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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413화 (413/1,007)

21권 22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당연히 태평양 건너 샌프란시스 코에 있던 유재원도 한국발 긴급 속보를 듣고 깜짝 놀랐다.

설마 하긴 했다. 97년 12월에 형 이 집행될 수 있는 사형수 숫자는 딱 정해져 있었고, 여기에 추가될 사람들은 극소수였으니 말이다.

유재원은 김 대통령의 의중을 파 악해 보기 위해 고심했다.

안드로이드 98과 ID 오피스 98 출시를 위해 일을 할 시간이었지만, 한국의 긴급 속보를 무시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가만. 이거 나를 타깃으로 잡은 거 같은데?"

유재원은 김 대통령의 그리는 큰 그림의 윤곽을 어렴풋이 잡아낼 수 있었다. 그러자 기분이 매우 나빠 졌다.

저번 통화에서 100억 달러를 운 운했던 게 김 대통령에게 빌미를 준 것 같다.

그때 유재원은 두 가지만 실행하 면 곧장 100억 달러를 한국에 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변동 환율제와 사면 철회였다. 김 대통령은 당시매우 큰 불쾌감을 토로하면서 유재 원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런데 지금 돌아가고 있는 상황 을 보니 김 대통령이 두 가지 요구 를 매우 이상한 그림으로 지켜내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환율 자율변동제의 실시는 IMF 와의 약속이었고, 12월 말쯤에 실 행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사면 철회는, 아예 사형 집행이라는 급격한 방식으로 이뤄버렸으니 말이다.

분명 사람들은 지금 시점에 전두 환이 사형 당한 이유에 대해 궁금 해 할 것이고, 김 대통령 측은 대놓고 말하진 못하겠지만, 100억 달 러를 얻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투로 말할 거 아니겠는가.

유재원의 입장에서는 100억 달러 를 환전해도 문제고, 하지 않아도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제 일주일 밖에 남지 않은 97년 대선 투표에 도 분명히 영향이 크게 미칠 것이 다.

"정치가 무서운 건 알았는데, 상 상 초월이네."

유재원은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몇 시간 후.

사건의 흐름은 유재원의 예상 그 대로였다.

-재원아! 지금 여의도에 이상하 고도 무서운 소문이 돌고 있단다.

선거 운동에 바쁠 전명헌으로부 터 유재원에게 바로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전두환 사형 집행에 제가 연관 되었다는 이야기요?"

-응? 그러면 그게 사실이냐?

유재원이 먼저 물으니 전명헌이 펄쩍 뛰며 다급히 물었다. 물론 그모습이 보이는 게 아니었지만, 말 투만으로 다 느껴질 정도였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죠. 저는 사 면 철회만 요구했거든요. 사형 집 행을 결정한 건 당연히 김 대통령 본인이란 말이죠."

유재원이 요구했던 사면 철회는 말 그대로 철회였다. 감방에서 죗 값을 치르면서 오래오래 썩기를 바 랐던 것이지 사형을 집행하라는 소 리는 아니었다.

-세상에! 그러면 재원이 너에게 현금으로 100억 달러가 있다는 말 이냐? 김영삼이를 도발하려고 막 부른 돈이 아니었단 말이야?

그런데 전명헌은 유재원의 대답 을 엉뚱하게 해석한 모양이다.

마치 줄 생각도 없었는데 김 대 통령을 약올리려고 100억 달러라는 큰돈을 불렀다는 뜻으로 들렸다.

웅? 김 대통령의 도발이라니? 설 마! 김 대통령도 100억 이야기를 도발로 받아들였다는 말인가?

순간 그때의 기억을 되짚어 보는 유재원이다. 하지만 100억 달러라 는 소리를 들었을 때 돌아온 김 대 통령의 말투에서는 이상한 점이 그 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히 아니죠. 진짜 있는 돈이에요. 그것도 억지로 끌어 모은 게 아니라 투자했다가 날려도 상관없 는 여유 자금이에요."

유재원은 일단 전명헌부터 안심 시켰다.

-세상에. 100억이 뉘 집 개도 아 니고, 그게 말이 되느냐?

하지만 안심시키는 건 실패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1달러도 귀한 한국이었다. 그런데 날려도 상관없 는 여윳돈으로 100억 달러가 있다 는 건, 전명헌이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미래 그룹도 유재원의 언질을 받고서 외환위기에 대응하긴 했다. 메모리 반도체나 자동차의 덤핑성 판매, 거대 플랜트의 저가 수주 등 등. 달러화를 끌어들일 수 있는 모 든 조치를 다 취했다.

덕분에 다른 기업보다는 외화로 부터 여유로웠다. 그렇지만 이렇게 무리해서 달러화를 모아도 그 액수 가 10억 달러를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것도 미래 그룹 계열 사들이 안고 있던 단기성 외채를 갚고 나면 금세 사라질 금액이었다.

그런데 유재원은 100억 달러가 있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티파니폰 너머로 들리는 전명헌의 호들갑에 유재원은 사실 400억 달러는 언제든 동원할 수 있다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사실대로 말 했다가는 연로하신 전명헌 할아버 지가 뒤로 넘어질 것 같았으니 말 이다.

대신 유재원은 김 대통령과의 통 화에 대해 간단히 말해드렸다.

-그렇단 말이지. 알겠다.

전명헌도 정치인이 다 되었기에, 유재원의 설명을 듣고 대충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는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거 아주 괘씸하구나. 이렇게 되면 전두환 지 지 세력은 이제 우리에게 이를 갈 고 있겠어.

김 대통령은 피보다 귀한 외화 100억 달러를 들여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형을 집행했다고 이야기 하고 다닐 것이다. 덤으로 유재원 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전명헌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여당의 분열을 노리고 이러한 요구를 했고, 본인 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할 수밖에 없 었다는 흐름이다.

그러면 전두환과 노태우 지지 세 력은 유재원 그리고 전명헌과 통일 국민당에 앙심을 품을 것이다.

더욱 큰 타격은 깨끗하기 그지없 던 유재원의 이미지도 심하게 훼손 될 것이다. 노회한 구태 정치인도 쓰기 힘든 암수를 아무렇게나 거리 낌 없이 쓴다고 오해하기 딱 좋은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유재원의 강력한 지지자들 은 이런 소리를 웃어넘길 것이다. 하지만 중도층이 문제다. 한국의 중도층이라는 부류는 정치적 혐오 가 심한 이들이었다. 그래서 네거 티브 선거전이 심해지면 투표 자체 를 포기해버린다.

지지 세력의 집결과 동시에 중도 층에겐 정치 혐오를 일으켜 투표를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자칭 보수 선거 운동의 루틴이었는데, 그 역 사가 올해부터 시작될 거 같다.

"걱정 마세요. 겨우 이 정도 술 수에 당할 제가 아니까요."

-그럼, 내가 자식 놈들 걱정은 해도 재원이 네 걱정은 않는다.

전명헌과의 통화는 그렇게 마무 리 되었다.

잠시 후에는 최강욱의 연락이 왔 고, 이를 시작으로 그룹의 정보팀 이나 한국 지사에서 정계, 경제계 등에서 유재원과 관련되어 빠르게 돌고 있는 루머에 대한 보고가 쏟아졌다.

이러한 반응 속도로 보면, 역시 확실한 휴민트가 있는 전명헌이나 최강욱이 빠른 편이었고, 필드에서 몸으로 뛰면서 정보를 얻는 정보팀 팀원들은 좀 느렸다.

그렇지만 정보의 질을 따진다면 정보팀의 보고서는 제법 구체적이 었다.

정보팀에서 보낸 보고서에는 긴 급 여론 조사를 통해서 이번 사안 이 97 대선에 미칠 파장을검토한 자료도 있었으니 말이다.

내용을 보면 아직은 큰 영향은

없다는 내용이었다. 전명헌의 지지 율이 조금 출렁이긴 했지만, 전체 후보 중 47%의 압도적인 지지는 여전했다. 반면 여당인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의 경우엔 오차범위 내 인 1.5%의 지지도 상승이 있었다.

"하여튼, 그 양반의 무대포는 알 아줘야 해."

그렇게 다급히 진행된 통화를 모 두 마친 유재원의 푸념이 자연스레 터졌다.

김 대통령이 핀치에 몰린 순간에 도 과감하게 치고나가는 건 참 잘 한다 싶다. 하지만 이번 일은 하나 회 처단 때와는 많이 다르다.

도대체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막 질렀던 건지 도통 이해 가 되지 않았다.

설마 유재원이 그 통화를 하면서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고 생 각했던 것일까? 티파니 폰1부터 기 본으로 내장되었던 통화 녹음 기능 을 그저 폼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건 참 아쉬운 일이었다.

"어쩌면 이게 역사의 반동일 수 도 있으려나?"

원래 역사라면 이쯤해서 큰 사건 하나가 일어난다.

여당 측 선거 캠프에서 북한에

휴전선 인근에서 대남 도발을 해달 라는 은밀한 제안을 보내는 일이었 다.

그 유명한 총풍사건이다.

이번에는 그러한 모의가 실행될 기미는 없었다. ID 그룹은 물론 미 국 정부의 정보 라인을 파 봐도, 전명헌 후보 쪽에 선을 대고 있는 안기부 라인을 봐도 총풍에 대한 경고는 없었다.

아무래도 남북관계가 이전과 달 리 너무나 좋은 상태였고, 북한 IAEA 사찰도 무리 없이 이뤄지고 있는 상태였다. 경수로 지원 사업 도 순조로웠다. 김 대통령에게 남은 업적 중에 그래도 큰 존재감을 발휘하는 게 남북관계 개선인데, 이걸 깨면서까지 사고를 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총풍이 사라진 대신, 오 늘의 사건이 터졌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일단 준비는 해야겠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유재원은 일단 빈센트 그린힐에게 ID 톡을 보내, 본인의 여유 자금 중 100억 달러를 언제든 송금할 수 있게 준 비하라고 했다.

김 대통령에게 요구했던 것들이 기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지켜지긴 했으니, 유재원도 이에 맞게 약속 을 지키기 위함이다.

역시나 다음 날이 되자 청와대로 부터 예상했던 반응이 나왔다.

-김 대통령, 이제는 유재원 회장 이 약속을 지킬 때.

김 대통령의 발언은 정식으로 기 자회견을 한 것도 아니고, 국무회 의 중에 나온 말도 아니었다. 전두환 사형에 대한 질의가 청와대로 쏟아졌고, 이에 대해 청와대 대변 인이 나와서 답변을 하는 상황이었 다.

김 대통령은 유재원과의 통화 내 용에 대해선 함구했던 모양인지, 청와대 대변인의 답변은 완전히 원 론적이 었다.

국가 대통합을 위해 사면을 하려 고 했지만, 정당 간 합의가 이뤄지 지 못했고 국민의 반발도 심해 사 면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 기였다. 사면 철회가 어째서 사형 집행인지 물어보는 기자의 질문에 는 어물쩍 넘기면서, 김 대통령이 유재원에게 약속을 지키길 바란다 는 이야기는 꿋꿋하게 남겼다.

당연히 이후에는 ID 그룹으로 문 의가 빗발쳤다.

보수 성향인 신문사 기자들은 그 들의 구심점이 죽자 눈이 돌아버렸 는지, 사형을 요구한 이유에 대해 따져 물을 정도였다.

이에 대한 ID 그룹의 대응은 간 단했다.

깔끔한 무시.

기자들의 쏟아지는 문의에는 ID 그룹 그 누구도 정식으로 답변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언론은 김 대 통령의 말이 사실이니, ID 그룹과 유재원이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식으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 다.

심지어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기 사가 쏟아지기도 했다.

어쩌면 그리 전명헌을 대통령으 로 만들려고, 여당 보수 세력의 분 열을 위해 유재원이 악마의 선택을 하도록 강요했다는 식이었다. 그야 말로 언론이 난리 통이었을 때, 유 재원의 파워블로그에 새로운 게시 물 하나가 올라왔다.

김 대통령과의 통화 음성과 녹취 록이라는 이름으로, 3분 정도가 되 는 짧은 음원 파일, 여기에 담겨 있는 대화를 텍스트로 옮긴 문서였 다.

반응은 화약이 불을 만난 것처럼 화끈했다.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이나 유럽 에서도 화제가 되었을 정도였다. 특이 유럽의 반응은 매우 빨랐는데, 사형제 유지 국가와는 무역에 차별 을 둘 정도로 사형제 폐지에 적극 적인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독재자 전두환의 사형을 두고 갑을논박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이를 직접 요구했든 안했든 빌미가 된 유재원에 대한 이야기도 쏟아졌다.

물론 이래봐야 한국만큼 격한 반 응은 아니었다.

유재원과 김 대통령의 대화 중 언급된 사면 철회가 사형을 의미하 는 것인지 아닌지 따져보는 것부터, 유재원이 100억 달러를 진짜 가지 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까지. 녹취록에서부터 파생된 대화 주제 의 스펙트럼은 무지개 빛보다 더 넓었다.

심지어 과격한 극우파 시민 단체에서는 유재원의 고향인 덕진리에 쳐들어와 전두환을 살려내라고 시 위를 벌일 지경이었다. 다행히 여 주시에서 경찰을 미리 파견해 마을 로 진입이 저지되었지만, 이것 자 체로 커다란 뉴스였다.

회귀로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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