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416화 (416/1,007)

21권 25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몇 가지 약속만 하시면 전명헌 할아버 지께 좋게 말씀을 드려볼 수도 있 죠."

"그게 무엇입니까?"

방법이 있다는 소리에 하태원이 목소리가 커졌다.

"추징금 말이에요."

전두환과 노태우 두 사람에게는 사형뿐만이 아니라 천문학적인 추 징금도 걸려 있었다.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챙긴 비 자금이 드러나면서 이를 환수하기 위해 때린 추징금이었다. 규모는 수천억 원에 이르렀는데, 80년대 말 기준이었으니 90년대인 지금 물 가로 치환하면 조 단위가 넘는 규 모였다.

물론 이 금액도 실제보다는 적은 것으로, 수사가 다급히 이뤄진 까 닭에 전체적인 비자금 규모를 파악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수천억 원 이 매겨질 만큼 두 사람이 해먹은 돈이 상당했다.

"나라가 어려운 때에 화끈하게 납입하신다면, 실리적인 성격의 우 리 할아버지는 형 집행 정지는 물 론 사면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실 겁니다."

노 전 대통령의 한때 별명이 물 태우였다.

그만큼 전두환보다는 존재감이 없었던 것이다. 실제 대통령직에 있을 때에도 사고를 친 일이 그다 지 없었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전 두환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지 이후에 당선된 민선 대통령들과는 비교할 수 없다.

"아, 그렇습니까?"

돈 이야기가 나오자 하태원 회장 은 살짝 당황했다.

보아하니 부탁 하나면 잘 끝날 줄 알았던 모양인데, 갑자기 돈이 언급되자 예상 밖이었던 모양이다.

"네, 제가 해드릴 말은 이게 전 부입니다. 추징금이 환수되었다는 기사가 나오면 바로 전명헌 할아버 지께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이어진 유재원의 말에 하태원 회 장의 당황하는 기색은 더욱 강해졌 다. 선처를 부탁해주는 것도 후불 제라는 소리였고, 어디 가서 이런 대접을 받아 보는 건 처음이었을 테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유재원이 엄청나 게 잘 봐준 것이었다. 더 나아가면 정경유착으로 만들어진 선경그룹을 찢어버리는 건 일도 아닌 상황이었다.

아무리 선경이 내수 중심의 탄탄 한 기업이라고 해도, IMF에서는 매출의 규모가 잔뜩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정부에서 IMF 돌파 를 위해 재벌들 소유 기업의 계열 사 간 구조조정을 시작하면 선경도 딱 걸린다.

재벌들의 문어발식 확장으로 인 해 발생한 비효율성은 차입 경영을 할 수밖에 없는 요소였다. 이를 극 복하기 위해서 대기업들은 주력과 비주력 계열사로 분류를 하고, 비 주류 계열사를 상호간에 매각 및 인수를 추진해서 타파하는 것이다.

유재원도 이 빅딜은 IMF 극복을 위한 효율적인 정책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잘못하면 독점기업 양산 이었지만, 적당히 조절하면 국제적 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회사들 을 여럿 만들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태원 회장과의 미팅도 거기까 지였다.

멀리서 온 하태원 회장의 이야기 도 성심성의껏 들어주었고, 유재원 도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했다. 그걸 받아들일지 말지는 이들의 선 택이 었다.

며칠 후.

"와, 빠르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유재원에 게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모니터 에 뜬 속보 하나 때문이었다. 예전 이라면 속보는 속보가 아니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넥스트컴에 업 데이트 되는 기사는 실시간이 아니 라, 시차가 좀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속보는 진짜 속보였다.

넥스트컴의 뉴스 페이지는 이제 신문사들은 자사의 홈페이지보다 더 중점으로 관리하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넥스트컴 뉴스 페이지에 기사가 올라가지 않으면 신문사 홈 페이지에 기사를 아무리 올려도 클 릭 숫자가 올라가지 않는다는 걸 이제야 인지했다.

클릭 숫자가 떨어지면 광고의 단 가도 떨어졌다. 심지어 신규 독자 유입이 되지 않았다. 덕분에 신문 사는 물론 다른 형식의 언론사들도 넥스트컴의 뉴스 페이지에 본인들 의 기사를 하나라도 더 올리기 위 해 열심이었다.

그러한 경쟁의 결과로 인해 속보 도 넥스트컴에 제일 먼저 오르게 된 것이다.

-노태우, 추징금 3,859억 원 성 실히 납부하겠다.

-납부 방식은 분할 납부, 매달 착실히 납부할 것.

옥의 티라면 한 방에 3,859억 원 을 턱하고 내놓진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도 입장문을 내면서 982억 원 을 납입하긴 했다. 하긴, 한 번에 그 큰돈을 만드는 건 유재원과 같 은 소수의 사람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비자금을 은닉하기 위해 땅과 같은 부동산으로 많이 바꿔 놓았을 터이니, 이를 현금화 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재미있는 건 이번에 매겨진 추징 금의 액수였다. 원래대로라면 3천 억 원이 넘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이전보다 30%정도가 더 늘어났다.

유재원이 나라에 세금도 많이 냈 고, TG 모바일 출범을 하면서 전 파 사용료도 많이 내면서 노 전 대 통령이 빼돌린 자금의 규모도 커지 면서 추징금이 전보다 훨씬 많아진 것이다.

노 전 대통령 측은 나머지 추징 금에 대해서도 납부 계획을 소상히 설명했다. 마치 채권자에게 변재 계획을 설명하듯 매우 자세하고, 성실한 계획표를 가지고 발표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인지라 기자들도 속보에 이례적이라는 단어를 매우 많이 쓰고 있었다.

"흐음, 이 정도면 진심이려나?"

기사를 본 유재원은 고개를 끄덕 였다.

이전 생에서도 노 전 대통령 측 은 전두환과 달리 추징금 납부는 제법 성실히 했다. 이번엔 본인의 목숨까지 걸렸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전보다 비교도 안 될 만큼 성실하게 임할 것이다.

"그러면 나도 한 말은 지켜야겠 지."

유재원은 책상 위에 놓였던 티파 니폰을 들었다. 완벽한 개인용 휴 대폰이었고, 이 전화로 전화가 오 면 일을 하다가도 말고 받을 만큼 중요한 사람들에게만 알려준 번호 였다. 당연히 휴대폰 연락처에 저 장된 이름도 극소수였다.

마찬가지로 유재원이 이 전화로 전화를 걸면 상대방도 웬만하면 다 른 일을 제쳐두고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오! 재원이냐?

전화를 걸고 나서 전화벨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전명헌의 밝은 목소리가 전해졌다.

"네, 할아버지. 다름이 아니라 요……

전명헌의 물음에 대답하는 유재 원은 살짝 오글거렸다. 다 큰 어른 이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는 게 가 끔 깰 때가 있었던 탓이다. 그렇지 만 유재원은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 고, 전화를 걸었던 목적을 상기하 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노태우 사형? 누가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닌단 말이냐?

"며칠 전 누가 찾아왔는지 아세 요? 선경그룹의 하태원 회장이었어 요."

-하태원이?

"네! 갑자기 찾아 와서는 장인어 른을 좀 살려 달래요."

-허, 참. 자기네 회사나 챙길 것 이지, 멀리도 가서 너를 귀찮게 했 구나.

이윽고 전명헌이 혀를 차는 소리 가 생생히 들렸다.

보아 하니 전명헌 할아버지는 노 태우 전 대통령을 사형 집행할 마 음이 없는 게 확실했다.

"그렇죠? 그런데도 불안한지 저 를 찾아왔던 거예요. 그래서 제가 추징금 걸린 걸 다 납부하면 할아 버지가 좋게 봐주실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가뜩이나 나라 살림이 어 려운데, 거액의 추징금이 들어오면 좀 나아질 거 아니에요?"

-아아, 어쩐지. 나는 노태우가 뭘 잘못 먹어서 비자금을 다 토해 내나 싶었다. 그게 네 말을 따른 것이었구나.

전명헌 할아버지의 반응은 툴툴 거리면서도 재미있다는 느낌이 강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재원은 노 전 대통령에게 직접 뜯긴 거라 고는 TG모바일 납부해야 했던 전 파 사용료에 일정 금액을 좀 보태 준 정도에 불과했다.

그것도 나라에 직접 납부한 것이 고, 직접 뜯긴 건 없었다. 반면 전 명헌 할아버지는 달랐다. 한국 경 제계의 살아 있는 역사와도 같았고,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같은 부정적 인 파트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 는 존재였다.

군부 독재 기간 동안 저금통 노 릇을 했는데, 이제는 관계가 거꾸 로 되었으니 여러 가지 감정이 드 는 모양이다.

-알겠다.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하마.

"네, 알겠어요."

유재원도 하태원과 했던 이야기 는 이 정도로 충분히 지킨 것 같다 고 생각해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참, 내일 재계와의 만남이 있 는 거 알지? 내게 해줄 말은 따로 없느냐?

이번엔 전명헌이 본인의 이야기를 풀었다.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 된 전명헌 의 행보는 예전 김대중 후보가 당 선되었을 때와 유사했다. 아무래도 IMF 상황이다 보니 경제 관련한 움직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세 계은행과 아시아개발은행과의 자금 지원 협상을 완료했고, 방한한 IMF 협상단과의 협상도 진행해야 했다.

세계적인 신용 평가 회사인 무디 스에서는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투 자부적격 등급인 Bal로 하향 조정 하기도 했다.

이 단계에서 유재원은 한국으로 넘겼던 100억 달러에 대한 환전을 시작했다. 원화 환율이 유재원이 기준으로 삼았던 1,600원을 넘겼기 때문이다. 한 번에 100억 달러를 다 푸는 게 아니라, 5천만 달러 혹 은 1억 달러 수준으로 조금씩(?) 풀었다.

그럴 때마다 환율은 크게 출렁였 다. 잠깐 내리는 듯 했지만 다시 상승하고, 다시 상승하면서 지금은 1,800원 초반 대를 형성하고 있다. 원래는 1,900원을 넘어 2,000원 대 를 찍을 기세였는데 유재원의 개입 으로 거의 180원 어치의 상승을 저 지 했다.

이 대목에서 유재원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약간의 협력관계인 조지 소로스 퀀텀펀드 회장에게 유재원은 1,600 원부터 본인도 개입할 거라는 언질 을 주었다. 그러면 보통 1,600원을 달러 매도 시점으로 볼 텐데,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버티는 중이었다. 유재원이 보기엔 상당히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정도 배짱이 있어야 거대 헤지펀드를 운 영한다고도 볼 수도 있다.

하여튼, 경제가 무척이나 위태로 운 상황이니 신임 대통령의 최대 임무는 경제 재건이 될 수밖에 없 다.

그러니 취임 전에 재계의 인물 들, 그러니까 재계 순위 10위까지 의 대기업 오너들과의 만남도 당연 한 수순이었다.

"네, 그건 전에 보내드린 게 전 부에요."

이에 대해선 유재원이 딱히 더 할 말이 없다.

왜냐하면, IMF 체제에서의 구조 조정 방안은 한참 전에 전명헌에게 설명을 끝냈기 때문이다. A부터 Z 까지 그야말로 세세하게 들어 있는 로드맵이었고, 전명헌도 이에 전적 으로 동의했다. 전명헌이 보통의 정치인이었다면, 외풍의 영향을 크 게 받아 계획을 자꾸 수정하려 들 겠지만, 전명헌은 불도저 같은 성 격인지라, 본인이 납득한 사안에 대해서는 끝까지 밀고 나갔다.

유재원의 구조조정 방안은 당연 히 전명헌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 러니 IMF와 비슷한 크기의 사고가 또 터지지 않는 한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중에 또 통화…….

"아참!"

통화를 마칠 때쯤, 유재원은 깜 빡했던 것 하나를 떠올렸다.

-무슨 일이냐?

"재계 사람들을 만나시면 바로 노동계 사람들도 만나 주세요."

-응? 그 고약한 노조 사람들을?

유일하게 전명헌이 거부감을 보 이는 것이 바로 노조였다.

그도 그럴 것이 미래그룹의 노조 와 전명헌의 기 싸움은 그야말로 유명한 것이었다. 중공업 비중이 큰 미래그룹은 작업 중 사망자들이 다른 기업보다 훨씬 많았다. 반면 위험한 일을 하면서도 대우가 시원 찮으니 노동자들이 금속노조를 중 심으로 뭉쳤다.

이들의 단결력은 상상 이상이었 고, 전명헌도 두 손을 들 정도였다. 오죽하면 노조원이 늘어나는 게 겁 나서 미래 자동차의 신규 공장 건 설은 무조건 해외에다 지을 거라고 했을 정도였다.

정치인이 되고 나서 노조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줄긴 했다.

미래그룹 중공업 단지가 밀집한 울산 지역은 통일 국민당의 핵심 지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대통령이시잖아요. 모든 행보에는 의미가 부여되거든요. 재 계만 만나고 노동계를 안 만나면,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대기업 위주 의 정책이 나올 거라고 생각할 거 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런데 그 냥 듣고만 있어도 되는 거냐? 내키 는 대로 막말하면 안 되겠지?

"어휴, 그래도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는 건 막아야겠죠."

전명헌은 유재원의 설명을 이번 에도 쉽게 이해했다. 그럼에도 끝 까지 툴툴거리는 것 역시 잊지 않 았다.

-알겠다. 그러면 다음에 또 전화 하거라.

"예, 그러면 다음에 봐요."

유재원은 그렇게 통화를 마무리 했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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