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권 6화
-전명헌 대통령, 공수처 구상 발 표!
-검찰청, 하고 싶은 말 많지만, 아직 정해진 것 없으니 줄이겠다.
-신한국당, 대통령의 사법 불신 에 큰 우려-일부 의원들, 지금은 경제 재건 에 집중해야 할 때.
"하여튼. 레퍼토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네."
유재원은 오랜만에 종이 신문을 보며 투털거리는 중이었다. 한국이라서 따끈따끈한 종이 신문을 바로 배달받아 볼 수 있었기에, 반응도 좀 더 사실적이었다. 인터넷으로 봐도 무방하긴 한데, 신문 기사에 실리는 모든 기사가 인터넷 기사로 올라오는 건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한국 신문을 구할 수 없었으니, 인터넷으로만 만족했었 다. 지금은 한국인지라 필요하다면 이렇게 신문을 직접 보는 것도 마 다하지 않았다.
오늘자 신문의 가장 큰 이슈는 바로 공수처였다.
사법 체계를 완벽히 뒤집는 사안 이라 그런지 1면부터 시작해 정치와 사회면까지 모두 공수처 이야기 로 가득했다.
"그만큼 싫다는 거겠지."
기득권이 잘하는 것 중 하나가 무엇이 본인에게 이득이고 손해가 되는지 순식간에 따져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공수처가 정확하게 본인 들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공수처의 구성이 어떻 게 되든 볼 것도 없이, 기존의 사 법 체계에서 이탈한 수사 기관이라 면 자신들이 가진 영향력이 조금도 미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 바로 섰다.
그렇다고 맹렬하게 반대할 수도 없었다.
이미 외환 위기라는 큰 사고를 쳐버린 탓에 본인들의 의지를 대변 하는 신한국당이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기업 들도 마찬가지였다. 돈줄이 꽉 막 힌 탓에 예전과 같은 영향력을 발 휘하기가 쉽지 않았다.
"국회도 반수 이상이니 공수처 신설법은 문제없이 통과되겠지."
유재원은 신문을 보며 간단히 말 했다.
통일국민당 기석, 민주당 80석으로 둘이 합쳐 151석이다. 여기에 반 신한국당 성향에 충청도 기반인 자유민주연합과도 함께할 수 있었 다. 반면 신한국당은 109석이라는 국회에서 제1당을 차지하고 있었지 만, 이걸로는 견제가 어렵다.
더욱이 신한국당은 전두환 사형 으로 인해 대구, 경북과 부산의 지 지 세력이 분리 중이었다. 내분이 엄청나게 심해서 분당도 조만간 기 정사실로 되고 있었다.
그나마 김 대통령이 저번 총선에 서 민정당 세력을 공천에서 학살한 덕에 대구경북의 탈당파는 많아 봐 야 30명 이하였다. 하지만 그 30명도 아까운 것이 신한국당의 상황이 었다.
띵
-회장님, 황재홍 사장 도착했습 니다.
"네, 이쪽으로 모셔 오세요."
스피커폰을 타고 들어온 김대석 의 말에 유재원은 신문을 접어 내 려놓았다. 보통은 한 번 보고 바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했지만, 오늘 자 신문은 그냥 책상 위에 두었다. 기 사마다 공수처를 반대를 위해 온갖 헛소리가 가득해서 심심할 때 다시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김대석이 황재홍을 서재로 데리 고 들어왔다.
황재흥의 모습은 볼 때마다 달라 졌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 이 사실인 것처럼, 지금은 어엿한 기업가의 모습이 그대로 전해졌다. 예전의 기억을 되짚어 본다면, 덕 진리에 처음 나타났을 때만 해도 뭔가 좀 그럴듯해 보이면서도 사짜 의 기운이 진했다. 그런데 지금은 확실히 무게감이 넘치는 기업가의 모습이었다.
"회장님, 여기 지시하신 리포트 입니다."
유재원에게 꾸뻑 인사를 한 황재 홍은 서류 가방에서 곧장 서류 문 서들을 꺼내 보였다. ID 그룹이라 고 하면 IT 분야의 최첨단을 달리 는 기업인만큼, 종이 서류를 더 이 상은 쓰지 않을 것 같지만 그건 아 니다.
종이 서류의 편리함이란 웬만한 기술로는 대처할 수 없을 만큼 컸 다. 적어도 21세기 초반 정도는 되 어야 종이 없는 사무실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기술이 발전되어도 종이의 완벽한 대처는 불가능할 거다.
"꽤 두툼하네요."
가방에서 나온 서류를 본 유재원 은 묵직한 무게감에 한 번 놀랐다. 생각보다 분량이 상당했기 때문이 다.
"예, 아무래도 상황이 최악인지 라 쏟아져 나온 고급 매물이 상당 히 많습니다."
황재홍이 내려놓은 서류들의 정 체는 바로 시시각각 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부동산 매물이었다. 기업이 나 부자들이나, 돈이 마르면서 보 유하고 있던 부동산을 처분해 자금을 마련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쏟아져 나온 매물 중에 괜찮은 게 있으면 정리해서 가져오 라고 황재홍에게 임무를 준 것이다. 전명헌도 당선자 딱지를 떼고 정식 임기를 시작했으니, 이제 슬슬 한 국의 경제에 직접 개입을 할 작정 이었다.
한국 투자의 첫 번째 타자로 점 찍은 것이 바로 부동산이었다. 웬 만해서는 손해 볼 일이 없는 물건 이었고, 지금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것들도 많았다.
황재홍이 유재원의 품격에 맞게 고르고 고른 매물이라서, 딱 봐도 괜찮은 이름이 상당히 많았다. 그 러다가 유재원은 중반쯤에서 서류 를 살펴보던 손길이 멈췄다.
"음, 아파트가 좀 보이네요. 앞으 로 아파트는 빼주세요."
강남의 금마 아파트 매물에 대해 정리한 서류를 보고하는 말이었다. 서류에는 재건축이 시급한 아파트 단지로서, 재건축이 이뤄지면 상당 한 시세 차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적혀 있었다. 꽤나 정확한 분석이 었다. 하지만 유재원은 온갖 종류 의 부동산에 다 투자해도 아파트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파트는 실제 거주하는 사람이 소유하는 게 제일 바람직하잖아요."
"아, 네네, 지당하신 말씀입니 다."
황재홍이 유재원의 말에 서류뭉 치 중에 일부를 골라 다시 가방에 넣었다. 저게 다 아파트 매물이었 던 모양이다.
유재원이 아파트를 거부한 이유 는 간단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의식주 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의 식주, 특히 먹는 것과 집으로 장난 을 치면 지탄받기가 쉽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엔 기본적인 주거 형태가 아파트였다.
요즘 같은 때에 급하게 매물로 나오는 집들은 다들 사연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나 온 매물은 실제 거주할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집값 안정에도 좋고, 부 동산에도 거품이 끼지 않는다.
문제는 유재원 혼자만 이렇게 해 서는 잡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러나 지금은 그 걱정을 하지 않아 도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전명 헌과 이야기를 했었고, 관련 조치 가 조만간 발표될 예정이니 말이다.
"아파트처럼 자잘한 거 말고 종 합 쇼핑몰이나 비즈니스 빌딩, 아니면 특정 거리 전체를 사들이는 방식이 좋습니다."
보유 자금이 워낙 크니 매물 역 시 큰 거 한 방을 노리는 유재원이 다.
"예, 회장님."
곧이어 황재홍은 다른 보고서를 꺼냈다. 조금 전에 꺼내 보였던 리 포트 뭉치보다는 훨씬 얇은 서류였 다.
바로 작년부터 연달아 부도가 났 던 회사 중에 회생 가능성이 크다 거나, 제법 가치가 있는 자산을 정 리한 자료였다. 오늘 황재홍과의 면담에서 부동산 투자는 곁가지였 고, 진짜 본론은 바로 이 리스트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빠르게 리스트를 읽는 유재원의 눈은 별빛처럼 반짝였다.
리포트 안에는 한국 외환위기의 시작점이라고도 볼 수 있는 한보 철강부터 나열되어 있었다. 한보 철강으로 인해 한보그룹 자체가 부 도가 났고, 회생은 끝내 실패했다. 한보 그룹이 보유했던 자산들은 채 권단에 의해 경매에 부쳐지게 되었 고, 지금은 미래 그룹 컨소시엄이 인수한 상태라고 되어 있었다.
미래 그룹은 중공업 비중이 커서 철강의 수요도 많았다. 자동차와 중공업, 조선소 등등 고품질 철강 의 수요가 컸는데, 이전까지의 정 부에서는 포항 제철을 밀어준다고 제철 산업 진출을 막고 있어서 불 가능했다. 그러다가 한보 철강의 부도로 인해서 숙원을 이룰 수 있 었다.
유재원이 보기에도 괜찮은 인수 였다.
포항 제철에 치중되었던 공급처 를 다변화하면서 경쟁력을 증가시 킬 수 있는 인수였으니 말이다. 다 만 인수 과정에서 특혜를 받은 게 있어서 나중에 뒷말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게 오점이었다.
다음은 기아 자동차였다.
"응? 기아 자동차가 일성 자동차 로 넘어가는 게 유력해요?"
기아 자동차부터는 유재원이 알 던 흐름과는 달랐다. 기아 자동차 도 미래 자동차에서 인수하면서 한 국 자동차 시장에서 압도적인 점유 율을 자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번에는 일성 자동차가 인수자로 부 상했다.
"예, 처음에는 제일 조건이 좋은 미래 자동차와 접촉했다고 하는데, 위에서 확 틀어버렸다고 합니다."
우선 협상 대상자 선정에 미래 자동차가 유력했다고 한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이유로 미래 자동차보 다 적은 금액을 쓴 일성 자동차에 넘어갔고, 지금은 한창 협상을 진 행 중이라고 했다. 가격까지 나온 건 아니지만, 채권단 쪽에서 상당 히 만족해하는 눈치라는 정보도 담 겨 있었다.
"그렇군요."
시점을 따져보니 전명헌이 문민 정부에 맹공격을 펼치던 때와 일치 했다. 그러니 전명헌이 청와대와 척을지며 불꽃을 튀겼을 때, 작은 불똥 하나가 미래 자동차에 떨어졌다고 할 것이다.
유재원은 간단히 대답하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기아를 탐내는 일성의 모습을 보 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싶었 다. 외환위기의 근본 원인 중 하나 가 대기업의 방만한 차입 경영 때 문이 아닌가. 그런데 재정 건전성 을 확보하기 위해서 뒤떨어지는 계 열사들을 매각해도 모자랄 판에 오 히려 먹어치우기에도 힘든 기아 자 동차를 탐내는 모습이라니.
일성 그룹이 탈이 나면 날수록 유재원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조만 간 만기가 다가오는 일성 전자의 달러 회사채가 뿜어낼 폭발력이 한 층 향상될 테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일성 그룹이 이번 외 환위기를 극복할 비장의 수라도 있 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 이 다 모인 곳이 일성 그룹인데, 그들도 분명 생각이 있을 거 아닌 가.
"흐음, 다음은요?"
일성 그룹에 관한 판단을 마친 유재원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대기 하고 있던 황재홍은 곧바로 다음 기업의 설명을 이어갔다.
그렇게 황재홍의 설명은 대략 30 분 정도 이어졌다. 하지만 리포트 의 마지막 장까지 모두 들었음에도 유재원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 다. 황재홍도 그 점에 대해서는 궁 금해 하지 않고, 꾸뻑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황재홍에게 맡겨진 임무는 딱 여 기까지였기 때문이다.
어떤 기업을 인수할지, 그리고 어떻게 운영할지에 대해서 의논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회장님, 최강욱 부회장이 1층 로비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바로 최강욱이다.
"네, 나가요."
최강욱이 1층 로비에 도착했다는 말에 유재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재홍이야 서재로 불러왔지만, 최 강욱 같이 존경심이 절로 일어나는 사람은 이렇게 직접 움직여서 입구 까지 마중을 나갔다.
유재원과 최강욱은 북쪽 거실에 자리했다.
멀리 남산도 보이고, 한강도 보 이는 북쪽 거실의 시야는 이미 많 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은 명품 뷰 였다. 그만큼 선망하는 사람도 많 았지만, 아무나 이 자리로 안내하 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최강욱이라면 언제든 이 자리를 찾아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이제 몇 년만 있 으면 유재원과 함께 일한 지도 10 년이 될 만큼, 측근 중에서도 최측 근이었기에 그 모습도 자연스러웠 다.
"얼굴이 말이 아니네요. 휴식 시간은 잘 지키면서 일하시고 있는 거죠?"
다만 최근 한국이 어려워진 만큼 여기저기서 최강욱을 찾는 사람들 도 많아졌고, 그만큼 업무도 과중 된 탓에 최강욱의 얼굴에는 다크서 클이 진하게 내려와 있었다.
"그럼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 니다. 비록 얼굴이 이래도 몸에선 힘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유재원의 우려에 최강욱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힘차게 말했다.
그게 오히려 더 억지로 힘을 짜 내는 것 같아서 유재원은 마음이 쓰였다. 그렇지만 예전부터 ID 그 룹의 한국 지사 경영은 물론이고, 여러 정치적인 조율까지도 맡아온 최강욱이었기에 일을 줄여주고 싶 어도 줄일 수가 없었다.
일반 직원들에게는 칼같이 지켜 지는 8시간 근무 원칙도 최강욱과 같은 계약직 임원에게는 예외였다. 실제 최강욱이 하는 일을 보면 정 시 근무 시간보다 퇴근 후에 정치 인들이나 기업인들을 만나서 하는 일이 더 많았다.
덕분에 유재원은 건강을 유지하 는 데 신경을 썼다. 당장 지금 이 자리에 나온 차만 봐도 산삼 한 뿌리를 모조리 갈아 넣은 산삼 차였 으니 말이다.
차를 다 마실 동안은 가벼운 이 야기로 대화를 했고, 차를 다 마신 후에야 본론에 들어갔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