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414화 (414/1,007)

21권 23화

당연히 반대쪽 세력도 난리였다.

유재원을 응원하고, 통일국민당 과 전명헌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김 대통령과 한나라당에 대한 성토가 폭발했다. 전두환을 사형시키고 그 후폭풍은 유재원에게 덮어씌우려던 꼼수가 들통이 났다고 떠들었다.

그렇지만 크게 보자면 이번 대선 이 최악의 네거티브에 빠진 건 확 실했다. 전명헌의 대선에도 부정적 인 영향이 오는 게 매일매일 하는 여론조사 결과를 통해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루하루 바뀌는 여론이었다. 다행히 선거일 직전이 되자 점차 정 리가 되었다.

관건은 유재원이 현금으로 100억 달러를 가지고 있느냐였다. 만약 현금이 없이 김 대통령에게 제안한 것이라면, 어려운 처지의 대통령을 농락한 것이고, 진짜 보유하고 있 다면 유재원의 선의를 김 대통령이 곡해한 것이라는 것이다.

여론의 관심이 정점에 치달았을 때, 유재원은 마침표를 찍었다.ID 인베스트먼트의 한국 법인계좌인 HSBC 한국지점에 100억 달러가 정확히 꽂힌 것이다.

-유재원 회장, 한국에 100억 달러 투자!

-호의를 곡해한 김 대통령의 의 도 매우 의심스럽지만, 한국의 어 려운 사정 외면할 수 없다.

-한국 투자 가치 사라지지 않았 다!

ID 인베스트먼트가 한국에 대규 모 투자 시작할 것!

심지어 실제 입금이 된 계좌를 인증하기까지 했다. 비록 외국계 은행이긴 했지만 국가의 외환보유 고에는 분명 집계가 되는 돈이었다. 아직 원화로 환전한 것은 아닌지라 정부나 은행이 무단으로 그 돈을 활용하진 못해도 유재원이 마음을 먹는 순간 언제든 활용 가능하다. 마치 총에다 총알만 장전해놓고 방 아쇠를 당기진 않은 상태인 것이다.

여론을 돌리기엔 충분한 조치였 다.

특히 매일 부도 소식만 들리는 한국이었는데, 유재원이 투자 가치 가 있다는 걸 말해줌으로써 러시아 처럼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불 안감은 상당히 해소되었다.

그렇게 투표일 막판까지 온갖 이 슈가 정신없이 몰아쳤고, 운명의 투표일인 12월 18일이 왔다.

1997년 12월 18일에 있었던 15 대 대선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는 선거였다.

이전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마찬 가지였다. 이전 생에서 15대 대선 이 갖는 가장 큰 의미는 한국 최초 의 정권 교체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계속해 서 나라의 정권을 놓치지 않았던 보수 세력은 IMF를 촉발한 죄를 톡톡히 물었다. 재미있는 점은 당선자와 차순위 낙선자의 득표수 차 이가 사실 마지막에 있었던 여론조 사의 오차 범위보다 좁았다는 점이 다.

여당 쪽에서 이인제라는 인물이 경선에 불복해 찢어져서 나왔고, 이 사람이 여당의 표를 나눠 먹으 면서 겨우 김대중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다. 만약 이인제 후보가 경 선 불복 후에 출마하지 않았더라면 IMF가 터졌음에도 최초의 정권 교 체는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평가가 있었다.

이후 이인제라는 사람은 그 버릇 을 잊지 못했는지, 정치판의 저니맨처럼 수없이 당적을 바꿔가며 불 사조와 같은 정치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이번엔 이인제 같은 양반 이 없었다. 오로지 전명헌의 매력 만으로 표를 얻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더 쫄리네."

텔레비전으로 개표 방송을 틀어 놓은 유재원의 불안감이 결국 입으 로 세어 나왔다.

"응? 뭐가 잘못 되기라도 한 거 야?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한국 에 자기 이야기가 떠들썩하던데, 실수한 거라도 있어?"

그걸 옆에 찰싹 붙은 티파니가

그대로 주워들었다.

티파니는 요즘 주중은 샌 라몬에 서, 주말은 유재원의 집에서 사는 게 패턴화 되었다. 물론 티파니가 바쁘면 그게 어렵겠지만, 이번 주 는 월차를 써서 금요일부터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셰브롱의 본사가 있는 샌 라몬에 집을 마련 했다.

유재원은 이 지점에서 본인이 먼 저 도와주려고 했다. 그런데 외할 아버지인 프레더릭이 먼저 준비를 다 해놓은 상태였다. 티파니를 부 를 때부터 집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는 이야기다. 덕분에 티파니 나이 대에는 절대 구입할 수 없는 고급 주택에 살게 되었다.

비록 외할아버지께 집을 얻긴 했 어도, 티파니가 집에서 나와 독립 한 건 사실이었다. 때문에 티파니 가 주말에 샌프란시스코에 왔을 때, 본래의 집으로 가지 않고 유재원에 게 온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직 누가 당선될지 모르겠어서 그래."

인터넷 방송으로 연결된 한국의 공중파 방송을 생방송으로 틀어 놓 은 상황이었고, 텔레비전에서는 개 표 방송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15대 대선에서는 자동 계수기를 최초로 사용한 개표 시스템을 만들 었다. 계수기에 투표지를 넣으면 자동으로 숫자가 집계되어 텔레비 전 개표 방송에 즉각 반영되는 시 스템이다. 하지만 분류 자체를 사 람의 손으로 하는 건 여전했기에 개표 속도는 너무도 느렸다.

샌프란시스코도 이제 오전 10시 가 다 되었는데, 아직도 표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세 명의 후보가 지금은 고만고만한 수준이 었다. 물론 유재원은 전명헌이 패 배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 지만 압도적인 승리라 예상했는데, 표 차이가 크게 나지 않은 것에 당 황할 뿐이었다.

"전명헌 할아버지가 밀리고 있다 는 말이야?"

텔레비전에 집중하고 있던 유재 원은 티파니의 말에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어? 지금은. 그런데 티파니도 제법 친근한 느낌인데? 101빌딩 개 장식에서 많이 친해졌어?"

"응. 사실 그전에도 본 적이 있 어. 5년 전쯤?"

유재원이 티파니를 전명헌에게 최초로 소개시켜준 때가 ID 글로벌헤드쿼터 빌딩 개장식이라고 생각 했다. 그런데 그전에 서로 접점이 있는 사이라니 믿기 힘든 소리였다.

"무슨 일이었는데?"

곧바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 니 무슨 석유 회사 오너들의 비공 식 사교 모임과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비공식 모임? 아무리 그래도 전 할아버지는 세븐 시스터즈의 일원 은 아닌데?"

"에이, 그분들만 모이면 얼마나 심심해? 석유 관련 업체 사장님들 도 다 모이는 거지. 전명헌 할아버지도 그때 봤어."

그러고 보니 미래그룹도 정유 회 사 하나를 5년 전쯤에 인수했는데, 바로 로열더치쉘에서 지분을 투자 해 만든 극동석유였다. 극동석유를 인수하고 미래정유라고 이름을 바 꾸었는데, 이때 접점이 생긴 모양 인지 석유 회사 오너들의 비공식 사교 모임에 초대된 것 같다.

하여간 나이를 생각하면 너무도 열성적으로 달리는 전명헌이었다.

"와! 이제 막 치고 나가시는데?"

동시에 티파니의 환호도 나왔다.

현실로 돌아와 바로 텔레비전을 확인하니, 전명헌의 득표수가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다른 후 보들은 득표 숫자가 갱신될 때마다 수백 단위로 올랐다면 전명헌은 수 천 단위로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까지는 지역 기반 이 있는 투표함들이 먼저 열린 것 이고, 이제부터는 서울이나 경기도 권의 투표함이 열리기 시작한 모양 이다.

아침 일찍부터 팽팽하게 당겨졌 던 유재원의 긴장감도 그제야 살짝 풀어졌다. 하지만 자리를 뜨진 못 했다. 최소한 당선 확실 속보가 뜨 기 전까지는 마음이 편하지 않을것 같았다.

몇 시간 후.

-고맙다. 다 네 덕이야!

"제가 뭘요. 할아버지 능력이죠."

유재원은 티파니폰으로 누군가와 덕담을 주고받았다.

당연하게도 그 누군가는 바로 전 명헌이었다. 유재원이 텔레비전에서 굵은 금색 글씨로 당선 확실이라는 속보를 보았을 때, 티파니폰도 동시에 올렸다. 발신자마다 서로 다 른 벨소리를 설정해 놓을 수 있었 기에 주머니에 티파니폰이 있으면 벨소리만 듣고도 누가 전화를 걸었 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15대 대선의 결과는 전명헌 할아 버지가 41%, 김대중 후보가 34%, 이회창 후보가 22%를 득표했고 나 머지 3%를 선거 때마다 꼭 등장하 는 군소정당 후보들이 나눠 가져갔 다.

투표 전날까지도 실시된 전화 여 론조사 결과보다는 좀 떨어진 숫자 였다. 아무래도 선거 막판에 터진 전두환 사형이 대구, 경북 지방에 작동하면서 보수 세력의 집결이 있 었고, 중도층의 이탈도 생겨나면서 전명헌 할아버지의 지지율 3% 정 도가 떨어져 나갔다.

이것 말고도 전명헌의 지지율에 영향을 준 작은 해프닝은 또 있었 다.

저번 15일, 그러니까 투표 3일 전에 전명헌이 급히 병원에 다녀왔 다는 것이 제법 큰 이슈가 되기도 했다.

이에 깜짝 놀란 유재원이 급하게 전화를 했는데, 전명헌은 천연덕스 럽게 전두환 사형 논란이 유재원에 게 집중되자, 저번 14대 선거 때처럼 병원 찬스를 이용한 것이라고 했다.

살짝 아쉬운 대목이었다.

본인을 생각해주는 건 고마운 일 이었다. 그런데 병원 찬스(?) 때문 에 전명헌에게 걸린 가장 큰 약점 인 노환이 다시금 부각되면서 떨어 져 나간 사람들도 제법 많았던 것 이다.

김대중 후보도 나이가 많다는 소 리가 나오는데, 전명헌은 김대중 후보보다도 나이가 더 많았다. 만 에 하나 대통령 직무 수행 중에 노 환으로 탈이 나면 큰일이라는 의식 이 유권자들에게 깔려 있었다. 특히 세 후보 중에 제일 젊은 이회창 은 두 후보를 공격하는 주요 포인 트가 바로 나이일 정도였다.

그렇지만 대세를 바꾸진 못했고, 결국 한국의 15대 대통령은 전명헌 이 되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아직 당선중도 안 받은 상태였 고, 그냥 텔레비전 자막으로 당선 확실만 뜬 상황인데도, 여러 가지 감상이 몰아치시는 모양이다.

"에에,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공 약으로 걸었던 걸 다 실행하셔야죠. 최대한 빨리 믿을 수 있는 사람들로 정권 인수 위원회를 꾸리고 정 권 인수 작업을 시작하셔야 해요."

유재원은 그런 전명헌을 바로 현 실로 끌어내렸다.

-어휴,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너 는 어째 젊은이 같지가 않구나. 좋 은 일이 있으면 방방 뛰면서 즐길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야.

이에 전명헌은 현실로 돌아오며 푸념을 했다.

순간 움찔한 유재원이었다. 사실 몸만 좀 젊었지, 안에 든 영혼의 나이는 적어도 김대중 후보랑 친구 를 먹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로 인해서 대통령 당선 이라는 건 정치인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기쁨일 텐데, 너무 사무적 인 반응만 보여드린 것 같다. 하지 만 지금 환호하는 것도 분위기가 이상한 일인지라 머쓱해진 유재원 은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알겠어요. 전화는 나중에 또 하 기로 하고, 당선 수락 연설부터 준 비하세요. 일단 낙선한 두 후보에 게 위로의 말씀도 좀 해주시고, 전 국민이 함께 국난 극복을 위해 뭉 쳐야 한다는 정도의 메시지만 담으 면 될 거예요."

-당연히 준비 중이다. 그리고 취임식에 참석할 거지? 때가 때이니 만큼 화려하겐 못 하겠지만, 네가 온다고 하면 좋은 자리 준비해 놓 으마.

"물론이죠."

"할아버지! 저도요!"

이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티파니 도 끼어들었다.

한국어는 이제 듣기와 말하기는 물론 쓰기도 완벽했다. 유재원도 가끔 헷갈리는 맞춤법까지도 티파 니는 완벽했다.

-아, 티파니 양도 옆에 있느냐?

"네네!"

-당연히 티파니도 초대해야지.

얼떨결에 티파니도 초대를 받았 다. 약혼한 사이니 공식 행사에 나 란히 서도 문제는 없겠지만, 이렇 게 해도 되나 싶기도 했다. 그래도 전명헌이나 티파니 모두 기분이 좋 아 보이니 그걸로 됐다.

회귀로 압도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