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439화 (439/1,007)

22권 23화

"8시간 근무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첫 번째 질문의 임팩트가 너무도 컸던 것일까. 이후부터는 좀 심심 해졌다.

"확실히 급진적입니다. 하지만 정착이 되고나면 분명 긍정적인 변 화가 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하 루 24시간 중에 수면을 위해 8시 간, 일을 위해 8시간, 자신이나 가 족들을 위해 8시간씩 쓰는 게 최고 의 분배 밸런스라고 생각하니까요."

두 번째 질문인 8시간 근로제 역 시 한국 사회에서 큰 이슈였지만, 아무래도 몰입도가 크게 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재원은 성심 성의껏 답해줬고, 나머지 질문도 받은 후 공항을 떠났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날 저녁, 공중파 메인 뉴스를 장식한 기사는 일성 그룹 이야기였다. 소문에는 최현희 회장의 자택에서 뉴스가 나 올 때, 뭔가 크게 깨지는 소리가 났다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사실인 지는 아무도 모른다.

특히 일성 그룹의 최현희 회장은 대호 그룹의 해체가 결정되고 나서 부터는 본사에도 잘 나타나지 않았 으니 말이다.

기자회견을 마친 유재원은 본인 의 집에 도착했다.

서울 땅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 리한 ID 글로벌헤드쿼터 빌딩의 펜 트하우스였다. 높이로만 따지면 남 산타워가 좀 더 높긴 했는데, 거기 에는 사람이 사는 집은 없었다.

"아직 변한 건 없네."

북쪽 거실에 온 유재원은 석양과 함께 어우러지고 있는 한강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직 21세기의 이미지 가 남아 있는 유재원에게는 아파트 단지로 벽이 세워지지 않은 한강은 낯선 모습이었다.

"네, 회장님. 그런데 몇 년 후면 좀 많이 달라질 겁니다. 한강변을 따라서 아파트 신축 허가가 대거 나왔거든요."

"그래요?"

"네! 건설경기를 부양한다고 그 동안 막았던 개발을 막 풀고 있습 니다."

유재원의 말을 황재홍 사장이 받 았다.

공항에서부터 함께한 황재홍은 유재원의 펜트하우스까지도 함께했 다.

유재원이 미국에 있을 때, 펜트 하우스의 관리는 황재홍의 몫이었 던 탓이다. 물론 황재홍이 바닥을 쓸고 먼지를 닦는 일은 직접 하진 않는다. 그런 일은 글로벌헤드쿼터 의 유지 보수를 맡은 관리 사무소 에서 직접 수행하니 말이다. 대신 관리 책임자로서 책임이 있기에 직 접 안내를 해주는 것이다.

"저녁은 어떻게 드시겠습니까?"

"아, 부모님이 올라오시기로 했어요. 여기서 먹을지, 외식을 할지 는 모르겠지만요. 황재홍 사장님도 이제 퇴근하세요."

살뜰하게 유재원의 저녁도 챙기 는 황재홍이었다.

황재홍은 괜찮다고 했지만, 유재 원의 부모님이 오셔서 직접 챙길 거라는 소리에 결국 인사를 하고 물러나려고 했다.

"잠깐만요!"

돌아가는 황재홍을 유재원이 다 시 잡아 세웠다. 그리고는 미국에 서 들고 왔던 여행용 가방을 열어 뭔가를 찾았다.

"이거 받으세요."

유재원이 여행용 가방에서 찾아 황재홍에게 준 건 예쁜 포장지로 쌓인 선물 상자였다.

"이게 뭔가요?"

"광희 선물이에요."

광희는 황재홍의 늦둥이 아들의 이름이었다. 엠마 생일이 얼마 전 이이라서 선물을 사러 갔다가 광희 생각도 나서 같이 샀다. 내용물은 볼트론이라고 일본산 로봇물에 등 장하는 로보트였다. 미국서 선풍적 인 인기를 끌었고 덕분에 완구도 퀄리티 좋은 것들이 많이 나왔다.

유재원이 고른 건 그중에서도 제일 좋은 것이었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광희가 너 무 좋아하겠네요."

황재홍은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진심으로 고마워하면서 그것을 품 에 안았다. 그렇게 황재홍을 배웅 한 유재원은 다시 서재로 와서 책 상 앞에 앉았다.

"음, 컴퓨터 좀 잠깐 할까?"

컴퓨터를 켜고 나서 유재원은 곧 장 웹브라우저를 열진 않았다. 개 인용 컴퓨터지만, 혹시나 모를 스 파이웨어 같은 게 설치되어 있지 않은가 검사부터 시작했다.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확인하고서야 웹브 라우저를 열었다.

당연히 제일 먼저 보는 건 넥스 트컴의 뉴스 페이지였다.

접속하자마자 1면에 큼지막하게 본인이 입국장에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 밑에 있는 기사들도 기 자회견장에서 했던 내용이었다. 그 렇기에 직접 클릭해서 내용까지 확 인하진 않았다. 기자들의 소속만 봐도 논조가 딱 보이니 말이다.

대신 유재원이 클릭한 곳은 넥스 트컴 일본의 뉴스 페이지였다.

일본어가 가득 나왔지만, 유재원 이 이를 읽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일본, 야마모토 증권사 창립 반 세기만에 파산.

-노무라 증권, 나스닥 붕괴로 큰 손실 발생.

현재 일본을 강타하는 사건은 일 본 증권 회사의 파산과 대규모 손 실이었다. 나스닥에 큰돈을 투자했 는데, 갑작스러운 붕괴로 어마어마 한 손실이 일어났고, 그걸 감당하 지 못한 증권사는 파산했다.

노무라 증권처럼 전통과 규모가 있는 회사들은 버티고 있었지만, 그 손실액이 천문학적이라는 급보 였다.

"슬슬 일본도 타이밍이 보이네."

한국 외환위기의 발생 원인 중 하나인 일본도 절대 그냥 두지 않 겠다고 했던 유재원이었다. 그 말 을 실천할 때가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는 걸 일본의 뉴스를 통해 확 실히 인지할 수 있었다.

일본은 경제 대국이다.

이 명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러 니 경제력에 비하면 증권사 하나가 파산하고, 하나가 큰 손실을 봤다는 걸로 일본 전체가 경제 위기를 맞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었 다.

당장 지금 유재원이 보는 기사의 논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사의 요지는 두 증권사 말고도 일본의 여러 증권사가 나스닥에 투 자했다가 손실을 많이 봤다는 팩트 를 가지고 미국에 대한 투자는 이 제 그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식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유재원은 여기에서 일본 의 경제 대국이란 공든 탑에 균열 이 가는 걸 감지했다. 사실 경제 대국이라는 말에도 어폐가 좀 있었다. 경제 대국이라고 하면 나라에 돈이 많다는 말이고, 그만큼 그 나 라의 국민도 부유하다는 이야기다. 헌데 일본은 나라에 돈이 많은 건 사실인데 국민은 그렇지 않았다.

PPP라는 구매력 평가를 보면 일 본은 GDP 대비해서 그 값이 매우 차이가 나는 나라였다. 게다가 저 축률은 이례적이라 할 만큼 높았다. 제로 금리로 엔케리트레이드를 장 기간 할 수 있는 저력도 여기에 있 었다.

물론 제로 금리라는 건 돈을 맡 긴 사람들에게 예금 이자가 없다는 말이고, 돈을 빌리는 사람들에겐 대출 이자를 받는다는 말이다. 대 신 그 대출 이자도 다른 나라에 비 할 수 없을 만큼 저렴하다.

싼값에 돈을 빌릴 수 있으니, 도 덕적 해이가 따라올 수밖에 없다.

이번 증권사의 투자 실패는 그런 도덕적 해이의 아주 일부만 보여주 는 사건이었다.

"음, 빈센트 사장님으로부터는 연락은 없네."

갑자기 유재원이 빈센트 그린힐 을 떠올린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 의 엔케리트레이드의 규모 그리고 투자된 상품에 대해서 몇 년 전부 터 빈센트 사장이 자세히 추적 중 이었기 때문이다. 빈센트 사장도 분명히 이 기사를 보았을 텐데, 아 직 연락이 없었다.

아무래도 매우 보수적 투자 성향 인 빈센트 그린힐에게는 이 정도 타격으로는 일본 경제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 양이다.

따르릉!

"역시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오는 건가?"

타이밍 좋게 들려오는 벨 소리에 유재원은 빈센트 그린힐을 떠올렸다. 하지만 빈센트 사장님이었다면, 지정해놓은 벨 소리가 달랐을 거라 는 생각이 바로 떠오르면서, 유재 원은 주머니 안에서 전화를 꺼내 들었다.

티파니폰의 LCD에는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띄워져 있었다. 퀀텀 펀드의 조지 소로스였다.

"여보세요?"

-유 회장, 나 소로스요. 그동안 잘 지내고 계셨소?

"아, 소로스 씨. 덕분에 잘 지내 고 있어요."

-허허, 역시. 그나저나 신문을

보니 역시나 위명이 쟁쟁하더군. 백호 펀드 창설도 축하하오. 그만 한 펀드를 단번에 만드는 건 유 회 장이 아니면 아무나 못 할 일일 거 요.

"소로스 씨도 만만치 않던데요. 벌써 수십억 벌었다는 소리가 들려 요."

조지 소로스와의 통화는 시작이 평범했다.

안부를 물어보고, 서로의 성과에 대해 칭찬을 해주는 의례적인 수순 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소로스와의 통화가 예전에 있긴 있었다고 해도, 이후로 뭔가 친분을 다진 건 아니 었던 탓이다. 한국의 위기를 일찍 감지한 것에 대해 약간의 공감대가 있기 했지만, 그뿐이었다.

유재원은 유재원대로 한국 외환 위기에 대해 대응했고, 조지 소로 스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한국의 위기에서 기회를 찾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의 외 환위기에서 조지 소로스는 유재원 의 말처럼 상당한 이득을 봤다는 점이다.

-궁금한 게 있어 전화했소. 혹시 바쁩니까?

"아뇨, 전혀요. 게다가 소로스 씨 의 전화라면 바쁘더라도 받아야죠."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다름 이 아니라 일본에 대한 유 회장의 관점은 아직도 그대로입니까?

와!

설마 하던 유재원은 조지 소로스 가 일본을 언급하자 탄성이 절로 났다. 그나마 마음으로만 내서 조 지 소로스에게 힌트를 주진 않을 수 있었다.

유재원은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동아시아 외환위기의 끝은 일본 이 될 거라고 했던 유재원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고, 지금 다시 그걸 언급한다는 것은 조지 소로스 도 일본의 현재 경제 상황을 부정 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 한 증거였으니 말이다.

"네, 전보다 나빠졌으면 나빠졌 지, 전혀 호전되지도 않았어요."

-역시 그렇군.

유재원의 말에 조지 소로스는 짧 게 반응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전 처럼 곧장 부정하지 않았다는 건, 유재원의 심증을 한층 더 굳어지게 해주는 반응이었다.

-혹시 일본 투자 회사들이 나스닥 고점에 대거 입성한 걸 알고 폭 락을 유도한 거요?

응? 이게 무슨 소리야?

유재원은 순간적으로 두뇌 회전 이 비상해졌다.

ID 인베스트먼트가 나스닥에서 투자를 청산한 건 순전히 유재원의 빠른 타이밍이었다. 원래 역사적 고점은 2001년에나 찾아오니 말이 다. 유재원의 판단은 IT 기술의 발 전이 본인으로 인해 몇 년 앞당겨 졌고, 그로 인해 고점도 일찍 찾아 올 거라는 생각이었고, 동시에 한 국 외환위기에 개입할 타이밍을 잡 으려고 청산 시점이 결정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모르는 조지 소로 스는 오히려 역으로 생각한 모양이 일본 투자 회사들이 좀 늦게 나 스닥에 들어오니, 유재원이 대량 매도를 통해 나스닥의 폭락을 유도 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실제 유재 원은 타임지를 비롯한 언론과의 인 터뷰 때마다 나스닥에 대한 투자를 접고 한국에 투자하라고 열심히 이 야기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설마 그게 진짜 말이 된다고 생 각하세요?"

당연히 일본의 피해는 유재원도 얻어걸린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스닥의 규모는 세계 최고였다. IT 거품 덕이지만 지금도 뉴욕 증권 거래소(NYSE)를 추월한 상태였다. 거기에서 유재원 이 가지고 있던 몇 백억 달러치 주 식이 빠져 봤자 그다지 타격도 가 지 않는다.

그러면 유재원이 빠져나가고 나 스닥이 폭락하기 시작했다는 이야 기가 의미하는 건 간단했다.

이제 슬슬 수익 실현을 하는 사 람들이 많아졌다는 것, IT 기업들 의 옥석 가리기가 시작됐다는 것이 다. 그러면서 너도나도 보유 주식을 팔기 시작했고, 그걸로 낙폭이 확대되었다. 그러면서 투매가 시작 되고 폭락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생각보다 일본의 피해가 큰 모 양이죠?"

-후후, 자네도 다 알면서 왜 물 어보나?

"그래도 좀 알려주세요. 제가 아 는 거랑 비교 좀 해보게요."

유재원의 말에 조지 소로스는 약 간 생각에 잠기는 듯 말이 없었다. 다시 말이 들려온 건 침묵이 20여 초 정도 지속된 후였다.

회귀로 압도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