니 기쁘게 스케 줄을 시작했다.

    "오늘 들르실 곳은 인천의 대호 전자 공장입니다."

    ID 그룹 부회장이 된 최강욱이지 만, 이번에도 유재원의 옆자리에 앉아서 스케줄을 설명했다. 유재원 의 자동차 뒤쪽 자리 중 하나는 여 전히 최강욱의 지정석이었다. 덕분 에 김대석은 이번에도 조수석에 앉 았다.

    "대호 자동차는 아직도 지지부진 해요?"

    자동차에 대해 탈 것 이상의 의 미는 없는 유재원이지만, 비즈니스 적으로는 충분히 존재감이 있는 사 업체가 대호 자동차였다.

    자동차 산업은 그 규모가 거대해 지면서, 나중에는 전 세계적으로 5 개 제조사의 과점 시장이 되는 분 야였다. 가지고 있어 봐야 경쟁력 부족으로 애물단지가 되는 사업체 지만, 국가적으로 봤을 때 자동차 산업은 중공업의 꽃인 만큼 육성해 야 할 전략 분야였다.

    IT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효 과적이니 대호 자동차는 살리는 게 정답이다. 당장 인수할 회사가 없 으면 백호 펀드에서 가지고 있다가, 미래나 일성에게 매각하는 것도 유 재원이 고려하고 있는 방법이었다. 최악은 외국계 자동차 기업에게 넘 어가는 것인데 GM에게 가는 건 최악이었다.

    "경영진은 이미 정리가 되었습니 다. 그런데 노조가 문제입니다. 경 영 정상화를 하기 위해 특단의 대 책이 필요하다는 건 공감하지만, 그 방법이 대규모 구조조정이라는 것에 대해선 거부하고 있습니다.

    해고는 곧 살인이라더군요."

    해고는 살인이라.

    안타깝게도 유재원에겐 그다지 감흥이 없는 소리였다. 그는 해고 가 일상이었던 삶을 살았기 때문이 다. 아주 나중에 자기 회사를 차리 고 나서 상황이 좀 달라지긴 했는 데, 그전까지는 일자리를 잃으면 새로운 일자리를 찾으면 됐다. 물 론 그렇게 전전한 일자리들의 수준 이란 다 고만고만했다.

    "그러면 좀 더 기다려보죠."

    대호 자동차의 자력갱생은 불가 능했다. 부도가 나면서 자동차 판매는 뚝 끊어졌기에 이제 돈 들어 을 구석도 없다. 채권단은 대호 자 동차의 매각이 실패하면 공장 자체 를 뜯어서 팔 기세였다. 법원에서 내려준 부도유예 기간은 이제 점점 끝나고 있다. 시간이 누구를 편들 고 있는지 분명했고, 유재원은 그 점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이후 유재원은 인천 공단에서 제 일 큰 대호 전자 공장에 도착해 크 나큰 환대를 받았다. 그 자리에서 유재원은 공장 정상화를 비롯해 여 러 가지 비전들을 발표했다.

    DAP의 2회차 물량이나 물론 조 만간 나올 티파니폰의 터치 버전도 대호 전자를 통해 생산할 계획을 밝혔다. 이제껏 생산했던 물건들처 럼 대호의 로고가 부착되는 건 아 니고 ID 로고가 들어가는 OEM방 식이었다. 확실한 일감이 있다는 건 해고는 없다는 소리였기에, 반 응이 무척 좋았다. 여기에 유재원 은 대호 그룹 부도 이후로 제대로 지급되지 못한 밀린 월급도 한 방 에 지급하면서 화룡점정을 찍었다.

    그렇다고 일일이 종이봉투로 나 눠준 것은 아니고, 유재원의 방문 시점에 맞춰 직원들의 월급 통장에 자동이체 시켜줬다.

    김대석이나 최강욱은 월급봉투에 담아 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지 만, 유재원이 고개를 저었다. 명색 이 세계 최대의 IT 기업 오너인데 월급봉투는 영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람찬 스케줄을 마친 유 재원은 오후에 메인 스케줄을 시작 했다.

    전명헌 대통령의 초청에 의한 청 와대 방문이었다.

    청와대의 만찬은 유재원에게 매 우 불편한 자리였다.

    오랜만에 청와대에서 밥을 먹는 거라 조금은 기대했던 유재원이지 만,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 건지 모를 정도였다.

    옆자리에 있는 김대중 총리 때문 이었다. 구도를 보면 전명헌 대통 령과 김대중 총리 사이에 유재원이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나머지 자리를 국무위원들, 그러니까 내각 의 장관님들과 장관급 인사들이 나 머지 자리를 빙 두른 형태였다.

    자리 배치가 뭔가 굉장했다. 모 든 시선이 유재원에게로 쏠리는 형 태였다. 게다가 전명헌 할아버지는 무슨 말을 해놓은 것인지, 유재원 이 입을 열 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식사를 멈추고 유재원을 바라 봤다.

    그러면 묵묵히 밥만 먹으면 되는 데, 전명헌 대통령이나 김대중 총 리가 틈틈이 질문을 했다. 그나마 전명헌 할아버지는 평범한 질문이 었지만, 김대중 총리는 매우 곤란 한 질문을 했다.

    경제적인 이슈나, 정치적으로 논 란이 있는 사건에 대한 견해 등등. 딱히 답이 없고, 정치적 성향으로 해법에 차이가 나는 일에 대한 물 음이었다.

    물론 유재원은 어떤 질문이라도 얼버무리는 것 없이 본인의 의견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러면 유재원 이 답하는 것을 김대중 총리와 국무의원들이 경청하는 것이다.

    "에? 국민연금이요?"

    그러다가 갑자기 국민연금이 주 제가 되었다.

    사회적 안전망이 없다는 유재원 의 말에 전명헌 대통령은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고, 김대중 총 리가 국민연금의 전면 시행이라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한국의 국민연금의 역사는 제법 길다.

    이는 1973년 국민복지연금법을 제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사실 이때 에 연금이란 복지보다는 자금 동원이라는 경제적 기능에 무게추가 맞 춰져 있었다. 국민들의 돈을 모아 서 자본을 만들고 이를 통해 산업 시설을 일구고, 여기서 나오는 수 익으로 연금을 준다는 설계였다.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인플레이션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은행의 금융 상품에 투자해도 실질 적으로 돈이 줄어드는 것인데, 산 업 시설이라면 보다 큰 부가가치 생산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앞지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제법 괜찮은 설계였던 국민복지 연금법이지만, 유신으로 인해 효력 이 1년간 정지되었고, 이후엔 오일쇼크가 오면서 시행은 무기한 연기 되었다.

    그러다가 1986년에 국민복지연 금법에서 '복지'가 빠진 국민연금법 이 만들어졌고, 1988년부터 시행이 되고 있는 상태다.

    소득 파악이 용이한 근로자를 대 상으로 하고, 연금의 급여는 가입 기간에 비례하는 정액 연금과 소득 에 비례하는 소득 비례 연금이 혼 합된 형태였다.

    전생의 경우, 쭉 이런 상태로 있 다가 김대중 대통령 대에 이르러 전면 시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 러 가지 사회의 명과 암을 보여주면서 문제를 만들었다.

    당연히 유재원은 이것에 대해 부 정적인 사람이었다.

    직장인이 되고부터 열심히 국민 연금을 냈지만, 쓸쓸히 죽음을 맞 이할 때까지도 돈 한 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국민연금의 고갈이 설계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 던 탓이다. 그래서 그 날짜를 조금 이나마 뒤로 미뤄보고자 여러 가지 방법들이 나왔다.

    어려운 말로는 소득대체율, 쉽게 말해서 매월 입금되는 돈인데 이를 줄인다거나,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는 나이를 늘린다는 식이다. 낸돈에 비해 받을 수 있는 액수도 줄 어들었고, 심지어 신청할 수 있는 나이도 점점 멀어졌다.

    국민연금 초안이었으면 죽기 몇 년 전부터 연금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면 유재원이 회귀를 하는 날도 훨씬 느려졌을 것이고, 그만큼 뛰 어난 미래 기술을 가져왔을 터였다. 그렇지만 유재원은 그 연금은 단 1 원도 구경하지 못하고 죽었다.

    차라리 연금 낼 돈을 그냥 저축 하거나, 대기업 주식이나 샀으면 훨씬 나았을 거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그런 유재원에게 김대중 총리는 국민연금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안타까운 일은, 그렇게 설명한 국 민연금의 구조가 전생의 그것과 똑 같았다는 점이었다.

    "음, 문제가 좀 있어 보이네요."

    덕분에 유재원은 초면에 대단히 실례였지만, 반론을 즉각 시작했다.

    "그렇습니까?"

    김대중 총리도 토론에 있어 일가 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본 인만의 경제지론을 완성했고, 그걸 책으로 써서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렇기에 유재원의 반론은 예상하 지 못했지만, 귀를 열고 경청했다.

    유재원은 조목조목 문제를 제기 했다. 21세기 청년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그런 문제점들이었다. 김대중 총리는 유재원의 팩트 폭행 에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경청했다. 그 대신 허둥거리는 사람은 경제 부총리 였다.

    전명헌 대통령의 사회 안전망 강 화의 지시를 받은 김대중 총리가 국민연금의 확대라는 구체적 아이 디어를 냈고, 이것을 가지고 전면 시행이라는 개정안을 만든 사람이 었다. 유재원이 지적하는 문제점에 알고는 있었고, 일부러 숨긴 면도 있었다. 그런데 국민연금 구조에 대해 처음 듣는 자리에서 카운터를 치고 들어오니 깜짝 놀랄 수밖에.

    "국민연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전면 시행이니 소득 대체율이니 하 는 게 아니라 인구 정책이에요. 이 구상을 보면 우리나라 인구가 계속 증가할 거라고 되어 있는데, 제가 보기엔 21세기 되고나서 급격히 감 소할 거 같거든요."

    6, 70년대엔 집마다 아이를 너무 많이 나아서 문제였다. 셋은 기본 이고 여섯 남매니 일곱 남매니 하 는 집안도 많았다. 그래서 강력한 산아 제한 정책을 폈고, 성공적이 란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산아 제한 정책은 애초 에 필요 없는 삽질이었다.

    "그건 너무 지나친 비약 같습니 다만."

    경제 부총리가 겨우 반론을 편다 는 게 비약이라는 소리였다.

    "비약인지 아닌지는 올해 나오는 출산율을 보면 아실 거예요. 매우 급격히 줄어들 테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꺾인 추세는 회복하기도 쉽 지 않아요."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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