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420화 (420/1,007)

22권 4화

1998년 2월 25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전명헌 의 취임식이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 서 열렸다.

IMF로 인해 최대한 간소하게 준 비했다고 한다. 그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시 민이 찾아와 주셨고, 덕분에 빈자 리는 찾을 수 없었다. 그곳에는 일 찌감치 초대를 받았던 유재원과 티 파니도 자리했다.

모두의 축복과 성원 속에서 전명 헌은 대통령 선서를 하는 것으로 취임식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근대의 역사에서 가장 큰 분기점이 될 전명헌 정부의 시 작이었다.

선서를 마친 전명헌 대통령은 비 장한 표정으로 단상 앞에 섰다.

대통령으로서 국민 앞에 최초로 연설을 하기 위함이다. 대통령의 첫 대국민 연설이었기에, 그 의미 는 매우 컸다.

특히 지금과 같은 IMF 시대에는 대통령이 말 한마디로 죽고 사는 사람들이 나올 정도였으니, 전 국 민의 눈과 귀가 지금 전명헌 앞에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 분, 안녕하십니까? 전명헌입니다. 저는 오늘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시작은 무난했다.

그렇지만 끝까지 무난하기만 하 면 그건 전명헌이 아니었다.

"국민 여러분의 지혜로운 선택으 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50년만에 처음 이뤄진 정권 교체가 이뤄진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이렇게 평화 적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진 나라는 우리 대한민국이 유일하고, 이러한 고도의 민주주의를 투쟁으로 쟁취 하신 국민께 더할 수 없는 존경심 을 드립니다. 그러나 저 전명헌은 기쁜 마음보다는 무거움이 더 큽니 다. 그것은 이처럼 위대한 국민들 의 나라인 대한민국에 IMF 외환 위기라는 국난이 찾아왔기 때문입 니다."

전명헌은 취임사에서부터 IMF라 고 돌직구를 날렸다.

취임식장 귀빈석에는 김영삼 대 통령 내외도 자리하고 있었기에, IMF 소리가 나오자 표정에서 불편 함이 바로 느껴질 정도였다. 특히 대통령 취임식에는 전대 대통령들이 모두 초대 되는데, 지금 자리에 있는 사람은 최규하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 이렇게 둘뿐이라 더더욱 잘 보였다.

모두가 다 알다시피 전두환은 형 장의 이슬이 되어 역사에서 퇴장했 고, 노태우는 교도소에서 이제나저 제나 사면만 기다리면서 형기를 채 우고 있었던 탓이다.

"저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 여러분을 믿습니 다. 아무리 어려운 외환 위기라도 하나로 뭉쳐 슬기롭게 극복할 것임 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 전명헌을 15대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신 국민께서 주신 사명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IMF 국난 극 복을 위해서는 우리가 모두 똘똘 뭉쳐야 합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 지면 죽습니다."

전명헌은 두 팔을 번쩍 들며 외 쳤다.

그 모습을 귀빈석에서 집중해 보 고 있던 유재원은 '아' 하는 탄식이 작게 나왔다. 1920년대 태생이시니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 멘트가 나오고야 말았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소리가 영 틀린 건 아니다. 그런데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양반이 너무 문제라서 문제인 것이다. 반 면 전명헌의 취임사에 촉각을 기울 이던 보수 성향의 사람들은 귀가 번쩍 뜨였다. 그야말로 취향저격인 문장이었던 탓이다.

그런데 원래 한국말은 끝까지 들 어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는 국민 여러분께 모 든 것을 덮고 무작정 뭉치라고 억 지로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뭉치기 위해서는 서로가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의 대한민국에는 불신이 가득합니다. 아직도 내 식구, 내 친구, 우리 마 을, 도시를 군화발로 짓밟은 사람들이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양민을 학살한 작자들 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뿐만이 아니 라 우리 한국 근현대사에는 수많은 학살이 있었고 제대로 규명되지 않 았습니다. 이러한 범죄를 단죄하는 것이 바로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 이고, 그렇게 우리 사회의 깊은 곳 에 자리한 불신을 제거하고 나서야 만 진심으로 뭉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원칙은 이제 현실이 될 IMF 외환 위기에도 마 찬가지로 적용될 것입니다."

전명헌은 거침이 없었다.

대통령 취임사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 쏟아졌다.

이제까지는 있는 듯 없는 듯 무 시하고 있던 과거사를 모두 재조명 하겠다고 하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덕분에 유재원이 자리한 귀빈석 에 앉아 있던 보수 인사들 사이에 는 헛기침이나 침음성과 같은 불편 한 기색이 그대로 뿜어졌다. 일부 는 당장에라도 자리를 뜨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지만 차마 그런 용기 를 내지는 못했다.

전명헌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 니었다.

"IMF의 원인을 두고 어떤 신문 에서는 우리 국민 여러분이 선진국 진입 기념으로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고 합니다. 흥청망청 과소 비해서 IMF가 초래되었다는 기사 도 봤습니다. 이런 엉터리 기사를 보면서 자책하신 국민께 심심한 사 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면서 아예 고개를 숙이기까 지 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생업에 열심히 임하셨던 국민 여러분께 무슨 죄가 있단 말입니까. 제일 높은 자리에 서 정책을 수립했던 정치인들! 잘 못된 정책을 받고도 제대로 반박하지도 못하고 관성적으로, 아니면 관행이라 생각하고 생각 없이 실행 했었던 관료들, 그리고 이러한 구 태 세력들의 비호를 믿고 방만하게 기업을 경영했던 이들에게 있는 책 임을 국민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 다. 저 전명헌은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목소리를 높인 전명헌은 물컵을 들어 목을 축였다.

"국난을 초래해 놓고 뒤로 나 몰 라라 하며 모든 책임과 뒤처리를 국민에게만 맡기는 행태는 저 전명 헌이 절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입니다. 책임의 소재는 확실히 할 것이며, 고통의 분담 역시 정부 와 기업이 동등하게 나눠질 것을 이 자리에서 약속드립니다. 또한, 사회적 안전망을 이른 시일 내에 구축해 국민 여러분의 어려움을 나 누어쩔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여의도 광장에 박수와 함성이 터 져 나왔다.

국민이 바라는 바로 그 지점을 이렇게 시원하게 긁어주는 정치인 은 지금까지 없었는데, 전명헌이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 분, 저와 전명헌 정부를 믿고 희망 을 놓치지 말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리 국민 여러분의 저력을 저 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한강의 기 적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모두 가 한마음으로 일치단결한다면 외 환위기를 극복하고 진정한 선진국 의 반열에 오를 것입니다."

전명헌의 취임사가 끝나자 여의 도 광장에 다시 한번 박수와 함성 이 가득했다. 한편 시작부터 전명 헌에게 타게팅이 된 기득권들은 크 게 당황했고, 대책 마련을 위해 난 리가 났다.

다음 날.

-15대 행정부, 전명헌 정부로 명 명.

-대통령의 이름을 내건 만큼, 모 든 책임을 다할 것-파격적인 취임人}. 국민과의 직 접 소통 강조!

-통일국민당 정부조직법 발의.

-국무총리 산하 16부 2처 16청 체제.

-대통령 취임식에 미 부통령 최초 참석, 굳건한 한미동맹 과시.

전명헌 정부의 시작을 알리는 기 사들이 쏟아졌다.

"에이, 좀 시시하네."

ID글로벌헤드쿼터 빌딩 최상층에 있는 펜트하우스의 서재에서 컴퓨 터로 기사들을 보던 유재원은 시시 하다는 말과 함께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전명헌의 파격적인 취임사에 뭔 가 기득권의 반응이 나올 줄 알았 는데, 억울하다느니 강력하게 반발 한다느니 하는 반응은 없었던 탓이다.

"하긴, 아직은 권력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긴 하지."

대통령.

그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상당했 다.

한국 땅에 정식으로 대한민국 정 부가 수립된 이후로 독재자들이 즐 비했다.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부터, 노태우까지 독재자 아니면 군부 출신 인사라서 대통령이라는 직함에는 서릿발과 같은 권위가 살 아 있었다.

그런 권위주의로 인해 여러 폐단이 나왔던 터라, 누구는 이를 내려 놓으려고 열심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권위주의가 필요한 때였 다.

사실 어제 전명헌의 취임사는 유 재원의 영향이 컸다.

무슨 비선 실세인 것처럼 취임사 전체를 손봐준 건 아니었고, 포인 트로 꼭 말해야 할 걸 집어주는 정 도였다.

국민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것 을 막고, 기업이나 정부도 함께 고 통을 나눠지겠다고 말하는 대목이 라든가, 역사 청산과 같은 요소였 다.

전명헌은 유재원의 의견을 수용 했다. 그리고 거기에 전명헌 특유 의 과감성을 잔뜩 가미해서 어제 나왔던 취임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모든 부분이 다 수용된 건 아니었다.

그렇게 과거사 문제나 IMF의 책 임론에 대해 말하는 대목도 있었지 만, 역대 정부를 모두 매도만 한 건 아니었다. 사람이란 원래 양면 적 존재이기에 공과 과를 함께 다 봐야 한다고 했다.

이를테면 이승만 정부의 공이라 면 당연히 한미동맹이었다.

어제의 취임식에는 유재원의 영 향력 덕에 미국 부통령인 앨 고어 가 처음으로 참석을 해서 존재감을 뽐내주었다. 앨 고어 때문에 주변 국에서 보내는 축하사절의 격도 한 층 더 높아졌다. 그러니 한미동맹 강화가 나왔어야 했는데, 짧게 넘 어가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박정희에게서도 경제 발전에 대한 공을 인정하는 대목이 있었고, 김영삼 대통령에게서도 역 사 바로 세우기라는 공이 있었다.

여기서 생략된 대통령은 둘, 전 두환과 노태우였다.

전두환의 경우엔 언급할 가치도 없었고, 노태우의 경우 북방정책이 긍정적인 요소이긴 했는데, 반민족 행위로 대통령직이 박탈당해 교도 소에 있는 사람을 언급할 가치는 없었다.

하여튼 유재원은 보수 성향의 사 람들도 아우르는 요소도 추천했는 데, 전명헌의 취임사에서는 많이 생략되었다.

전명헌 본인의 생각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생각인지는 아직 잘 모른다. 전명헌이 미래그룹에 있었 을 때부터 함께했던 연설 전문 비 서를 연설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데리고 들어가셨는데, 그 사람의 성 향이 좀 특별했을 수도 있다.

조금 있다가 한가해지면 직접 전 화해서 물어보기로 하고, 유재원은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나저나 정부조직법 보고는 좀 놀랐겠지?"

정부조직법을 두고 하는 소리였 다.

대통령 아래에 총리를 두고 총리 가 16부 2처 16청을 관리 감독하 는 형식이었다. 총리의 권한이 제 법 큰데, 만에 하나 총리를 국회에 서 뽑게 된다면 완전히 내각제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다.

전명헌이 총리 시절의 경험이 적 용된 것인데, 이번 전명헌 정부의 초대 총리로 지목된 인물을 보면 과연 고개가 끄덕여진다.

민주당 김대중 총재였기 때문이 다.

김영삼과 함께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이었고, 민주당계의 거목이었다. 대통령에 수차례 도전 했지만, 매번 고배를 마시기도 했 다.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이번 15 대 대통령 선거에서 드디어 승리해 준비된 대통령으로서의 면모를 보 여줄 예정이었지만, 이번에도 전명헌에게 밀리면서 고배를 마시게 되 었다.

이제는 전명헌만큼 연로한 나이 때문에 진짜 은퇴를 하려고 했다. 그런 그를 직접 찾아가 총리직을 맡아달라고 설득한 사람은 전명헌 이었다.

김대중 총리라는 아이디어는 전 명헌에게서 나왔다. 유재원은 실현 가능성이 적어서 말도 꺼내지 않았 었는데, 다행히도 성공했다.

덕분에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민 주당과의 연정을 통해서 국회 과반 은 무난하게 확보했다. 대신 김영 삼 전 대통령이 전명헌에게 보장해주었던 총리의 권한보다 더 강한 권한을 보장해주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정부조직법도 발의 가 되자마자 바로 국회를 통과했다.

아직도 구태에 빠져 있던 몇몇 정치인들이 본인의 이름을 신문에 나와 보게 하려고 딴죽을 걸었지만, 원안 그대로 통과였다.

이렇게 발의된 정부조직법 중에 가장 크게 달라지는 건 재경원의 분할이 었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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