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권 24화
며칠이 지났다.
유재원은 다시금 업무에 복귀했 고, 안드로이드와 ID 오피스의 98 버전 출시 준비 작업을 다시 시작 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ID 그룹의 계열 사들이 매일 올리는 보고서나 결재 서류를 보고 검토도 해야 했다. 만 약 유재원이 ID 그룹의 일개 직원 이었다면 그런 작업이 모두 고되고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ID 그룹이 보수는 많이 줘도 업 무 강도는 좀 있는 회사였던 탓이 다. 8시간이라는 근무 시간에 맞춰 부여된 일을 하려면, 허투루 낭비 되는 근무 시간이 거의 없어야 했 다.
반면 유재원은 자신이 해야 했을 일을 직원들이 나눠 해주는 거라 생각했다. 보고서나 결재 서류 하 나하나가 모두 돈이라 생각하니, 매일 비우는 메일함이 다음 날 가 득 차 있어도 늘 즐거웠다.
"그래도 이제부터는 좀 더 효율 적인 전산 처리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는데."
사내 메신저 시스템과 이메일 등 을 정식 업무 처리에 가장 효율적 으로 사용하는 회사가 ID 그룹이었다.
회사가 작았을 때는 이 정도로 충분했는데, 이제 슬슬 한계가 보 이고 있었다. 보고자들이 자동 정 리가 되는 태그를 붙여서 올리곤 있지만 여전히 복잡했다. 또한, 직 원들이 업무 처리를 하는 데 있어 비공식적인 프로그램들을 많이 사 용하고 있다는 보고도 있었다.
ID 오피스가 사무용 프로그램의 알파와 오메가이긴 한데, ID 오피 스로 생산된 자료들을 정리하고 가 공하는 일은 또 별개의 일이었다.
"회사의 모든 업무 전체를 전산 화시키는 작업을 이제 슬슬 시작해야겠다."
궁극적으로 인공지능의 어시스트 도 도입할 계획인 유재원이었으니, 언젠가는 전체를 전산화하는 일은 해야 했다.
그 시점을 유재원은 98년도로 잡 았다. 본래 계획은 2000년대였는 데, ID 그룹의 성공적인 행보로 인 해서 그 시점을 훨씬 앞당기기로 결정했다.
"그러면 인공지능 개발 일정도 더 당겨야겠네."
98년도는 쉴 틈 없이 일만 하는 한 해가 될 것 같다.
비밀이 무척이나 많고, 앞으로는 더더욱 많아질 ID 그룹이었다. 그 러니 통합 전산 시스템 구축을 다 른 SI회사에 외주를 줄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자체 개발이 답인데, 그러면 유재원 본인도 개발에 빠질 수는 없는 거 아니겠는가.
한국 경제 정상화 작업은 어쩔 수 없이 최강욱 부회장을 믿고 보 다 많은 작업을 위임해야 할 것 같 다.
띵
유재원이 98년도를 대비하는 중 대 결심을 할 때, 알람이 울렸다.
비서실장인 김대석의 문자메시지였 다.
-선경그룹의 하태원 회장이 지금 우리 회사를 방문해, 회장님의 면 담을 신청했습니다.
선경? 하태원?
선경이라고 하면 80년대 부쩍 재 벌로 성장한 회사였다. 노태우 대 통령과 사돈 지간이 되면서 유공도 먹고, 90년대 초엔 그 말 많고 탈 많았던 이동통신 사업에도 진출해 재계 순위가 급성장했다.
정경유착으로 성장했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의 인식이 좋지 않아서, 지금까지는 손승길이라는 전문 경 영인이 사장으로서 활동하고 있었 다. 오너 일가는 하 씨였고, 최근에 이를 승계한 사람이 하태원인데, 바로 이 사람이 노태우 대통령의 딸과 결혼을 했던 장본인이다.
이제껏 언론에도 잘 나타나지 않 았던 하태원 회장이 언급된 것에 대해 유재원은 궁금증이 일어났고, 곧장 김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하태원 회장이 지금 실 리콘밸리에 있는 ID 테크놀로지 본 사에 나타났다는 말이죠?"
-예, 회장님. 그렇습니다.
"면담 신청하면서 다른 말은 없 었어요?"
-네, 꼭 회장님께만 말할 중요한 부탁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유재원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피 아노 치듯 튕기면서 짧게 고민했다.
"그러면 그분을 이쪽으로 모셔오 세요."
멀리 한국에서 직접 찾아 온 양 반인데,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 다. 게다가 한국 이동통신 정책과 관련해 이야기할 것도 있었다.
20여분 후.
현관에서 띵동 하는 소리가 났 다.
김대석과 함께 하태원 회장이 도 착한 것이다. 문은 경호원이 열어 줬고, 하태원 회장은 거실로 안내 되었다. 그러는 사이 김대석이 서 재로 들어와 이동 중에 하태원 회 장과 대화를 하면서 얻은 단편적인 이야기를 전해줬다.
사적인 만남이었다면 그냥 유재 원이 가서 문을 열어줬을 테지만, 엄연히 공적인 자리였기에 격식을 차렸다.
그렇게 준비를 끝내고 유재원은 거실로 나갔고, 하태원 회장을 볼 수 있었다. 하태원 회장도 서재에 서 나오는 유재원을 보았다.
"회장님! 장인어른의 선처를 간 곡히 부탁합니다."
그러더니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허리가 90도로 꺾였다.
선처?
갑작스러운 하태원 회장의 모습에 유재원은 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유재원은 영문을 모르겠 다는 얼굴이었지만, 선경그룹의 하 태원은 준비한 말을 계속 풀었다.
"저희 장인이 좋지 못한 일을 많 이 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 도 나라를 위해서 힘쓴 공도 분명 히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습 니다. 게다가 유 회장님과도 일반 적인 관계는 아니었지 않습니까?"
일반적인 관계가 아니라니?
하태원은 웃기려고 하는 말이 아 니라 완벽히 진심인 듯, 이마에 땀이 살짝 맺힐 만큼 열심히 본인의 장인어른에 대한 사면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유재원이야 그 말을 한 귀로 듣 고 다른 귀로 흘리는 상태였다.
사람에게 빛과 어두움이 공존한 다는 건 분명 맞는 말이었다. 지금 유재원도 이전 생부터 만들었던 정 교한 계획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열심히 달리는 중이었다. 덕분에 이른 나이에 ID 그룹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중에 이러한 행보를 평가한다면 비판의 요소는 분명히 발견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태우전 대통령도 좋게 평가할 부분도 있고, 비판을 받아야 할 부분도 있 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자신 앞에서 하고 있느냐 하는 것 이다.
혹시나 이런 생각도 드는 유재원 이다.
하태원이나 그의 처가에서는 진 짜로 전두환의 죽음을 사주한 게 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이 다. 그러면 참 여러 가지로 억울해 지는 유재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 생에서 본 인의 기술을 다 빼앗고, 죽음으로 몰고 간 놈들도 지금 버젓이 숨을 쉬고 있다.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이지 만 손도 대지 않았다.
그것은 전생의 과오를 이번 생에 까지 끌어오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고, 당시의 본인에게 밀어닥친 불행이 개인의 차원이 아닌 구조적 인 문제에서 온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은 유재원에게만 그런 게 아니었다. 대기업의 기술 강탈 역사를 보면 그런 일들이 수두룩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유재원이 내린 결론은 복 수를 개인의 차원에서 이루기보다 는 그들이 속한 조직 자체를 뜯어고치겠다는 것이었다.
그걸 가능하게 할 힘은 이미 모 은 상태였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할 참이었다. 이처럼 매우 양 심적인 생각을 가진 본인을 돈과 죽음을 거래하는 사람으로 오해하 는 것에 매우 실망했다.
"음, 그리고……
유재원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 는지, 하태원 회장은 주저주저 하 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장인어른 면회를 갔을 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유 회장님께서 들어주시기로 한 부탁이 하나 있다고……
부탁?
유재원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자 대전 엑스포 착공식에서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 했던 일이 바로 떠올랐다.
"아."
그때 노 전 대통령에게 유재원은 부산 그룹과 관련된 민원을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알겠다고 했다. 그 러면서 나중에 자신의 부탁도 하나 들어달라고 했다. 그때 유재원이 한 말은 박상권 사장님께 힘을 좀 써달라는 로비가 아니라, 검찰 수 사에 외풍을 좀 차단해달라는 것이 었다.
그걸 로비로 받아들인 노 전 대 통령은 자신도 나중에 부탁을 하나 하겠다고 했고, 유재원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는 잊고 있었는데, 하태원 회장이 그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 다.
반대로 말하자면, 기억의 먼지가 가득 쌓인 묵은 부탁을 꺼내들 만 큼 노 전 대통령은 지금의 상황을 대위기로 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하긴, 평생 함께했던 친구가 순 식간에 사형을 집행 받았다. 언제 자신도 그렇게 사형이 집행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교도소에서 빨간 명찰을 받았지 만, 사면이 논의되면서 곧 출소할 거라고 기대했던 차에 상황이 180 도 달라진 것이다.
유재원이 봤을 때는 노 전 대통 령의 형 집행은 끝났다.
이미 차기 대통령은 전명헌이다. 정권 교체는 이제 정해진 것이었고, 김 대통령의 권력도 이제 마침표를 찍었다. 정권인수위가 활동하는 동안 조용히 있다가, 퇴장할 일만 남 았다.
IMF만 없었더라면 역대 최대의 성과를 내고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내려왔을 터였다. IMF가 터져서 정권도 교체되고, 김 대통령이 이 뤄냈던 여러 성과들도 빛이 바라게 되었다. 이제 와서 사형을 더 시켜 봐야 그 오점만 커지게 되었으니 다시 시도하진 않을 것 같다.
반면 노 대통령이나 그의 집안들 은 불안감이 여전히 가득했던 모양 이다. 그러니 기억 속 부탁도 떠올 렸고, 하태원을 여기까지 보냈겠지.
이렇게 머릿속에서 계산을 끝낸유재원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음, 저기. 그 부탁이라는 건 부 담은 조금도 없는 매우 간단한 일 을 의미하는 거예요. 서로 말 한 마디로 끝낼 수 있는 정도라고요."
일단 '부탁'이라는 것 자체를 바 로 잡는 것으로 시작했다.
하태원의 표정만 보면 유재원은 마치 노 전 대통령에게 구명지은이 라도 지고 있는 사람 같았다. 무조 건 부탁을 들어줘서 노 전 대통령 을 살려줘야 하는 느낌이었다. 유 재원에겐 택도 없는 소리였다.
아예 유재원은 까놓고 대전 엑스포 착공식에서 노 전 대통령과의 대화를 하태원 회장에게 그대로 말 했다.
검찰 수사에 외풍이 들어오는 걸 좀 막아준 것이, 목숨을 살려준 빚 과 같은 무게는 아니지 않은가. 게 다가 그 부탁도 유재원 본인의 이 익이 아니라 박상권 사장님을 위한 것이었다.
효과가 없었던 건 아니어서 수사 는 잘 끝났고, 이로 인해서 박상권 사장님이 부산그룹의 경영권을 찾 아올 수 있었다.
"혹시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 으면 회장님의 장인어른께 물어보세요."
유재원의 냉정한 말에 하태원은 사색이 되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우리는 유 회장님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탁하는 얘기를 꺼낼 때는 살짝 기가 살아나는가 싶었던 하태원은 유재원의 말에 다시 허리가 굽혀졌 다.
그런 하태원을 보는 유재원은 약 간은 신기한 마음이었다.
객관적으로 따져 보면 선경그룹 은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을 건 다 받았다. 유공도 있고, 이제는 텔레콤도 있다. 석유와 통신으로 쌍 끌이를 하면서 한국 제계 순위 TOP 5에 드는 건 이제 시간문제였 다.
아무리 한국이 IMF로 어려워졌 더라도 석유를 쓰지 않을 것도 아 니었고, 이동통신을 안 쓰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러니 하태원에게는 이렇게 태 평양을 건너와 유재원 앞에서 저자 세를 보여줄 이유는 하나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사정하는 걸 보면 진짜 아내나 처가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거나 유재원이 모르는 뭔가가 더 있을 거 같다.
당연히 유재원의 마음은 후자였 다.
진짜 아내를 사랑하는 거라면 불 륜 같은 것도 없었을 텐데, 현실은 이혼을 한다고 소송을 한다거나 재 산 분할 소송을 한다고 그 난리를 피웠다.
유재원은 슬슬 이 자리가 지겨워 졌다.
회귀로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