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432화 (432/1,007)
  • 22권 16화

    드디어 본론이었다.

    전명헌은 단지 대호에 대해 서릿 발과 같은 처분을 하겠다고 이 자 리에 선 게 아니었다. 본론은 바로 경제사범에 대한 형법 강화를 노리 는 것이었다.

    "넥스트컴의 대통령과의 대화 페 이지에는 청원 게시판도 있습니다. 청원 게시판에서 높은 추천을 받으 면 저에게 그 내용이 직접 보고되 는 게시판입니다. 그 게시판에 올 라오는 가장 많은 청원이 뭔지 아 십니까? 바로 사기꾼을 처벌해 달 라는 것들입니다. 물론 그 사기라 는 건 모두 돈을 노린 사기였지요."

    현재의 대한민국은 사기 공화국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광범위하 게 사기 범죄가 발생하고 있었다. 대기업은 대호 그룹과 같은 대규모 분식회계를 저지르고, 중소기업들은 부도 어음으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심지어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곗돈 을 가지고 야반도주를 한다든가, 돈을 빌리고 잠적을 해버린다.

    "이에 대한 근본 원인은 바로 신 용의 붕괴에 있습니다."

    높은 신용이 담보되어 있어야 올 바른 자본주의가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IMF로 인해 국가마 저도 신용이 붕괴된 상태였다. 이 런 상황에서 국민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선택했고 사기가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신용이 붕괴된 걸 다시 회복하 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 다. 하지만 이보다 선행되어야 하 는 건 바로 사기에 대한 확실한 처 벌입니다."

    원고를 읽는 전명헌에게 유재원 이 떠올랐다.

    유재원은 국가신용 회복의 전제 가 경제사범 처벌의 강화라고 목소 리를 높였다. 수천억 원을 해먹어도 2, 3년 살고 나오면 끝이라는 소리에 전명헌도 슬쩍 양심이 켕기 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미래 그룹이라고 해서 비자금에 서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실제로 수백억 원 정도 비자금을 만든 게 발각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처벌 은 유재원의 말처럼 가벼웠다. 1심 에선 징역형이 나왔지만 3심에서는 집행유예 정도로 끝난 게 대부분이 었다.

    기업인이었던 시절엔 매우 좋았 다. 그런데 지금 한국이라는 거대 한 배를 이끌고 있는 선장이 되어 보니, 입장이 180도 달라졌다.

    눈이 가는 곳마다 사기꾼들이 득 실거 렸다.

    나라에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서로 해먹는 사기꾼들이 너무 많아 서 엉망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공 감이 되는 말은 따로 있었다.

    "한국은 민주주의 그리고 자본주 의의 나라입니다. 평생을 모은 돈 을 잃는다는 건 곧 인생을 송두리 째 강탈당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회안전망이라는 말 자체가 없 는 지금의 한국이었다.

    가정 경제가 파탄이 나서 길거리 에 나앉게 되면 그 누구도 신경을 써주지 않는다. 그래서 해고에 대 한 공포가 어마어마하게 컸고, 이 를 기가 막히게 이용하는 게 언론 들이었다. 전명헌 정부가 강공으로 나가려고 할 때마다 제동을 걸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한 상황이 사기 피해를 보는 것이었다.

    단적으로 어느 한 낙농업을 하는 마을에서는 계주 하나가 야반도주 를 해버렸다. 그 피해액이 20억 원 에 달할 정도라고 한다. 피해를 본 사람은 물론 그 가족들까지도 후폭 풍을 거의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

    설사 사기꾼을 잡았다고 해도 문 제였다. 수백억 원을 해먹어도 재산을 어디론가 빼돌리고, 2, 3년 징 역이면 끝이었다. 실질적인 피해자 들의 구제는 불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 범죄는 중범죄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살 인죄보다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살인은 개인 차원으로 마무리 되는 경우도 있지만, 사기 범죄의 피해 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대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악순환을 원천 적으로 차단 위해 경제사범에 대한 엄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 렸고, 청와대와 당의 의견도 일치 했습니다."

    곧이어 전명헌은 형법 개정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띄웠다.

    "이것은 통일국민당과 민주당의 의원님들이 함께 뜻을 모아서 만든 형법 개정안이고, 저도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파격적이 었다.

    초범이라도 집행유예를 따박따박 내려줬던 과거는 이제 없다.

    피해 금액이 거대하면 바로 중형 이었다. 더욱이 현재의 형법에는 항목에 따라 상한선이 있었다면, 여당의 안은 그 반대였다. 사기 금 액에 따라 하한선 설정했다.

    집행유예를 내릴 수 있는 것은

    피해 금액이 1억 원 이하에서만 가 능했다. 1억 원이 넘는 피해라면 무조건 징역형이다.

    또한 5억이면 5년, 10억 이상이 면 7년 이상이었고, 피해 액수가 수백억 이상이면 무기 징역에, 감 형도 없다는 걸 못 박았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피해 금액 환수에도 적극적으로 임하기로 했는데, 사기 범죄자의 가족까지도 환수 범위에 확대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번 에 개정될 법안에는 사기 범죄자 가족들이 보유한 재산의 증식 과정 에 대해 해명을 하지 못할 경우, 은닉된 피해 금액으로 보고 환수를 추진한다는 강력한 조항이 담겨 있 었다.

    이러한 조항대로라면 대호 그룹 의 김오중 회장은 물론, 분식회계 와 사기 대출을 수행했던 이들은 죽을 때까지 감옥서 나오지 못한다. 다른 재벌들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해왔던 온갖 불법적이고 탈법적인 전횡도 강력한 처벌로 멈춰 세울 수 있다. 부하를 방패막이 삼아 보 는 것도 한계가 있지 억 단위를 좀 넘기면 바로 징역형이니 말이다.

    물론 법원이 문제였는데, 법률을 잘 만들어도 판사들이 법봉을 엉망으로 휘두르면 말짱 도루묵이었으 니 말이다.

    "대호 그룹과 같은 기형적인 기 업이 다신 나타나지 않도록. 그리 고 선량한 서민들이 경제 범죄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 고심 끝에 내 린 결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 태를 촉발한 대호 그룹의 사주와 그의 일가에 대해서도 법과 원칙에 따라 그 책임을 확실히 따지겠습니 다."

    발표를 마친 전명헌은 카메라를 향해 인사를 꾸뻑 하고는 퇴장했다. 질의응답은 없었지만, 워낙 충격적 인 발표였기에, 기자들은 앞다퉈보도자료와 기사를 송고하는 데 정 신이 없었다.

    전명헌의 발표에 대해 가장 빠른 반응을 보이는 세력은 당연히 텔레 비전 앞에 앉아 있던 국민들이었다.

    대호 그룹을 해체하느냐, 존치하 느냐를 두고 여론이 갈렸던 국민들 은 전명헌의 발표 이후 해체 쪽으 로 빠르게 집결했다.

    대호를 살려야 한다는 일부의 세 력과 대호 그룹을 시범케이스로 해 서 한국 사회에 법과 원칙을 세우 겠다고 한 전명헌. 누가 더 국민을 생각하는지 사람들은 쉽게 알아보 았다.

    "우리 전명헌 할아버지, 정말 대 단하시네."

    텔레비전 발표에 유재원은 혀를 내둘렀다.

    전명헌을 곁에서 부추긴 건 유재 원이었는데, 이렇게나 잘 수행하실 줄은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

    유재원의 설득 방법은 의외로 간 단했다.

    먼저 청와대에 갔던 사람들은 항상 비극적으로 끝이 났다는 걸 언 급했다. 당장 전임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만 봐도, 초반엔 잘나갔 지만 IMF로 인해 모든 업적이 물 거품이 되었다. 김영삼 이전의 대 통령들은 더 심했다.

    최규하 전 대통령을 제외한 나머 지 사람들은 쫓겨 나거나, 암살당 했거나, 형장의 이슬이 되었고, 감 옥에 가 있었다. 최규하 전 대통령 도 쿠데타를 당해서 임기를 다 채 우진 못했다.

    그야말로 불행한 대통령의 행진 이다.

    유재원은 성공한 대통령이 되고 싶다면 국민만 보고 전진하라고 했 다. 그러면서 마스터플랜에 있던 계획들을 일부 문서화해서 전명헌 에게 보내주었고, 이를 받아 본 전 명헌과 무수한 통화를 하면서 오늘 에 이르게 되었다.

    동시에 취임 초부터 언론과 강하 게 충돌하는 것도 사실 유재원의 생각이었다. 한국의 언론이 엉망이 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고, IMF 의 책임도 있다고 봤지만 이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도 있다. 전명헌 이 좋은 의지로 국정을 운영하더라 도, 중간에 전명헌의 이름을 빌려자기 이익을 채우려는 놈이 분명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언론과 사이가 좋으면 그런 자들 은 자연스럽게 비호를 받게 되는데, 이렇게 언론과 대판 싸운 상태라면, 독이 바싹 오른 언론이 먼저 물고 늘어질 테니 말이다.

    이번에 발표된 경제사범에 대한 형량 강화는 이러한 기조에서 나온 전명헌식 특단의 대책이었고, 유재 원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자잘한 송사리부터 재벌들까지 예외 없이 적용된다면, 21세기 이 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는 시장권력을 제어할 강력한 수단이 되어 줄 것으로 기대했다.

    통일국민당, 민주당 연정으로 국 회의 과반을 획득하고 있으니, 경 제사범에 대한 형량을 강화하는 건 문제 없이 통과될 것으로 기대했다.

    보수 세력이 결집한 신한국당은 당내 내홍으로 전명헌이 추진하는 개혁 작업을 저지할 동력을 잃은 상태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세력과 전두 환, 노태우 때에 만들어진 민정당 세력이 치열하게 당권을 다투고 있 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5개 월이나 지났는데도, 당 대표를 선 출하지 못할 정도로 혼란이 심했다.

    민정당 세력은 그들의 구심점이 었던 전두환을 사형시킨 김영삼 대 통령을 절대 용서할 수가 없었고, 김영삼 대통령이 심어놓았던 세력 도 살아남기 위해서 민정당을 밟아 야 했다. 그야말로 정치판 배틀로 얄이 었다.

    다만 결과는 시시할 것이다. 정 권을 재창출하지 못한 정당의 의원 들끼리 아웅다웅해봐야 거기서 거 기다. 결국, 갈라서는 수순이 될 거 라고 본다.

    "그러면 김영삼 전 대통령 쪽이 한나라당이 되는 거고, 민정당 세 력은 자민련 쪽이랑 합치려나?"

    보수 세력이 분열될수록 유재원 의 입장에선 좋은 일이었다.

    전명헌을 아이콘 삼아 진행하는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에 브레이크 를 걸 사람들이 줄어드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유재원은 넥스트컴의 뉴 스페이지를 한참이나 보다가 웹브 라우저를 종료했다. 대신 새로 띄 워진 프로그램은 최근 시험 가동 중인 ID 그룹 통합 업무처리 시스 템이었다. 일명 ERP 프로그램이다.

    전자 문서 결제는 기본이고, 그 룹 전체의 업무 처리 상황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계열사들을 초월해 모든 자료나 서 류를 보려면 슈퍼 관리자 계정이 있어야 하고, 이는 유재원을 비롯 해 소수의 사람에게만 발급되었다.

    참고로 유재원이 ERP프로그램을 자체 개발한다고 하니 SAP라는 회 사에서는 난리가 났다. ERP 시장 에서 줄곧 한 우물을 팠던 회사가 SAP 사였는데, 소프트웨어 업계의 초거대 공룡인 ID 그룹이 자기네 앞마당에 진출하는 줄 알고 잔뜩 경계한 것이다.

    오해였다.

    유재원은 이번에 만들어진 ERP

    시스템은 ID 그룹 안에서만 쓸 생 각이었고, 다른 회사에는 팔 마음 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만들어지고 있는 ID 그룹 전용 ERP에는 특별한 비밀이 있었기 때 문이다.

    바로 인공지능과의 결합이었다.

    데이터 센터를 만들자마자 유재 원은 자연어 처리를 위한 기계 학 습부터 시작했다. 최근에는 이미지 분석 모듈을 만들고 있었다. 조만 간 자연어 처리 시스템과 이미지 분석 모듈이 결합되는데, 이것만으 로도 시너지 효과가 굉장하다. 사 람으로 치면 언어 능력이 시각과 결합하는 것이니 말이다.

    이 상태만으로 이미지 파일로 검 색을 할 수도 있고, 특정 키워드로 원하는 이미지를 찾을 수도 있다. 이미지 분석 성능이 더욱 고도화된 다면 길거리 CCTV의 영상에서 원 하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도 가능하 다.

    이렇게 하나둘 완성되는 모듈이 모여서 최종적으로 인공지능이 완 성되면, 이를 통해 회사 업무를 돕 는 것은 물론, 이를 넘어 회사의 운영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 만 이는 너무 먼 미래의 일이었기 에, 유재원은 상념을 접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했다.

    "자, 그러면 쇼핑을 시작해볼 까'?"

    유재원은 한국의 최강욱 부회장 이 보고한 리스트를 펼쳐봤다.

    백호 펀드의 실무자들은 ID 인베 스트먼트의 엘리트들이지만, 실무 책임자는 바로 최강욱이었다. 덕분 에 최강욱을 찾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았고, 최강욱은 매일 같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는 중이었다.

    본인에게 맡겨진 일도 일이었지 만, 한국인으로서 IMF 극복을 위한 사명감이 있었기에 혹사라고 할 만큼 강행군을 이어가고 있었다.

    최강욱이 보낸 리스트도 예전 황 재홍이 엄선했던 리스트들과는 차 원이 달랐다.

    요즘 한국에서 최대 이슈인 대호 그룹부터 일성전자는 물론, 미래 전자까지. 대기업의 주력 계열사들 이 가득했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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