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권 12화
"OK, PASS."
영식이는 패스라는 소리에 조금 놀랐다.
미국 입국 심사에 대한 악명은 귀가 따갑게 들어 알고 있었다. 영 어 공부만큼은 그간 쉬지 않았는데, 긴장이 절로 되어 손에 땀이 날 정 도였다. 그렇게 귀를 크게 열고 입 국심사대의 직원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 더듬더듬 대답하고, 준비한 서류를 내니 바로 패스라는 소리가 나왔다.
서류라는 건 바로 스탠포드 대학 교 합격증이었다. 그걸 본 심사대직원은 축하한다는 말까지 해줬다.
스탠포드라는 이렇게나 확실한 정답을 두고 방황했던 그 나날이 부끄럽고 후회가 되는 영식이었다.
그렇게 입국 심사대를 통과한 영 식이는 그제야 긴장이 좀 풀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한국과는 다른 느낌의 공기가 느껴졌다. 뭔가 인 공적으로 좋은 향기를 내려다가 실 패해서 애매한 냄새가 나는 듯한 느낌.
이게 미국 냄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영식아!"
그때, 미국 공항에서 본인의 이 름을 정확하게 부르는 소리가 났다. 완벽한 한국식 억양이었다.
"여기야, 여기!"
고개를 빠르게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보자, 너무도 익숙하고, 너무 도 유명한 존재가 본인을 향해 반 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렸을 때는 막연한 동경의 대상 이었다. 막 사춘기가 찾아 왔을 때,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다가와 거대 한 좌절과 열등감을 안겨주기도 했 다. 처음엔 본인의 감정에 대해 솔 직하지 못해 너무 당황해 어쩔 줄몰랐다.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해버 린 지금은 어린 시절과 같이 변함 없는 우정을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 운 그런 친구, 유재원이었다.
영식이가 타고 오는 비행기의 도 착 시각에 맞춰 공항으로 가고 있 는 유재원은 차 안에서 잠시 옛 생 각에 잠겼다.
물론 주제는 지금 만나러 가는 영식이에 관한 추억이었다.
국민학교 때부터 조금 말이 없었 던 영식이었다. 그런 영식이에게서 우연히 컴퓨터에 대한 재능을 발견 했고, 유재원은 물심양면으로 도움 을 주었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 서는 공부에 대한 잠재력도 트여서 학교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렇게 잘되는가 싶더니 고등학 교에 가서는 살짝 문제가 생겼다. 늦은 사춘기가 찾아온 모양인지 방 황을 시작한 것이다.
잠깐 하고 마는 게 아니라, 대입 일정에 지장이 크게 있었다.
영식이는 유재원의 뒤를 따라 스탠포드 입학을 계획했는데, SAT 시험을 완전히 죽을 쑨 덕에 1년을 손해봤다. 한 번 망치면 내년을 기 약해야 하는 수능과 달리 SAT는 연중에 7번이나 볼 수 있었는데도 망했다.
그나마 작년 마지막에 본 SAT가 스탠포드의 커트라인을 겨우 넘기 면서 스탠포드 입학 허가서를 받을 수 있었다.
영식이를 매우 높이 샀던 유재원 은 이 이야기를 보고 받았을 때 깜 짝 놀랐다. 얼마나 놀랐으면 정보 팀을 풀어서 이유를 알아보려고 했 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럴 필요까지 없었다. 주민이 같은 주변 친구 들은 영식이의 사춘기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딱 하나 본인 때문이었 다.
"내가 좀 잘났어야지."
갑자기 유재원이 왕자병에 걸린 건 아니었다.
유재원은 매우 객관적인 시선으 로 본인의 존재감이나 현재의 성과 에 대해 매우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게 객관적인 시선을 갖고 있어야만 마스터플랜이라는 장구한 계획을 착실하게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이 이룩한 성과는 전에도 없 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자부 한다. 그러나 유재원의 성과라는 건 천재성이 발휘된 게 아니라, 전 생의 경험이라는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비밀을 통해 달성한 성과였다.
영식이는 이러한 유재원을 따라 하려고 했으니 탈이 날 수밖에 없 었다. 만에 하나 영식이가 진짜 천 재라서 그게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아 있었다.
바로 삼각관계라는 거다.
"이런 건 글로 배운 거 밖에 없는데 말이지."
유재원은 난감했다.
본인에겐 티파니라는 약혼녀가 있는 상태다. 별 탈 없으면 늦어도 2년 이내에, 그러니까 년도의 맨 앞자리 숫자가 2로 바뀌기 전에 결 혼을 할 것 같다.
티파니가 애인이 되었을 때, 유 재원은 부모님 다음으로 친구들에 게도 알렸다. 다만 수경이에겐 타 이밍이 좀 늦어져서 부모님을 통해 먼저 전해진 다음, 유재원이 알려 주게 되었다.
수경이만 살짝 머뭇거린 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탓이다. 이후에는 친구 사이로 괜 찮아 보였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컴퓨터처럼 설정을 바꾼다고 바 로 적용이 되는 건 아니었다.
이후로 수경이는 유재원에게 마 음이 쭉 있었다. 영식이는 그런 수 경이에게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더욱이 영식이는 수경이에게 본 인을 어필하려면 재원이보다 하나 라도 나은 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 각했고, 이를 열심히 수행했다.
결과적으로 그건 불가능한 일이 었다.
영식이가 가장 잘하는 컴퓨터 실 력도 유재원은 이미 넘을 수 없는 벽 너머에 올라간 상태였다. 아무 리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그런 수 준이었다. 컴퓨터가 이런데 다른 요소들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 였다. 게다가 수경이네 집안 사정 도 시간이 지날 때마다 차원이 다 르게 업그레이드되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으니 엇나가는 게 당연했다.
유재원은 가장 성실할 것 같은 영식이가 살짝 뒤쳐진 것에 대해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실망하진 않았다.
젊은 시절의 방황은 매우 자연스 러운 일이었다. 유재원 본인도 과 거에는 영식이보다 훨씬 심한 방황 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다만 방황에 대한 근본 원인이 유재원 본인도 어찌할 수 없는 삼 각관계인지라 도움이 되어주지 못 했다. 남들이 보기에 어마어마한 능력을 발휘하는 듯 보이는 유재원 이라도 힘을 쓰지 못하는 건 여전 히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일은 미지 의 영역이었다. 그러니 영식이가 일찍 마음을 다잡고 돌아온 게 더놀라운 일이었다.
어쩌면 겉으로만 괜찮다고 하고, 속으로는 여파가 남아 있을 가능성 도 컸다. 미국을 도피의 땅으로 여 길 수도 있었다.
"뭐,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거 지."
사람 일이 어떻게 바뀔지는 유재 원도 모른다.
영식이 본인이 가진 포텐을 활짝 만개한다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높은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유재 원은 영식이의 재능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보스,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영식이에 관한 생각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유재원의 자 동차는 어느새 목적지인 공항에 도 착했고, 잠시 후 게이트에서 토끼 눈을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나 오는 영식이를 볼 수 있었다.
"영식아! 여기야, 여기!"
반가운 마음에 이름이 자연스레 터져 나왔다. 영식이도 그 소리를 한 번에 알아듣고 토끼 같던 눈이 바로 유재원에게 꽂혔다.
"이야, 너 1년 사이 많이 컸네? 뭘 그렇게 열심히 먹은 거야?"
게이트를 넘어 드디어 마주하게 된 영식이를 두고, 유재원은 역시 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 다.
식단부터 운동까지, 신체의 성장 에 갖은 노력을 기울였던 유재원은 겨우겨우 177cm에 이를 수 있었 다. 원래의 키보다 14cm는 더 자 랐으니 꽤나 만족할만한 결과였다. 그런데 잠깐 쉬었던 영식이는 딱 봐도 180cm가 넘어 보였다.
"응? 따로 챙겨 먹는 건 없는데. 어쩌다 보니 이래 됐네."
영식이는 유재원의 칭찬에 멋쩍 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살짝 엇나 가긴 했어도 예전의 그 습관은 그 대로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전보다 훨씬 활달해져서 어색함이 사라지 자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가자. 일단 네가 앞으로 살 집 부터 보여줄게."
그 자리에 서서 몇 분이나 정신 없이 근황을 이야기하던 중에 유재 원이 그나마 빨리 정신을 차리고 차로 영식이를 대기 중인 차로 안내했다.
"우와!, 재원이 너도 벤츠 W220 이구나."
영식이는 신기하게도 대기 중이 던 자동차를 바로 알아봤다. 차에 는 별 관심이 없는 유재원은 W220이라고 해서 무슨 말인가 싶 었는데, 이번에 공항에 타고 온 차 가 98년형 벤츠 7세대 S클래스였 다.
"수경이도 이 차거든."
역시 이유는 있었다.
유재원을 만나서 높아졌던 영식 이의 목소리가 수경이를 거론하자 조금은 톤이 내려왔다. 닭장사와 치킨 프렌차이즈를 제대로 하는 수 경이네는 한참 전에 대기업 반열에 올랐다. IMF 영향을 받지 않을 수 는 없겠지만, 유재원의 조언으로 문어발 확장을 자제하며 건실하게 운영한 덕에 큰 타격은 아니었다.
경호원인 그렉이 영식이의 캐리 어를 가뿐하게 들어 트렁크에 넣었 고, 유재원과 영식이도 곧 차에 올 랐다.
"겨우 차 한 대로 부러워할 것 없어. 너도 ID 그룹에 들어오면 네 능력으로 이런 자동차 정도는 거뜬 히 살 수 있으니까."
" 진짜?"
"응. ID 테크놀로지나 안드로이 드의 프로그래머 연봉이 이 차보다 더 많거든."
ID 그룹에서 프로그래머란 직군 의 평균 연봉이 1억 원이 넘은 지 는 한참 되었다.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에서 근무하는 프로그래머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프로그래머들 사이에도 등급이 있는데, 알파팀처 럼 S급으로 인정을 받았다면 몸값 이 서너 배는 뛰었다.
"우와, 대박!"
영식이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연봉과 같은 사안은 매우 개인적이 고 민감한 것이라서 물어 보고 싶 어도 쉽게 물어볼 수 없는 사안이 었다. 게다가 상상 이상으로 대우 도 좋아서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IMF가 한창인 지금, 한국에서는 졸업을 앞둔 이들의 취업 걱정으로 난리였다. 멀쩡히 회사에 다니던 사람들도 명예퇴직이니 구조조정이 니 해서 대량으로 해고되는 중인데, 신입들을 위한 일자리는 빠르게 줄 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신입 초봉이 1억 원이 넘 는다니, 그야말로 꿈과 같은 이야 기였다.
"하지만 나는 네가 단순한 프로 그래머 정도에서 만족하지 않았으 면 좋겠어."
그런데 유재원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응? 프로그래머라면 다 같은 프 로그래머 아니야?"
"당연히 아니지."
순진하게 되물어 보는 영식이에 게 유재원은 단호히 말했다. 그리 곤 자신이 만든 프로그래머론을 설 파하기 시작했다.
"나는 프로그래머를 크게 3단계 로 나눠서 보고 있어."
"3단계?"
"코더, 프로그래머, 엘리트 프로 그래머라고 말이야."
코더는 말 그대로 이미 설계가 끝난 프로그램의 코드를 작성하는 사람이다. 프로그래밍 언어를 익혀 서 읽을 줄도 알고 쓸 줄도 아는 데, 그 이상의 작업은 어려운 단계 에 있는 사람들이다. 코더는 누군 가 짜놓은 코드나 라이브러리가 없 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아. 이런 사람 많이 봤어."
영식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유재원으로부터 특별 영재 교육을 받았고, 그 이후로도 독학으로 계속 배움을 유지하면서 코더 단계 는 벗어난 영식이였다. 당연히 프 로그래머들이 모이는 인터넷 커뮤 니티 활동도 열심히 했는데, 프로 그래밍 언어를 읽고 쓰는 정도에 불과하면서 아는 척하는 사람들도 많이 봤었다.
"프로그래머들은 본인이 만들 프 로그램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실제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 이야. 시스템에 맞게 최적화도 할 수 있어야 하고, 예기치 못한 오류 가 나왔을 때 이를 수정할 수도 있 어야 하지."
"응응! 맞아. 프로그래머라고 하 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
영식이도 유재원의 말에 적극적 으로 동의했다.
ID 그룹에서도 프로그래머를 채 용할 때, 이러한 능력이 있는지 확 실히 체크했다. 덕분에 학원에서 속성으로 배운 실력으로 도전한 지 원자들은 그 높은 문턱을 넘지 못 했다. 설사 어찌 운이 좋아 합격했 다고 한들, 바로 탄로가 났다. 코더 단계에서는 할 수 없는 과제가 매 일 같이 내려오니 말이다.
"엘리트는 그런 프로그래머들 중 에서도 특별한 사람들이야. 복잡한 문제를 간단하게 풀고, 전에 없던 알고리즘을 만들어내고, 거대한 프 로그램을 총괄하는 등의 특별한 능 력을 깨우친 사람이지."
"너처럼 말이지?"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