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권 3화
"반갑습니다! 미셀 캉드쉬입니 다."
캉드쉬 총재는 IMF 본부에 도착 한 유재원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환대했다.
그는 파리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 공했고, 프랑스 국립행정학교에서 행정학 석사를 땄다. 국립행정학교 가 그 유명한 그랑제꼴이고, 그곳 에서도 정치인이나 전문 관료를 배 출하는 가장 권위 있는 곳이었다.
매년 배출되는 졸업생이 겨우 8,90명이 지나지 않을 만큼 소수였 는데, 프랑스의 고위 관료나 정치인 중에 대다수가 이곳 출신일 정 도다. 그러니 프랑스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미셀 캉드쉬 역시 마찬가지로 이 후 프랑스 재무부 국장을 지냈고, 유럽경제공동체 금융위원장을 거쳐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까지 했다.
IMF에 취임한 것은 1987년이었 고, 지금은 3연속 연임 중일만큼, 능력을 인정받은 존재이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ID 그룹 회장 유재 원입니다."
본인의 간단한 소개와 함께 캉드 쉬가 내민 손을 잡고 악수를 하는 유재원의 눈빛은 캉드쉬 만큼 빛나 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캉드쉬에 대한 유재원의 평가는 그다지 좋은 점수 가 아니었던 탓이다.
가장 큰 감점 요소는 신자유주의 의 신봉자로서 IMF 구제 금융을 받는 나라마다 혹독한 경제 긴축과 구조조정을 요구해서 문제를 일으 키는 점이었다.
혹독한 구조조정에 진절머리가 난 동유럽 국가에서는 공산당 세력 이 재집권하는 일이 벌어졌을 정도 였고, 아르헨티나의 경우에는 구제 금융을 받고나서 상황이 더 나빠지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캉드쉬 총재에 대한 평이 좋지 않은 가장 큰 이유도 여 기에 있다. 민주주의의 전도사인 미국이 공들여 쌓은 탑을 캉드쉬 총재가 무너뜨리고 있으니 말이다.
오죽하면 유재원도 IMF가 한국 을 바꾸기 전에 본인이 개입하기 위해 이렇게 자리를 다 만들었겠는 가.
"왕성하게 활동 중인 유 회장님 을 볼 때마다 시대가 빠르게 바뀌 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됩니다. 제 가 활동하던 때만 해도 회장님 나 이 때에는 열심히 공부하기도 벅찼었는데, 회장님은 거대한 기업을 일구셨으니 말입니다."
"실리콘밸리를 보면 제 나이는 이제 특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저보다 빨리 성장하는 벤처기업들 도 많지요. 총재님 말씀처럼 답은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이지요."
"하하, 그렇군요."
살짝 뼈 있는 덕담을 주고받으며 회담이 시작되었다.
빈센트 그린힐의 보고처럼 IMF 측은 협상 단계에서부터 매우 긍정 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다만 기 업이 특정 나라를 위해 자금을 내겠다고 제안한 것은 처음인지라 그 연유에 관해 물어보는 시간이 많았 다.
"미국이 저에게 큰 기회를 제공 해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요. 미국의 포용력이 아니었으면 제가 이렇게 크지도 못했을 겁니다. 하 지만 한국에서 제가 태어났다는 것 도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한국의 어려움을 외면하기는 힘들었습니 다."
"애국심의 발로라는 것이군요?"
"애국심이라기보다는 측은지심이 죠. 나라 경제가 무너지면 가장 피 해를 볼 사람들은 평범한 국민들일게 뻔하잖아요. 다행히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둔 덕에 제게 한국을 도 울 능력이 있습니다. 다만 우려되 는 건 제 호의가 의도와 달리 엉뚱 한 곳에 쓰이는 것이었죠."
"아, 그래서 IMF의 이름을 빌리 겠다고 하는 것이군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유재원의 말에 캉드쉬 총재의 얼 굴에 살짝 고민이 서렸다.
"유 회장님의 선한 의지는 분명 히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게, 이번 위기는 국가 단위의 규모라는 것입니다.
유 회장님께서 미국서 크게 성공하 셨다고 해도, 과연 국가 단위의 자 본력을 가지고 계신지는 아직 의문 이군요."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유재원은 미소를 지었다. 이것이 야말로 가장 자신 있는 부분이었으 니 말이다. 유재원은 수행원으로 배석한 빈센트 그린힐을 돌아봤고, 빈센트 그린힐이 고풍스러운 가방 에서 서류 뭉텅이 하나를 꺼냈다.
그것으로 게임은 끝났다.
캉드쉬 총재는 유재원의 자본력 (?)을 확인했고, 바로 유재원의 제안을 수락했다.
ID 그룹이 사용 목적을 한국의 경제 위기 회복으로 명시한 출자금 을 내면, 이 돈을 그대로 한국에 지원한다는 것이다.
관건은 IMF의 한국 협상팀이었 다. 무리한 요구를 쉼 없이 하는 이들을 바꾸지 않으면 전명헌이 이 끌고 갈 신정부에 어려움이 가중될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IMF의 협 상팀을 유재원으로 바로 교체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조치였다.
그래서 타협점으로 찾은 것이 IMF의 한국 협상팀 중 상당 부분 을 ID 인베스트먼트 소속의 경제전문가들로 교체하는 방식이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IMF의 개입은 그대로 두면서, 유재원의 영향력을 곧장 행사하는 방법이었다.
합의가 되자 바로 계약서가 만들 어졌다.
아주 상세한 계약서로 유재원이 언제 IMF로 돈을 입금할지부터, IMF 한국 협상팀에 유재원의 사람 들이 몇 명이나 들어갈지, 이들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 등등.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세세하게 만든 계약 서였다.
계약서에 서로 사인을 주고받는 것으로 워싱턴 DC에서의 모든 일 정을 마무리했다.
-재계 순위 36위, 청구그룹 부 도.
-부실 종금사 퇴출 난항. 개인 예금자 지원 절실.
-미국 립튼 재무부 장관, 한국 외채 만기 연장에 긍정적. 다만 정 부지급보증과 국회 동의 필수-IMF, 한국과의 협상 난항. 협상팀 교체 고려.
-정부 기업 구조조정 5대 원칙 천명.
따듯해야 할 크리스마스였지만, 쏟아지는 기사들은 암울했다.
서울의 번화가는 그래도 크리스 마스 분위기를 낸다고 캐럴이 흘러 나왔고, 트리를 걸어 놓고, 장식도 만들었지만 한산하기만 했다. 작년 연말과는 판이한 분위기였다. 더욱 암울한 소식은 당분간은 이런 분위 기가 계속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구조조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도 아닌데, 실업자는 매일 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환율이 너무 오른 나머지 해외에 서 원재료를 수입해 단순 가공해 되파는 형태의 중소기업들은 줄도 산이었다. 또한, 원자재 수입 가격 이 폭등해 밥상 물가부터, 기름 가 격까지 줄줄이 상승 중이었다.
심지어 대기업들도 명예퇴직을 받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실 금융 기관 조사 결과들이 속속 나오고 있었는데, 제2금융권은 물론이고 제1금융권 은행들도 안전하지 않다 는 말이 돌고 있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 아들의 한보그룹 불법 대출 사건처럼, 종 금사들을 본인들의 저금통으로 알 고 빼먹은 사람들로 인해 건전성이 크게 훼손된 탓이었다. 종금사들의 고금리에 혹해 예금을 맡겼던 개인 들을 구제하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여기에 IMF와 한국의 협상이 난 항이라는 소식은 다시금 칼바람이 되어 한국의 주식 시장을 파랗게 물들였다.
IMF 측에서는 이제 임기가 한 달 남은 문민정부와 협상하는 게 아니라, 전명헌이 꾸린 정권인수위 원회와의 협상을 진행 중이었다.
문민정부와 협상을 잘 끝내더라도 정권을 교체한 전명헌이 다 뒤집으 면 말짱 도루묵이었으니, 아예 전 명헌과 직접 협상 중이었다.
그런데 협상이 난항이라는 소리 에 다들 깜짝 놀란 것이다.
혹여 IMF가 지원금을 제때 주지 않으면 다시금 나라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덕분에 IMF 협상팀과 무릎을 맞대고 있는 정권 인수위원회의 경제 위원들에게 무 수한 비난과 압력이 쏟아졌다.
특히 가장 앞서 비난하는 언론사 는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한국경제 가 이상이 없다는 식의 기사를 썼던 대한일보였다.
오죽 말이 통하지 않으면 IMF가 협상팀을 교체할 정도냐면서, 맹비 난을 했다. 조금만 더 나가면 이런 사람들을 정권인수위원으로 이명한 전명헌에 대한 비난까지도 나올 것 같았다.
"하하, 이 사람들 웃기네요"
"뭐가 웃긴다는 건가요? 좀 같이 웃읍시다."
유재원의 말을 레밍턴 부회장이 바로 받았다.
워싱턴 DC의 IMF 본부에서 협 상을 잘 끝낸 유재원은 바로 샌프 란시스코로 돌아가지 않고, 가까운 뉴욕의 ID 인베스트먼트 본사 빌딩 를 찾았다. 그곳에서 ID 인베스트 먼트 임직원을 면담하면서 한국에 파견(?)나갈 사람들도 고르고, 한국 경제 회복을 위한 전략도 구상할 참이었다.
유재원이 맨해튼에 있다는 소식 에, 레밍턴 부회장도 찾아왔다.
넥스트컴캐스트와 타임워너의 합 병을 주관하고 있던 레밍턴은 가을 부터 계속 뉴욕에서 지내는 중이다. 출장의 장기화였는데, 덕분에 셰넌과 엠마도 뉴욕으로 와서 함께 지 내는 중이었다. 숙소는 당연히 ID 인베스트먼트 빌딩이었다.
ID 인베스트먼트 빌딩은 주상복 합으로 지어진 빌딩이었다. 사무실 은 물론 고급형 아파트도 있었다. 뉴욕에서도 제법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 사람들이 임대해 살고 있는 데, 아직 빈방이 많아서 레밍턴 가 족들에게 내주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여튼, 급히 유재원을 찾아온 레밍턴은 무슨 특별한 보고가 있어 서 그런 건 아니었다. 유재원과 레 밍턴은 단순한 상하 관계를 넘어서 는 유대감이 있었기에, 그냥 보고 싶어서 온 것이었다.
덕분에 유재원과 레밍턴은 함께 식사도 했고, 지금은 차를 마시면 서 한가한 한때를 즐기는 참이었다. 그러다가 유재원은 한국의 뉴스들 이 갱신되는 타이밍에 i웍스 노트 북을 켜고 신문을 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 한국 기산데요, IMF 협상팀 교체 이유가 전명헌 당선자의 고압 적인 태도 때문이라네요. IMF의 심기를 거스르면 지원이 끝장날 수 도 있으니, 당장 가서 사과해야 한 대요. 전명헌 할아버지가 재발 방 지 약속이라도 해서 IMF를 달래야 한다는군요."
"우하하! 거참, 웃기는 작자들이 로군요!"
유재원의 설명에 레밍턴도 웃음 을 터트렸다.
그도 그럴 것이 IMF의 협상팀이 교체될 거라는 기사가 뜨는 건, 캉 드쉬 총재와 유재원 사이의 계약에 의한 움직임이었다.
기사에서 마치 사실처럼 말하고 있는 현재의 협상팀과 전명헌 당선 자와의 불화도 명백히 거짓이었다. 전명헌은 한국 국민을 위해 IMF 협상팀이 요구하는 가혹한 조치의 완화를 요구했을 뿐인데도, 기사만 보면 협상을 파탄내려고 하는 것처 럼 보였다.
레밍턴도 ID 그룹의 핵심 인물인 만큼, 유재원은 본인이 하려는 일 에 대해 어느 정도 먼저 설명을 해 줬다. 당연히 IMF를 통한 한국의 지원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유재원은 혹시 레밍턴이 한 국에 큰돈을 쓰는 것에 불편한 마 음이 있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ID 그룹이 이룬 성과는 대부분 미국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미국에서 돈을 잔뜩 벌어다가 한 국에 뿌리면, 미국 사람 처지에서 는 좀 고깝게 보일 수 있을 거 아 니겠는가.
다행히도 레밍턴은 그렇지 않았 다.
오히려 나라가 어려울 때 과감하 게 주머니를 여는 유재원을 진정한 애국자라면서 치켜세웠다. 레밍턴의 반응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IMF 의 구제 금융을 받았던 수많은 나 라도 부자들은 여전히 많은 부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하면서, 그런 나라 중에 유재원처럼 먼저 나서서 돈을 푼 경우는 한 번도 못 봤다고 했다.
애국심뿐만이 아니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행하는 모습에서 나 이에 상관없이 존경할만한 일이라 고 응원해주었다. 만약 유재원의 뜻을 오해하는 사람이 나올 경우 본인이 직접 나서서 그 오해를 풀 어줄 거라고 장담했을 정도다.
유재원의 친분 때문이 아니라 진 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게 십분 느 껴졌다. 덕분에 유재원도 이번 계 획에서 혹시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의구심을 완벽하게 떨칠 수 있었다.
이처럼 레밍턴도 한국에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함께 웃을 수 있었다. 나중에 유재원이 IMF에 개입해서 한국에 큰 지원을 하는 게 알려지면 언론 들은 그때 가서 또 어떻게 말을 바 꿀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후 유재원은 레밍턴이나 빈센 트 등등 그룹 임원들 그리고 ID 인 베스트먼트 소속의 유능한 금융, 경제 전문가들과 함께 한국에 대한 전략을 논의했고, IMF의 협상팀으 로 파견될 사람들도 선정했다.
그러한 작업은 연말까지 이어졌 다.
이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유 재원은 ID 테크놀로지 본사에서 종무식도 하고, 새해맞이 행사도 치 르면서 새해를 맞이했다.
그렇게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